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좋아요’가 사라진다면

2020.01.23GQ

인스타그램은 ‘좋아요’ 수를 숨기는 기능을 시범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좋아요’ 수에 대한 부담감을 덜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좋아요’가 인스타그램의 원동력 아니었던가? ‘좋아요’가 없어진다고 관심에 대한 갈망도 사라질지는 알 수 없다.

인스타그램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례 하나가 있다. 지난 2017년 11월, 공영방송 총파업으로 약 3주 만에 녹화를 시작한 MBC <무한도전>은 멤버들의 근황을 ‘무한뉴스’로 조명했다. 이날 가장 주목받은 멤버는 정준하다. 그는 악플러들에게 “기대해”란 한 마디를 인스타그램에 남긴 후, 악플이 더 많아지자 결국 사과했고, SNS 활동을 자제했다. 그런데 ‘예능 봇짐꾼’으로 출연한 조세호는 정준하가 그 와중에도 ‘좋아요’는 눌렀다고 폭로했다. <무한도전>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사진 가운데 정준하 자신이 나온 사진에만 ‘좋아요’를 눌렀다는 것이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정준하의 눈은 잠시 초점을 잃더니 고백했다. “SNS 활동을 자제했는데, 그런데 손은 ‘좋아요’를 누르게 되잖아요.”

‘좋아요’를 향해 저절로 움직인 정준하의 손은 ‘좋아요’를 둘러싼 기쁨과 고통, 환희, 심란함 등을 모두 포괄한다. 정준하의 손은 정말 좋아서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요’는 좋은 것에 누른다. 정준하의 손은 <무한도전> 계정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지만, 정준하가 ‘좋아요’를 받는다는 생각으로 눌렀을 것이다. 역시 ‘좋아요’는 받으면 기분이 좋다. 정준하의 손은 정준하의 사진에 다른 <무한도전> 멤버 사진들보다 더 많은 ‘좋아요’ 수가 찍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움직였을 것이다. ‘좋아요’는 많이 받을수록 좋지만,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더 좋기 때문이다. 반대로 ‘좋아요’ 수가 적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고통스럽다. 인스타그램은 지난 11월 16일 캐나다, 아일랜드, 이탈리아, 일본, 브라질, 호주, 뉴질랜드에 이어 한국에서 일부 사용자에 한해 ‘좋아요’ 수를 보여주지 않는 기능을 시범 운영한다고 밝혔다. ‘좋아요’ 수는 계정 주인만 알 수 있고, 주인이 아닌 사람은 볼 수 없는 형태다. 그런데 정준하의 사진이 올라온 계정이 <무한도전>의 것이 아닌 일반 사용자의 것이라면? 그래도 정준하의 손은 자신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를까? 누를 필요가 없을 거다.

인스타그램은 시범 운영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용자들이 ‘좋아요’ 수로부터 받는 압박을 해소해 콘텐츠에 더 집중하게 만들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인스타그램 유저들이 ‘좋아요’ 수 때문에 자극적인 콘텐츠로 경쟁하는 것을 막겠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좋아요’ 수에 따라 우울감을 느끼기도 하고, ‘좋아요’ 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포스팅을 꺼리는 일을 없애겠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사실 이용자들은 ‘좋아요’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달라고 한 적이 없다. ‘좋아요’에 압박을 받는 인플루언서들은 오히려 그 압박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아요’를 더 많이 받을지 고민하고, 포스팅하는 콘텐츠에 더 집중한다. 이들이 ‘좋아요’에 압박을 받는 이유는 단지 그걸 받을 때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수많은 ‘좋아요’ 수가 사람들에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좋아요’ 수를 계정 주인인 나만 볼 수 있다면, ‘좋아요’를 적게 받아서 겪는 고통은 사라지겠지만 많이 받아서 얻는 기쁨도 없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구상은 압박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제거하겠다는 취지로 기쁨도 함께 삭제시키는 것이다. 애덤 모세리 인스타그램 최고 경영자는 지난 2019년 4월 열린 페이스북 개발자 콘퍼런스 ‘F8’에서 “이용자가 인스타그램을 경연대회처럼 느끼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원치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경연대회가 아닌 건 아니다. 트위터에서는 재미있는 ‘움짤’이나 기발한 140자로, 인스타그램에서는 멋진 외모나 공간이 담긴 사진으로 경연하는 셈이다.

지금의 소셜 미디어는 ‘숫자’를 통한 정량 평가로 순위가 갈리는 경연장이다. 이용자들은 자신이 본 가장 멋진 사진들에 ‘좋아요’로 투표하고, 동시에 보상한다. 이미 수많은 ‘좋아요’ 수를 기록한 피드에도 ‘좋아요’를 누른다. 함께 지표를 늘려가는 행동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스타그램이 발표한 실험은 단지 ‘좋아요’ 수를 없애는 게 아니라 공개된 정량 평가 지표를 없애는 것이다. 평가 지표가 없어진 이상, 정준하의 손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좋아요’를 누르지 않을 뿐이지, 다른 공개된 정량 평가 지표를 늘리려 할 것이다.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좋아요’ 수와 함께 ‘댓글’ 수가 표기된다. ‘좋아요’가 사라진 세상에서 사진을 올린 사람은 자신의 사진 밑에 달린 댓글의 수가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밖에 없다.

만약 댓글 수마저 공개 범위에서 사라진다면? 인스타그램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등 모든 소셜 미디어에서 ‘좋아요’ 수와 ‘댓글’ 수가 사라진다면, 그때서야 사람들은 지표의 금단현상에 시달릴 것이다.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이 처음부터 이 정도는 아니었다. 블로그만 할 때도 이용자들은 타인과의 쉬운 소통에 만족했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다른 이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스마트폰의 개발로 소셜 미디어가 간단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진화하면서 이용자는 더 많아졌다. 이 시기에 ‘좋아요’ 수는 소셜미디어 산업을 부흥시키는 결정적인 정책이었다. 2009년 2월 페이스북이 ‘좋아요’ 버튼을 추가했고, 2010년 6월에는 댓글에도 ‘좋아요’를 추가했다. 그동안 다른 계정의 피드에 굳이 댓글을 달지 않던 이용자들도 ‘좋아요’를 통해 이 세계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눌리는 ‘좋아요’의 수가 증가했다. 소셜 미디어 중에서도 인스타그램은 더 간단한 방식으로 더 아름답게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 형식 덕분에, 더 많은 이용자가 더 많은 ‘좋아요’를 누르는 곳이다.
이제 이용자들은 그 모든 숫자가 자신을 향한 순수한 지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소셜 미디어의 ‘좋아요’ 수는 연봉의 앞자리 수, 키의 두 번째 자리 수,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평수와 같다. 당연히 소셜 미디어의 세계는 선망과 질투의 감정이 폭발한다. 대부분의 이용자가 인스타그램에 공개하는 사진은 다른 이의 부러움을 의식한다. 화려한 ‘불금’의 풍경, 카페에 앉아 즐기는 망중한, 갓 배송된 물건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외모와 스타일. 모두가 ‘좋아요’를 많이 받는 셀러브리티가 되길 갈망한다. 다시 말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 이건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일까, 아니면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생겨난 욕망일까? 어느 쪽이든 셀러브리티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해서는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이 <뉴스의 시대>에서 설명한 바 있다. “셀러브리티 문화의 진짜 원인은 자기도취적인 얄팍함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친절함의 부족이다.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평범한 이에겐 품위를 갖추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회다. 현대 세계가 셀러브리티에 목을 매는 한, 우리는 부박하기보다는 불친절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 ‘품위’란 인간의 조건이다. 존경받지는 않더라도, 존중 받고 싶다는 욕구. 존중은 존경보다 쉬워 보이지만 현실 공간에서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셀러브리티에게 세상은 과하게 친절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셀러브리티에게 ‘악플’ 정도는 감수하라고 말한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상처 주는 말까지 참을 수 있으니, 내게도 세상이 친절을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욕망일지도 모른다.

소셜 미디어에 관한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이용자들이 ‘좋아요’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효과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알랭 드 보통의 말에 빗대 보면 자신에게 불친절한 현실에 비해 소셜 미디어는 자신에게 친절한 세상을 만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친절한 말과 미소를 얻는 것보다 ‘좋아요’ 하나를 얻는 게 더 쉬울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이 ‘좋아요’ 수를 감추어 ‘좋아요’에 대한 압박을 해소하려 한다는 건, 자기모순이다. 인스타그램이 현실에서 불친절함을 느낀 사람들에게 친절의 정량 지표를 제공한 덕분에 성장한 소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좋아요’ 수를 공개하지 않는 실험은 이용자들이 원한 게 아니라 사회적인 우려, 심리학자들의 연구, 그리고 부모들의 걱정에 대한 나름의 대응일 뿐이다. ‘좋아요’ 수를 감추면 ‘좋아요’에 대한 압박은 해소될지 모르지만, 세상이 친절해질 리는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욕망 역시 사라질 리 없다. ‘좋아요’가 아예 사라진 세상에서도 사람들의 손은 ‘좋아요’를 찾아 저절로 움직일 게 분명하다. 글 / 강병진 (<허프포스트코리아> 뉴스 에디터)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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