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 "배우라는 자긍을 새삼 들여다봤어요" | 지큐 코리아 (GQ Korea)

이준기 "배우라는 자긍을 새삼 들여다봤어요"

2020-07-01T11:23:40+00:00 |interview|

이준기의 시간은 지금도 생동한다.

팬츠, 아크네 스튜디오. 부츠, 앤더슨벨. 시계, 까르띠에 머스트 탱크 at 빈티크. 터틀넥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재킷, 프라다.

셔츠, 재킷, 모두 디올 맨. 글라스, 바카라.

셔츠, 팬츠, 모두 벨루티.

셔츠, 팬츠, 샌들, 모두 에르메스. 왼손 검지 링, 아쿠푸.

슬리브리스 톱, 재킷, 모두 프라다. 허리에 묶은 점프 수트, 김서룡 옴므. 슈즈, 디올.

재킷, 디올 맨. 팬츠, 산드로 옴므.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덴오브 소파, 알로소.

톱, 마린세르 at 분더샵. 팬츠, 드리스 반 노튼 at 분더샵. 뱅글, 에르메스. 네크리스, 아쿠푸.

톱, 산드로 옴므. 팬츠, 아크네 스튜디오. 이어커프, 포트레이트 리포트. 부츠, 앤더슨벨.

촬영하기 전 휴대 전화로 무슨 영상을 보고 있었어요? 역사 강의 유튜브요. 역사 콘텐츠에 빠져 있거든요. 재치 있는 사람들이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보면서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드라마를 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에요.

학창 시절에도 역사를 좋아했어요? 평균 점수의 주 득점원이 그쪽이었어요. 하하.

그러고 보니 사극에서의 활약들이 떠오르네요. 이번 드라마는 장르가 전혀 달라요. <악의 꽃>에서 맡은 역할은 이전까지의 캐릭터들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인물이 처한 상황부터 입장, 성격까지 다 달라요. 제가 맡은 ‘백희성’은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부여된 동시에 연쇄 살인을 저지른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인물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속여야 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미묘한 긴장을 장르적 특성과 연결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어요. 그건 온전히 배우의 몫이기도 하거든요.

얘기만 들어도 평범한 배역은 아닌 것 같아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솔직히 부담이 좀 됐어요. 남편과 아빠 역할을 소화하기엔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아직은 그만큼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언젠가 거쳐야 할 도전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면모를 찾아야 할 시점이기도 해요.

도전이라 말할 수 있는 역할을 위해 참고한 레퍼런스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백희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이코패스 연기는 처음인데, 영화 <조커>를 반복해서 봤어요.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분노에 매몰되기까지의 과정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참고했어요. 또 절제되고, 섬세한 면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판단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를 유심히 관찰했어요. 자신의 행동이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소름 돋을 정도예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채로요.

이미 촬영을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현재까지의 연기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게 모니터링을 하지 않고 있어요. 원래 매 장면을 모니터링하면서 놓친 부분을 발견했는데,
제 욕심 때문에 작품이 ‘과잉의 덫’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어요. 함께하는 모든 사람과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면 좋겠어요. 감독님, 스태프들, 동료 배우들을 전적으로 믿는 거죠. 그래서 저도 어떤 드라마가 나올지 모르겠어요.

<크리미널 마인드> 이후 3년 만에 문채원 씨와 재회했어요. <크리미널 마인드>를 촬영하면서 농담처럼 “다음에는 멜로 작품으로 만나자”라고 말했어요. 삭막한 범죄 수사물을 찍다 보니까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연기를 함께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평범한 멜로는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 부부로 만나긴 했으니 어쨌든 말한 대로 되긴 됐어요. 채원 씨의 성격은 저와 정반대예요. 조용하고, 진지한 편이죠. 서로의 최고치를 이끌어내는 데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캐릭터를 구축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돼요.

사실 올해가 데뷔 18년 차라는 사실에 놀랐어요. 늘 스스로 재능은 있다고 자신했어요. 다만 시간이 쌓여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고 하잖아요. 이전보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걸 느껴요.

데뷔 시절의 이준기는 어땠나요? 그때 어떤 고민을 했는지 기억나나요? 연극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는데 돈보다는 꿈을 좇았던 것 같아요. 상황이 아무리 막연하고 불투명하더라도 혈기와 열정을 발산하는 데 미쳐 있었죠. 대부분의 시작이 다 그렇잖아요. 지금은 배우라는 정체성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제 자신을 어디까지 이끌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경험이 늘고 시야가 넓어지면 보이는 게 많은 만큼 조심스러워지는 경향도 있어요.

롤 모델은 누구였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안성기 선배님이에요. 그 이유가 조금은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단순히 ‘안성기 선배님처럼 대배우가 되고 싶다’였다면, 지금은 태도를 닮고 싶어요. 연기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올지언정 촬영장에서의 태도만큼은 가장 뛰어난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걸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는 곳이잖아요. 다른 사람들과 힘을 모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현장이기도 하고. 그런 이타적인 태도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배우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뭘까요? 조화를 이끌어내는 배우.

미디어나 팬을 통해 들어본 적 있나요? 아직요. 다만 기억에 남는 다른 말이 있어요. 한 팬이 “당신을 생각하면 힘이 나요”라는 글을 보낸 적이 있어요. 배우로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어요.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럼 이준기에게 힘을 주는 배우는 누구인가요? 이병헌 선배님요. 직업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후배 연기자로서 이병헌 선배님의 작품을 볼 때마다 동기와 에너지가 부여되는 것 같아요. 같은 사람이 연기하는데도 지금까지 없었던 캐릭터를 완벽하게 만들어버리잖아요.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도 정말 또렷하고요. 인터뷰어가 되어서 인물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요.

동료 배우들의 작품을 모두 챙겨 보나요? 등장 인물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드라마를 봐요. 시청자들이 어떤 것에 열광하고, 대중이 어떤 소재를 좋아하는지 꼭 숙지하려고 해요. 시청자인 동시에 촬영장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드라마를 통해 일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죠. 더구나 요즘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이 정말 다양하잖아요. 지상파, 종편, 넷플릭스 등 각 플랫폼의 특성과 이에 적합한 작품의 형태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어요.

과거 진행했던 인터뷰를 참고하면 배우로서의 직업 의식이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었어요. 일 년에 한 작품은 하겠다는 결심이었죠. 그런데 작년에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서 처음으로 한 해를 쉬었어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신에게 화가 많이 나더라고요. 책임감을 다시 추스르고, 배우라는 자긍을 새삼 들여다봤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인지하려면 역시 촬영장에 드나들어야 하는 성격이더라고요.

작년 한 해 촬영장을 떠나 있는 동안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주짓수 블루 벨트를 땄어요! 2년 동안 계속 흰띠를 매고 있었거든요. 남자들, 벨트 색깔에 집착하잖아요. 태권도는 검은띠인데, 다시 흰띠를 매려니까 은근히 도전 정신이 생기더라고요. 어떻게든 유색 벨트를 따겠다는 단기 목표만 세웠는데, 이제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주짓수에서 유색 벨트는 실력 외에 성실함을 의미하기도 해요. 일을 쉬는 와중에도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몰라요.

스포츠와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고 하던데요. 주짓수의 어떤 점 때문에 심취하게 된 건가요? 과거엔 태권도처럼 타격이 주를 이루는 격투기를 주로 했어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겨루죠. 그런데 주짓수는 서로 엉겨 붙어서 상대방의 동작을 온몸으로 느껴야 해요. 매일 관원들끼리 돌아가면서 스파링을 하는데, 성격에 따라 스타일이 모두 달라요. 상호 반응을 통해 서로를 파악하고, 적절한 공격과 방어 루트를 세우면서 실력이 늘죠. 재미있게도 연기와 다르지 않더라고요. 어쨌든 사람끼리 부대껴가며 더 좋은 신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니까요.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 일반인들과 살을 맞대며 운동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우연치 않게 도장이 생기자마자 등록을 해서 어쩌다 보니 터줏대감이 되어 있더라고요. 시작부터 2년 반 정도를 함께한 거죠. 처음부터 사람이 바글바글했으면 못 견뎠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신규 관원을 맞이하는 입장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됐어요. 원래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는 환경에 놓이는 걸 굉장히 불편해했어요. 촬영장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인간 이준기로서는 갇혀서 살았던 거죠. 그런데 주짓수를 배우면서 그런 면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언제까지 할 생각이에요? 지금으로선 평생요. 블랙 벨트까지만 해도 보통 10년이 걸리거든요. 그 이후엔 또 다른 과정이 기다리고 있고요. 연기도 비슷해요. 제가 대중 앞에서 무엇을 언제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해요. 아직 제대로 보여준 게 없으니까, 벌써부터 끝을 정하진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