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바뀔 때마다 세월은 나이를 먹는다는 애절함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의미로 육박해온다(그건 나의 뺏길 수 없는 지혜지만, 조금 지루해졌군…). 전기화로가 오렌지빛으로 타 들어가는 크리스마스 저녁의 온기와 연말 정산의 북적거림은 다 어디 갔을까. 결국 시간은 우릴 따라 잡고 일생은 지구에 귀속되겠지만, 시간과 접전을 벌이고서라도 최대치의 용량으로 살고 싶은, 오그라든 태아 같은 유한함만 각성할 뿐이다. 이제 시간에 대한 관념은 시의 영역으로부터 10만 리나 벗어났다. 시간은 상대적이며, 가변적이고, 차등적이면서, 수학적이거나, 공식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날개 돋친 전차’라는 3백 년 전 서양 노시인의 은유는 서기 2007년이란 말 자체만큼이나 공상적이다.
정말이지 2007년이란, 근원적인 시간과는 상관이 없다. 다수의 편리를 위한 인공적 고안일 뿐인걸. 철학자들은 시간을 정의하기 힘들다면서도 그건 어쨌든 하나의 환상일 뿐이라고만 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천지창조(17세기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의 말로는 기원전 4004년) 때부터 시간이 생겼으되, 심판의 날이나 계시록에 예언된 기사와 창부와 기이한 창조물이 출몰하는 날 시간은 끝나리라고 맹신한다(그러나, 그렇다면 내세는 분명 또 다른 시간이 아닌가). 천문학자와 수학자, 물리학자들도 시간의 관념에 대해 대충 논하지만, 우리보다 나을 것도 없다. 삶이 흐르는 동안 시간은 멈춰있는 걸까. 미래는 언제 과거가 되는 걸까. 우리가 겪는 이 시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시간이 존재했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시간과 공간이 4차원적 연속체를 이룬다는 아인슈타인의 발표는 대체 무슨 소리일까. 언젠가는 그의 가설도 어셔 대주교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게 밝혀지게 될까. 시간의 구성 요소는 요즘 의학으론 80년쯤 추정되는 인생이다.결국 개인적이자 내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건 시간의 폐기와 같다. 날개 돋친 전차가 누군가의 무덤 옆을 질주할 때도 죽은 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시간에 의해 운행되는 것이다. 땅에 묻힌 후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손목시계를 볼 수도 없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시간은 죽은 이들에겐 망각과 같다. 누군가 시간은 ‘광막한 영원의 사막’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건 위로를 위한 전희의 일부인 것이다. 신학자들은 그걸 천국이나 열반으로 일컫겠지(그들은 단순한 부류들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은 다음의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배당된 시간일 뿐이다. 대략 80여 회의 공전이 의미하는 건, 시간이 옛날 뉴스 필름처럼 계속 돌아가는 어떤 거대한 단일체의 일부가 아니라, 수천억 가지의 서로 다른 추상적 실체라는 것이다. 그 각각은 존 재의 표면을 가로질러 기어다니다 곧 불에 던져진 한 가닥 실처럼 오그라든다. 이 실체들은 항상 평행으로 혹은 동시에 기어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아이작 뉴튼은 아닌 것 같지만), 시간에 일정한 것이라곤 없다. 시간의 가치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 데 있다. 이론적으론 모든 해의 길이가 똑같지만, 한 시간의 처음 30분은 나중 30분보다 두 배나 길다. 애타게 지나가 버리는 해변에서의 하루를 광산노동자의 하루와 비교할 수 없다. 어린 날의 열두 달을 팔순의 1년에 비교하다간 10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시간이 더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 끝을 향하는 게 대수롭지 않아지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잠깐, 내가, 지금, 그 하고많은 발랄한 말들 다 놔두고, 1월부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요? 나원 참…. 때로 나의 어떤 말도 내 목소리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참 문제라니까요. 내 자신도 모르는 장광설들을 뿌려대고 나면 내가 한심해서 다른 사람 목소리도 딱 싫어지거든요. 하지만, 이런 횡설수설 배회하는 사색이야말로 평생 데드라인을 의식하면서, 단단히 죄어진 채 매순간 욕구를 점검하며 살았던 한 남자의 1월의 언어란 걸 알아줬음 좋겠어요. 도처에 널린 비유법의 신호들로만 빈칸을 메우기 위한 거라고 해도요. 나는 냉담과 과묵을 더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건 이탈이라기보단 관심이고, 자기 선언이라기보단 자기 보호라고 변명하겠어요. 그러니, 당신은 나무를 씹는 듯한 이런 자조를 설교라 여겨 굳이 질색하진 마셔요. 1월엔 비난이 싫으니까요.
- 에디터
- 이충걸(GQ KOREA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