신라면은 영원할까?

신라면은 영원할까?

2019-01-07T17:11:07+00:00 |food|

꼭 그렇지는 않다.

돈이 없어도 먹고, 돈이 있어도 찾아 먹는다. 한국인 한 명이 1년에 약 76봉지의 라면을 끓여 먹지만, 쌀은 남아돈다.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절처럼 어떻게든 한 끼 해결하려고 먹는 대체 식품의 범주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빨간 국물과 꼬불꼬불한 면발, 그리고 살포시 풍미를 얹는 건더기의 조합이 어떤지에 따라 ‘입맛의 선택’을 받는다. 라면은 지금 엄연한 기호 식품이다.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삼양라면이다. 일본의 ‘묘조식품’에서 인스턴트 라면 제조 공법을 배워 1963년에 출시했다. 중량 100그램, 가격은 10원이었다. 삼양라면의 경쟁자는 없었다. 1965년 롯데공업(현 농심)에서 롯데라면을 내놓고, 1968년 왈순마를 선보였지만 먼저 시장에 진입해 안착한 삼양라면엔 역부족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업계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한국야쿠르트(현 팔도), 오뚜기, 빙그레가 라면 사업부를 신설하거나 작은 업체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뛰어들었다.

1989년, 점점 덩치가 커지던 라면 업계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삼양라면의 면발은 미국에서 수입한 소기름과 팜유가 섞인 기름에 튀겨졌다. 미국에선 식품에 사용하지 않는 동물성 기름을 모두 공업용으로 분류했는데, 소기름도 이에 해당됐다. 미국에서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가공을 통해 식용으로 쓸 수 있는 기름이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분류 방식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공업’이라는 단어가 문제였다. 기계의 윤활유 등 산업 현장에서 쓰는 기름을 연상시켰다.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따지기도 전에 삼양은 비도덕적인 기업이라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삼양라면 판매량은 수직으로 떨어졌고, 결국 생산이 중단된다. (삼양은 1994년에 팜유로 튀기는 삼양라면 재생산을 시작했고, 1997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우지 파동으로 1등이었던 삼양라면이 추락하자 신라면이 ‘빈집 털이’를 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삼양라면을 처음 1위에서 끌어내린 건 신라면이 아니라 된장 국물 맛을 내는 안성탕면이다. 1983년에 처음 나와 4년 만인 1987년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으로 등극한다. 우지 파동이 터진 1989년보다 2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안성탕면을 만든 농심이 업계 1등으로 올라선 것도 이 즈음이다. 농심은 다양한 신제품을 꾸준히 내놓으며 1985년에 이미 삼양의 점유율을 앞지른 상태였고 우지 파동 1년 전인 1988년 12월엔 51.2퍼센트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신라면은 삼양라면이 따라잡힐 즈음인 1986년에 나왔다. 역시 우지파동 전이다. 엄청난 인기로 안성탕면과 더불어 삼양라면의 자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은 안성탕면과 신라면의 협공에 점점 몰락하는 중이었고, 우지 파동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내리막길에 들어섰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팜유로만 면을 튀기던 농심이 반사이익을 본 건 사실이지만, 우지파동이 라면 판매 순위를 뒤엎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삼양라면을 무너뜨린 안성탕면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신라면이 1991년에 안성탕면을 제치고 1위가 된다. ‘매울 신辛’ 자를 쓰는 경영자의 성을 딴 동시에 맵고 자극적인 맛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지금이야 국물 라면, 볶음 라면으로 나눠 ‘레벨’별로 줄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매운 라면이 다양하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한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소고기와 표고버섯을 우려낸 듯한 얼큰한 국물과 고추와 후추가 혀끝을 알싸하게 도발하는 맛에 대중은 빠르게 중독된다. 신라면의 시대가 열린다.

2018년은 신라면이 1위가 된 지 28년이 된 해다. 하지만 위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상반기 기준으로 신라면은 16.2퍼센트의 점유율로 여전히 1위였지만 진라면이 13.5퍼센트를 기록하며 신라면의 멱살을 잡았다. 2015년엔 각각 18.4%와 9.7%였지만 3년째 신라면을 맹추격하며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다. 신라면보다 조금 늦게 나오긴 했어도 진라면 역시 30년이 넘은 ‘원로급’ 라면인 점을 고려하면 끈질긴 뒷심이다.

그동안 신라면이 영광의 시절만 보낸 건 아니다. 2011년 당시 7백50원이던 신라면의 2배가 넘는 1천백원으로 가격을 책정한 신라면 블랙은 실패한 파생상품의 좋은 예가 되었다.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이 그대로 담겨 있다”라는 문구가 허위과장광고로 판명되어 과징금을 내야 했다. 신라면이라는 이름에 흠집이 났다. 또한 당시는 팔도 꼬꼬면을 비롯해 삼양 나가사키 짬뽕 등 ‘하얀 국물 라면’이 휩쓸던 때다. 하얀 국물 라면 시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움츠러들었지만, 신라면은 느닷없이 등장한 꼬꼬면에게 강제로 자리를 양보할 뻔했다.

물론 통계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령 분식점에서 먹는 라면은 어떤 걸 먹을지 선택권이 없지만 분식점이 구매하는 라면은 당연히 통계에 잡힌다. 전국 식당에서 어떤 라면을 구매하는지에 대한 조사는 따로 없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4+1’ 혹은 ‘5+1’ 번들 상품도 애매하다. 소비자 입장에선 4개 가격을 지불했지만 4개가 팔렸다고 할지, 5개가 팔렸다고 해야 할지 기준을 정하기 나름이다. 그래도 통계적 오차가 있을지언정 진라면의 진격은 엄연한 사실이다. ‘매운 국물 라면’이라는 같은 장르, ‘한 방’ 후련히 날리고 장렬하게 도태되는 게 아니라 성큼성큼 따라붙는 질긴 추격자. 지금 신라면은 전과는 다른 경쟁자를 상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계적 수치를 제외하고 맛으로만 따져도 신라면이 진라면을 앞설까? ‘맛’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지만 신라면의 맛이 옛날 같지 않다는 의견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라면 요리 연구가 임형태는 신라면이 달라진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몇 년 전 신라면 맛이 변했던 적이 있긴 해요. 라면은 정부에서 가격을 통제하는데, 원료 가격이 계속 오르니까 중량을 줄이는 방법을 택한거죠. 그런데 예를 들어 면중량을 10퍼센트 줄였다고 스프도 10퍼센트 줄이면 맛이 완전히 달라져요. 유탕면이잖아요.”

면을 기름에 튀기면 면이 머금었던 수분이 날아가 내부에 스폰지 같은 틈이 생긴다. 수분이 빠진 아주 미세한 구멍으로 국물이 다시 침투하는 구조다. 조리 시간이 생명인 인스턴트식품의 특성상 면을 빨리 익힐 수 있기 때문에 유탕 처리가 일반적이다. 입에 들어간 면은 국물을 다시 내뱉으며 혀에 맛을 전달한다. 결국 둘 사이에는 적정한 비율이 있는데, 중량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스프의 성분 배합과 맛의 강도 등에 변화가 생겨 ‘진짜 신라면의 비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행착오 끝에 알맞은 비율을 다시 찾은 것 같아요. 지금 신라면 맛은 옛날 맛과 거의 차이가 없거든요.”

반면 신라면과 다르게 진라면은 전보다 훨씬 맛있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뚜기는 2013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진라면의 맛을 진화시켰다. 맛이 조금씩 나아지던 시기와 판매량이 늘어난 시기가 거의 포개어진다. “진라면이 닮고 싶은 라면은 결국 신라면이에요. 장르도 같고요. 두 라면을 두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구분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한국인은 오랫동안 신라면 맛에 길들었다. 신라면과 비슷한 맛을 낸다는 건 미각이 기억하는 ‘익숙한 맛’에 근접한다는 걸 뜻한다. 신라면이 점거한 영역을 가장 효율적으로 파고드는 방법일 수 있다.

실제로 신라면과 진라면의 스프에는 겹치는 성분이 상당히 많다. 명칭과 형태만 조금 다를 뿐이지 내고자 하는 맛은 거의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면의 ‘조미소고기분말’, ‘후추풍미분말’ 등은 진라면의 ‘쇠고기육수분말’, ‘후추분말’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다만 뭔가를 더 보태서 신라면보다 풍성한 맛을 내는 거죠. 건더기 스프가 큰 역할을 해요. 요즘 진라면 건더기 스프에서 소고기 맛 후레이크 양이 상당히 늘었어요. 신라면이 내는 맛에서 한발 더 나가는 거예요. 게다가 덩어리로 되어 있으니까 시각적인 만족감도 높고요.”

면발도 신라면보다 진라면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진라면이 더 쫄깃쫄깃하다는 것이다. 진라면 포장지 뒷면의 원재료명에는 ‘난각분말’이라는 말이 쓰여있다. 반죽을 만들 때 첨가하는 원료로, 달걀 껍데기를 가공해 얻는 칼슘 성분이다. 라면에 부족한 칼슘을 보충해 영양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인 동시에 툭툭 끊기기 쉬운 유탕면의 가닥을 더 탱탱하고 생기 있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다. 칼슘은 밀가루 반죽에 글루텐이 형성되게 한다. 면발의 찰기와 연결되기 때문에 현재 여러 라면에 칼슘이 들어간다. 신라면 뒷면에도 원재료명 칸에 ‘난각칼슘’이 명시되어 있다. 난각분말과 같은 성분이다. 신라면과 진라면의 반죽에 인위적으로 넣는 칼슘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제작 기밀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밀가루와 전분, 칼슘 등을 섞어 만드는 진라면 반죽의 성분 비율과 제조 공법이 대중의 호감을 얻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기업에 대한 평판도 커다란 몫을 한다. 오뚜기는 비정규직 비율이 매우 적고, 기업 회장이 남몰래 한 선행이 알려지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았다. 반면 농심은 그동안 크고 작은 부정적 이슈에 직면하면서 불매 운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라면 업계의 과반 이상을 점유 중인 것에 대한 반발심도 무시할 수 없다. 가격 인상 역시 소비자의 인식에 영향을 준다. 신라면이 8백50원, 진라면이 7백80원으로 둘의 가격은 겨우 70원 차이다. 둘의 판매량을 좌우하는 주된 요소라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진라면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11년 동안 가격이 그대로라는 것이 신라면과 다르다. 맛은 좋아졌지만 가격은 그대로라는 사실은 두 라면의 차액인 ‘70원’ 이상의 효과를 낸다.

신라면은 잘 만든 라면이다. 소수를 위한 매운 라면으로 출발했지만, 한국 라면 맛의 표준을 세울 정도로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오리온 초코파이처럼 국내에서 대표성을 갖는 대량 생산 식품 중 하나다. 하지만 맛이 조금이라도 변하는 순간 신라면은 더 이상 신라면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1등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맛으로 활약한 대가다. 신라면은 앞으로도 바뀌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2등 이하의 라면은 얼마든 맛을 개량할 명분이 있다. 신라면에 길든 사람들을 ‘더 끌리는 맛’으로 유혹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신라면의 점유율 하락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 소비를 주도하는 세대는 계속 바뀌기 마련이니까. 미래에 소비를 주도할 세대는 신라면에 길들지 않았다. 이미 라면의 종류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살고 있고, 신라면이 압도적인 1위를 하는 시대를 겪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라면이 하루아침에 몰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1등을 유지할 날을 장담할 수 없을 뿐이다. 신라면은 지금 새롭지도, 특별히 맛있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