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아내에게 다짜고자 전화를 걸어 장난을 치는 남자, 주민들이 놀고 있는 노래방을 습격하는 남자, 뉴욕 킥볼 경기장에 난입해 경기를 이끄는 남자. 빌 머레이는 살아 있다.
만약 뉴욕시 한적한 공원에서 킥볼 게임을 하게 됐다면, 그리고 이닝 중간에 노숙자 같아 보이는 남자가 와서 대타를 서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쫓아내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그 남자가 빌 머레이일 수도 있으니까. 지난 가을, 춥지만 상쾌했던 어느 날, 뉴욕 루스벨트 아일랜드에서 킥볼을 하던 20대들이 빌 머레이를 목격하는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냥 다른 팀 선수 아버진가 보다, 생각했어요.” 예측 불가한 사건을 다루는 웹사이트 billmurraystory.com에 어느 선수가 올린 글이다. “그 아저씨는 공을 차더니 1루로 꽤 빨리 달렸어요. 2루까지 가려고 했지만 우리 팀 선수가 1루로 다시 돌려보냈죠. 그 순간, 우리 팀 전부가 그를 알아봤어요. 빌 머레이! 빌 머레이가 우리와 킥볼을 하고 있어!” 머레이는 경기장의 모든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옆에 선 한 선수의 어머니를 끌어안고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단체 사진 포즈도 취해주었는데, 이 사진은 곧 인터넷에 깔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가 인터뷰를 위해 맨해튼의 한 호텔 스위트룸 소파에 앉았다. 킥볼 경기할 때 입은 파란 반바지와 헐렁한 플라넬 셔츠를 입은 채였다. (그날 킥볼 경기를 마치고 인터뷰를 하러 왔다는 건 나중에 인터넷을 보고 알았다.) 그는 시카고에 있다가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를 추억했다. “1974년에 여기로 왔는데, 모든 게 다 엉망이었던 때죠. 지하철은 겨울에는 미칠 것 같이 추웠고, 여름에는 미칠 것 같이 더웠어요.”
그가 이 도시에 사는 기쁨 중 하나는 빌 머레이로 사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말발’ 하나로 무슨 일이든 처리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걸 경험할 수 있을까? 방법은 누군가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거예요. 일단 눈을 맞추죠. 한번은 제 동생하고 지하철에서 열린 ‘타미’ 시사회 파티에 숨어 들어간 적이 있어요. 몇 년이었더라, 그게 1975년인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을 알았거든요. 그땐 지하철에서 파티를 했다니까요! ” 무명이던, 기록에 남기 전의 머레이를 상상해보면 왠지 아름답다. “그때 머레이는 좀 무서웠죠.” 머레이가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 출연하던 시절, 그를 처음 소개 받았던 프로듀서 미치 글레이저가 말한다. “전 당시 그를 잘 몰랐어요. 엄청나게 웃겼지만, 분노 역시 지금보다 더 강했던 것 같아요.”
미치 글레이저와 머레이는 <스크루지드>를 작업하며 가까워졌다. 글레이저가 1988년에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의 수석 작가인 마이클 오도노휴와 함께 <크리스마스 캐롤>을 고쳐 쓴 작품이다. 머레이가 공식 매니저를 두지 않아서 고생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그레이저다. 여러 해 동안 머레이는 음성 사서함을 이용해왔다. 그와 함께 일하고 싶은 이들이 전화해서 애걸하며 메시지를 남기는 곳이다. 머레이의 손에 대본이 들어가게 하고 싶으면 글레이저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것도 업계의 규칙이었다. 글레이저는 머레이를 ‘머리케인’이라고 부른다.
글레이저는 머레이가 자신과 오도노휴를 ‘란초 라 푸에르타’에 끌고 갔던 옛 일화를 떠올렸다. 바하 캘리포니아에 있는, 세련된 스파다. “온통 베벌리 힐스 주부들이 가득한 가운데, 남자라곤 우리 셋뿐이었어요.” 마지막 날, 한 중년 여자 손님이 머레이에게 다가와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알았어요. 대신 사인 해드리고 난 다음에는 제가 당신을 수영장에 집어던질 겁니다.” 여자는 웃으며 사인을 받았다. 자신의 말에 충실한 머레이는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들고 약속대로 수영장 속으로 집어던졌다. “빌의 계약이란 이런 거예요. 늘 그런 식이었어요. 처음부터요. 그는 언제나 순수했어요.”
이것이 전설 속의 빌 머레이다. 펑크적이고, 자신만만하고, 퍽과 팬부터 브러 래빗과 그루초 막스까지로 이어지는 계보의 현대적 재현. 그의 신작 영화 <하이드 파크 온 허드슨>에서 그가 맡은 대통령 역과 그를 이어주는 가장 분명한 연결고리가 이것이다. 처음엔 누구나 머레이와 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가 연기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큰 무대(능숙하게 미국을 2차 대전 참전으로 몰아간다)와 작은 무대(자신의 하이드 파크 집에서 그를 흠모하는 정부들로 이루어진 하렘을 만든다)에서 사람들을 속이며 위태위태한 행보를 이어간다. 어젯밤 머레이는 뉴욕 필름 페스티벌의 시사회가 끝나고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차분한 예술 영화 관객들에게 32대 대통령 루스벨트는 “배짱이 두둑했다”고 말했다.
이날 <하이드 파크 온 허드슨>의 홍보 담당자는 영화를 취재하려는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머레이를 이 스위트룸에 몰아넣었다. 머레이가 이런 할리우드식 전통적 홍보 시스템에 대해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상을 탈 거라고 하는데, 나로선 그 길은 유리조각과 가시 철조망으로 뒤덮인 길이에요.” 머레이가 활동해온 기간 중 대부분 이런 복잡한 일들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2003년에, 그의 걸작이자 그의 경력을 재규정한 작품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나왔다. 그는 그해 거의 모든 상을 휩쓸었지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숀 펜에게 뺏겼다. 그건 아직도 그에게 혼란스럽고 언짢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하이드 파크 온 허드슨>에서의 연기가 오스카상 수상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기억 속에 그 일이 되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땐 상이 잔뜩 들어오기에 으레 다 받겠거니 생각했죠. 정말로 죄다 수상하고 있었으니까요. 실망했던 건 아니지만, 그냥 놀랐어요. 그리고 6개월 후 내 안에서 진짜 마음을 발견했어요. ‘나 정말 그 상 받고 싶었구나!’ 근데 동시에 오스카상이 중요한 거라고 믿게 되었다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했어요. 그 이후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그때 내가 상을 받지 못한 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거죠. 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아, 이런 영화로는 오스카상을 받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5년 동안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러니 상을 받았다면, 내 안에서 발견한 그 마음을 나도 모르는 동안에 키웠을 거예요. 정말 기형으로 자라났겠죠.”
갑자기 묵직한 노크 소리가 났다. 머레이는 자신을 재촉해 이런 저런 행사에 끌고 가려는 홍보 담당자를 상대하는 온갖 전략을 가지고 있다. 홍보의 마지막 스케줄은 BFI 런던 필름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는 것이었다. “저, 빌, 우리 이제 가야 돼요.” 그녀가 말한다. “아, 무슨 이야긴지 알겠어요.” “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먹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아이스크림.” 불쌍한 홍보 담당자는 머레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아이스크림이 정말 먹고 싶은데.” “알아볼게요.” 홍보 담당자는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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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그래퍼
- PEGGY SIROTA
- 기타
- 글/ 브렛 마틴(Brett Mar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