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이라는 판타지로만 쌓은 [청춘기록] | 지큐 코리아 (GQ Korea)

사랑과 우정이라는 판타지로만 쌓은 [청춘기록]

2020-09-28T17:50:23+00:00 |tv|

[사랑의 온도]와 [청춘기록]은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시간만 공평할 수 있냐.” tvN 드라마 [청춘기록]의 주인공인 연예인 사혜준(박보검)은 힘들다. 집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그릇된 선택지 앞에서 구부러지지 않고 옳다고 믿는 쪽을 선택하는 곧은 성품 때문에 너무나 힘들다. 그런 그에게 시간은 같은 한남동에 살면서 빈부격차와 성공과 실패의 격차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친구 원해요(변우석)와 동일하게 주어진다. 하루에 24시간, 1년 365일 즉 8650시간은 뱁새와 같은 그에게 황새를 따라갈만큼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런 현실 앞에서 사혜준을 ‘덕질’하던 안정하(박소담)가 사혜준과 친구가 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안정하도 사혜준처럼 8650시간을 바쁘고 힘들게 살면서, 역시나 쉽게 구부러지지 않는 의지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나가기에 힘든 청춘이다. 그런 안정하에게 거의 유일하게 힘이 되는 존재가 모니터와 스마트폰로 만나던 동갑내기 연예인 사혜준이라는 사실은 언뜻 보기에 상당히 매력적인 연결고리처럼 보인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것도 어시스턴트에 해당하는 안정하가 뛰어난 실력과 시원시원하고 곧은 성격으로 사혜준과 원해요 두 사람을 사로잡으면서 사혜준과 원해요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균열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스킨십이 자주 이루어지고 상생을 위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연예인과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러브 스토리를 통해 하명희 작가는 고된 청춘을 전투적으로 살아온 20대 중반의 세 청년을 예쁘고 아기자기한 사랑과 우정의 프레임 안으로 집어넣는다. 마치 이 현실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라는 듯이.

하명희 작가의 전작 [사랑의 온도]에서 급격히 사랑에 빠진 이현수(서현진)와 온정선(양세종)의 사랑이 응원을 받았던 까닭은 서로의 직업적 성취를 위해 상대를 배려하는 그들의 모습 덕분이었다.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의 상황들을 그려내면서도 이 드라마에 열광한 팬들이 많았던 이유다. 그러나 [청춘기록]은 다르다. 안정하와 사혜준은 20대 중반이라는 설정답게 스스로의 의견 피력에 충실하고, 직설적인 말도 서슴지 않는다.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금세 사과를 하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 또한 ‘요즘 세대’의 현실을 반영하려는 작가의 노력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 아기자기한 다툼 속에서 ‘요즘 세대’도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교묘하게 가려진다. 가사도우미인 어머니, 자격지심으로 가득한 아버지, 자기중심적인 형제에 비정한 연예기획사 대표와 숍의 직속 선배 디자이너까지, 그들이 넘어야 할 벽은 많고 배워야할 것들은 넘친다. 이런 상황에서 ‘덕질’하던 연예인과 선을 그으려고 노력하는 안정하의 모습이나 메이크업을 받으며 안정하를 힐긋거리는 원해요의 모습은 작가가 설정해놓은 판타지에 그친다.

[사랑의 온도]에서 6살이라는 나이 차 때문에 서로가 삶을 대하는 온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 온도가 비로소 맞춰지는 순간에 두 사람은 사랑을 지탱해갈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청춘기록]은 아직까지 비열하고 고된 현실을 예쁘고 고운 포장지로 싸서 시청자들 앞에 내놓고 눈속임에 가까운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루종일 공격받았어. 현실에”라는 사혜준의 대사는 안쓰럽지만 그 이상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잠깐만 눈을 감았다 뜨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사랑과 우정이 금세 그를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놓인 시청자는 이 드라마에서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판타지에 속아도 좋으니 고운 외피를 보고 웃음을 지을지, 시도때도 없이 쏘아대는 가족과 직장 상사의 잔소리에 인상을 쓸지. 물론, 이 혼란스런 상황 자체가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청춘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혼란스런 현실을 보여주기에 16부작 드라마에 주어진 시간이 약 16시간 뿐이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