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이준익은 은퇴를 번복하고 <소원>을 찍었다. 최근엔 스쿠터를 타다 죽을뻔 했다. 그는 재미만 있으면 영화든 바이크든 포기하지 않는다.
손이 많이 까졌다.
지난주에 넘어졌다. 스쿠터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내려오던 중내 쪽 차선 차를 피하다가 다쳤다. 진짜 헬멧 안 썼으면 저세상 사람 됐을 거다. 일어나서 팔 몇 번 움직여보고 괜찮기에 가려는데 그쪽에서 미안했는지 10만원을 주려고 하기에 사양하고 집에 왔다. 병원갔더니 팔에 깁스해야 한다고 했는데 귀찮다.
스쿠터는 어떤 걸 타나?
BMW 바이크도 가지고 있지 않나? 스쿠터는 혼다 PCX125 타고 BMW 바이크는 그중에서 저렴한 편인 GS800을 탄다. <황산벌> 때 50cc 줌머로 시작했다. <왕의 남자>를 찍기 일주일 전에는 비 오는 날 커브 돌다가 자빠져서 6개월 동안 못 움직일 정도로 다쳤는데, 그 상태에서 영화를 찍었다. 혼다 포르자로 바꾸고, 좀 있다가 가와사키 에스트렐라로 갈아탔다. 그러다 할리데이비슨을 탈까, BMW를 탈까 하다가 BMW로 왔다. 한데, 시내에서 타기에는 좀 커서 스쿠터인 PCX125도 샀다.
PCX125는 꽤 실용적인 선택 같다.
퀵 기사들이 많이 타서 좋다. 바이크 타는 게 직업인 사람들과 같은 기종을 타는 건 인정받는 느낌이다. 어떤 사람은 이 스쿠터를 도시의 말이라고 하는데, 그 말도 마음에 든다. 스쿠터는 굉장히 자유롭고 싸다. 리터당 50킬로미터 간다. 세금 얼마 안 내고, 주차비도 안 내고, 왜 다들 스쿠터를 안 타는지 모르겠다.
위험하니까.
위험하긴 한데…. 사실 삶이 좀 위험해야 활력이 있다. 조심스럽게 안전하게 평생 산다는 거 재미없지 않나?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재미있어야 한다. 유희 본능이 있으니까. 살아 있는 순간, 활력으로 나아가야지. 일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역시 바이크!
차는 어떤가?
난 차도 좋아한다. 포르쉐 박스터 좋아해서 타다가, 영암에서 서킷도 돌았다. 근데 고속도로에서 하도 과속 카메라에 찍혀서 팔았다. 박스터는 진짜 좋다. 미들십 엔진이라 코너링이 끝내준다. BMW Z4도 잠깐 탔다. 직선도로에선 최고다. 하지만 앞이 길고 뒤가 짧으니까 코너링은 불안하다. 코너링은 역시 박스터다.
새로 나온 박스터는 관심 없나?
그건 비싸지 않나? 비싼 건 안 좋아한다. 나는 항상 중고로 사서 다시 판다. 지금은 미쓰비시 파제로 숏보디 탄다. 근데 이제 바이크로 넘어와서 차는 매력이 별로 없다. 나중에 돈 벌면 고민은 하겠지만.
구형 박스터나 BMW 바이크는 비싸지 않나?
싸진 않다. 하지만 인류가 만들어놓은 멋진 아이템을 자신의 경제적인 여건 안에서 즐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박스터는 중고로 2천7백만원주고 샀는데, 그 가격이면 쏘나타 새 차 가격이다. 파제로도 1천만원 줬으니 합해도 그랜저 한 대 가격이다. 몇 년 동안 즐기고 박스터는 1천7백만원에 다시 팔았으니, 한 1천만원 썼다. 중산층 경제 안에서 세계 최고 퀄리티의 메커니즘을 즐기는 건 부끄럽지 않은 취미생활 아닌가? 의도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온 요소요소를 한 번씩 체험해서 배우는 것도 많다. 내 안의 잠재력을 찾아 도달할 수 있고,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그리고 성향 자체가 화려한 걸 안 좋아한다. 빈민의 자식이니까.
‘화려하지 않다’는 건 그동안 당신의 영화를 꿰는 특징 같다. 하지만 그런 투박한 시선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처럼 사회적인 메시지로 향할 땐 주인공에게 좀 과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영화를 찍어도 내가 지닌 인간관에 대한 고백일 수밖에 없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사회를 완벽하게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이몽학도 내 마음이고 반대로 샛길에서 일본에 대항만 하고 계급은 그대로 두자는 황정학도 내 마음이다. 모든 사람의 이면은 분열적이다. 어떤 인물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에 따라 태도가 달랐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바리케이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중요하듯이 인간의 정치적 이념은 상황과 입장에 따라 정해진다.
영화 안에선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몽학이 주장하는 ‘대동 세상’이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우리가 민주주의를 아무리 외치지만, 언제 한번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이상적 이념은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인간도 동물의 한 종류이고, 동물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이라는 법칙은 인간이 만든 헌법을 넘어서는 문제다.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가치를 의식적으로 추구하지만, 현실에선 강자가 약자를 약탈해야만 문명이 진화한다. 이 딜레마가 영화를 찍는 내내 굉장히 괴롭혔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염세적인 영화였다.
<더 테러 라이브>를 봤나? 영화 속 모든 인물이 철저히 개인적인 욕구와 감정 때문에 선택한다.
그 영화도 굉장히 염세적이다. 사실 대의는 명분이다. 인간은 생존 욕망이 있다. 명분은 사리사욕을 덮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들은 아닐 수도 있겠다.
그 동안 찍은 영화들이 대부분 따뜻하지 않나?
냉소주의가 좀 깊어지면 염세주의가 되는데, 어쨌든 냉소주의보다는 온정주의 쪽이 더 강하다. 그럼에도 그 끝은 역시 염세다. 종점은 같으나 과정이 다르달까? 그래서 내 영화 속에선 악인이든 선인이든 구분이 없고 그저 입장 차이만 존재한다. 다른 입장의 사람도 자세하게 보면 따뜻하게 봐줄 구석이 있다는 내용.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을 온정주의로 보고 싶다. 그러니 촌스러울 수밖에.
필모그래피 중에서 특히 따뜻하고 만듦새가 투박한 <라디오 스타>나 <즐거운 인생>이 많은 동의를 얻었다.
난 멋있어 보이는 게 별로 멋이 없다. 남들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개 폼 잡는 것 같아 똑바로 쳐다보기가 미안하다. 그런 걸 보면 눈을 감게 된다.
미학에는 관심이 전혀 없나? 대학에선 그림을 전공했다.
시각적인 현혹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사용된다. 나는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거나 즐겁게 만드는 것보다는 마음을 흔들거나 마음을 덥히는 쪽에 더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쪽으로 이동하게 돼 있다. 멋스러운 영화는 그 순간에 눈을 현혹하지만, 그 영화를 5년 후에 TV에서 보면 촌스럽게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눈이 고급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내 경우 아예 그런 미학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황산벌>이 5년 후, 10년 후에 봐도 언제나 똑같다. 어차피 촌스러우니까 편차가 없다.
미학적인 성취는 어떤 감독에겐 목표다.
그들과 입장이 다르진 않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 큐브릭이고, 박찬욱 감독 김지운 감독도 좋아한다. 하지만 영화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인 하우How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부정확하다. 오히려 무엇을 얘기하느냐 즉, 왓What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영화에 대한 평가 기준이 장도리 하나로 액션을 잘 찍었는지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영화를 즐기는 지점이 되겠지만, 영화의 퀄리티를 판단하는 기준은 뭘 말했느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감독의 정체성을 구분해줄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다. 평론이나 언론이 영화를 바라볼 때 항상 어떻게 표현했는지만 말하니 독자나 관객들도 계속 그쪽으로 관심이 더 증식되는 것 같다. 표현의 문제는 개인의 스타일 문제니까 사회나 집단이 지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고 그에 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구분해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런 기준이라면, <키드캅>을 좋은 영화로 꼽겠다. 당시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꽤 컸던 학원 액션에 대한 욕구를 채워줬다.
<키드캅>이라는 영화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와 함께 볼 한국영화가 없다는 데서 출발했다. 전부 디즈니 영화였다. 애들이 서울극장에서 나갈 때 영어 쓰는 노란 머리 주인공을 기억에 둔다는 건 참 불행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에서 한국 아이가 어드벤처를 경험하는 건 우리 애들한테 좋은 선물이 되겠구나 싶었다. 어쨌든 흥행하진 못했다. 그래서 감독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반성하고 인정했다. 그때 첫 번째 은퇴를 했다. 그러곤 10년 동안 감독 안 했다. 제작만 하고.
그럼에도 결국 영화감독으로 돌아왔다.
영화감독은 일단 재미있다. 난 재미있는 일을 위해선 몸을 던지는 사람이다. 배우나 스태프가 의견을 조율하고 다투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도 있고 일련의 과정들이 짜릿짜릿하다. 그래서 감독으로서 큰 욕망이 없다.
뭔가 뭘 말하고 싶은 욕망은?
당연히 그런 욕망이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건 꼭 영화감독이 아니어도 된다. 소설 쓰면 되고 시 쓰면 되고 글 쓰면 된다. 아니면 말로 하면 되고. 남의 돈 수십억씩 가져다 영화 찍으면서 우길 필요 없다. 촬영 현장이 지닌 힘 때문에 영화를 포기 못한다. 살아 있는 동안 동시대 사람들과 서로 교감한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그러니까 망하든 흥하든 계속한다. 포커를 쳐서 돈을 잃어도 계속하는 것과 같다.
이번에 찍은 <소원>은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영화다. 아동 성폭행이라는 무겁고 예민한 소재다. 시사회가 한참 남아 대신 시나리오를 읽었다. 중간도 못 가 덮었다.
다들 그런다.
덮었다가 마지막 부분부터 다시 읽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동안 찍은 영화 중에 가장 무거운 영화 같다.
시나리오만 봐서 그렇다. 영화를 보면 기분이 불쾌하거나 괴롭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해질 것이다. 더 큰 시련이 와도 난 견딜 수 있어, 그런 느낌이다. 목표가 그거다. 그 목표에 도달한 것 같다.
혹시 피의자에 대한 용서로 비춰질까 걱정된다.
아니다. 시나리오에선 용서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데, 실제 영화에선 절대 그런 감정이 아니다. 용서는 당연히 할 수 없다. 이런 부분 때문에 홍보하는 분들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엔 인터뷰를 하지 말자고 했다.
오해를 살까 봐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영화가 지닌 무게가 워낙 무거우니까.
그러니까 다들 시나리오를 읽다가 덮는다. 영화를 실제로 보면 전혀 다르게 생각할 텐데 아쉽다. 아동 성폭행이 지닌 선정성, 사람들이 그런 쪽으로 생각할까 봐 다들 걱정을 많이 한다. 또 인터뷰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나는 좀 내키는 대로 말하는 편이니.
결국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일까?
그렇다. 살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나쁜 기억과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스스로 지우거나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그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가족 관계, 학교생활, 사회생활에서도 누군가와 부딪칠 수 있다. 아동 성폭행, 그것도 자신의 딸…. 이 상처를 받은 상태에서 어떻게 피할 수 있나? 못 피할 때는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걸 극복하는 것만이 2차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너무 끔찍해서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외면한다면, 2차 피해는 물론이고, 또 다른 3차 피해까지 발생해 악순환이 계속 증식된다. 너무 큰 상처를 만났을 땐 오히려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치유해내야 한다. 이 영화가 그런 영화다. 피할 수 없다면 끌어안아버리자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 기존의 아동 성폭행을 다뤘던 영화들이 범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 응징과 고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럼 피해자는…. 피해자의 사연은…. 피해자의 존재는 없어지는 건가? 아니면 에필로그의 표정 하나로 끝내야 되는 건가? 그건 굉장히 무책임하다. 그래서 피해자 가족을 가까이 들여다봄으로써, 만약 영화가 사회적 담론을 제시하는 기능이 있다면,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예비 가해자들을 막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비정상적으로 뒤틀어진 욕망의 결과가 저렇게까지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 안에는 온정주의가….
너무 따뜻해서 탈이다. 소통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영화를 찍을 때도 온정주의가 넘치나? 자신의 의견을 스태프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편인가?
한 인간이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봤자 평생에 몇 번 읽겠나? 한 사람의 인생 경험은 따지고 보면 알량한 거다. 영화는 극장을 통해 수백만 혹은 TV로 보게 되면 몇천만 명이 본다. 서로 공감을 하려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소통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공자님 말씀처럼 생각해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해라.”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혼자 고민하고 있을 필요 있나?
이재용 감독의 영화 <뒷담화>에 출연한 임필성 감독이 이런 얘길 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감독하지, 자기 마음대로 못하면 뭐 하러 감독해.”
난 내 마음을 못 믿는다. 내 머리도 잘 안 믿는다. 거의 하는 말의 반은 실수고, 하는 생각의 반은 다 삑사리다.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권위적인 환경이 아니어서 그런 걸까?
맞다. 영화감독 시작부터 연출부 생활도 안 했고, 조감독도 안 해봤다. 영화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나한테 영화는 별거 아니다. 예를 들어서 나의 직업과 꿈이 영화감독이면 달랐겠지. 어디에 목표를 두면 그 목표에 대한 가치를 굉장히 부풀리게 된다. 필요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한다. 그러면 자신의 과도한 감각을 그 안에다 심으려고 한다. 난 그게 병인 것 같다. 영화감독이 뭐 별건가? 같이 모여서 영화 찍는데,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합의시키는 게 감독이지. 시나리오는 시나리오 작가가 쓰고, 촬영은 촬영감독이 하고, 연기는 배우가 하고, 조명은 조명기사가 하고, 편집은 편집기사가 하는데. 감독이 뭘 하겠나?
감독은 수많은 결정을 한다.
그 결정을 백지에서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게 좋다, 저게 좋다고 선택만 하면 된다. 평생 사지선다 찍는 시험을 쳤는데 그것도 못 하겠나? 먹어보고 이게 더 맛있네, 연기는 이게 더 좋네. 이게 더 멋있네 하고 결정하면 된다.
그럼에도 감독이 지녀야 할 능력이 있다면, 뭘까?
가장 중요한 건 의사소통 능력이다. 아무리 내가 보석 같은 거를 갖고 있다 해도 상대방한테 보여줄 수가 없으면, 그걸 말로 설명해야 하지 않나? 그럼 보석을 정말 상대방이 보석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의사소통 능력만 있으면 감독만 할까? 대통령도 할 수 있다.
갑자기 술 마시고 싶다. 술 자주 마시나?
요즘엔 많이 안 마신다. 술맛도 없다.
술 마시는 게 재미없나?
그동안 1990년대, 2000년대까지는 단체로 술 먹고 회식하고 밤마다 끼리끼리 모여서 술 먹고 이런 문화였다. 피로가 쌓인 것 같다. 노래방 가고, 술 먹으면서 말도 안되는 토론하면서 개인의 외로움을 소속감으로 채워왔다. 이제는 그 소속이 구속 같다. 점점 개인주의가 된 것 같다. 술의 취향도 와인이니 싱글 몰트니 하며 세세하게 나뉘었다. 그리고 50대 중반이 되면서 밤만 되면 자고 싶다. 만사 귀찮다. 정말 귀찮다.
사람들 만나는 게 지겨워진 거 아닌가?
바로 그거다. 너무 지겹다. 내 인생에서 만나야 될 사람은 이미 다 만난 것 같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되새기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사람을 소비하는 것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조용히 살고 싶다. 그러다 소외되면 사람이 너무 그립겠지? 사람이 참 간사하다.
지금 말한 것들이 굉장히 분열적이다. 약육강식을 이야기하면서 온정주의를 말하고 사람이 좋아서 영화를 하지만 사람이 지겹고.
내가 정말 분열적이다. 결국 어떤 세계관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본질은 그의 말과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선택과 행동에 있다. 말은 굉장히 도덕적으로 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굉장히 부도덕한 사람을 많이 보고 있지 않나? 내가 하는 말이라는 것도 그때그때 갖다 붙이기일 뿐이다. 사실 말이란 건 정말 가치가 없다. 내가 말대로 생각하나? 행동하나? 이렇게 질문하면,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다. 내 인생에서 내가 선택하고, 행동했던 과정들만이 내 인생을 말해줄 뿐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과 생각은 내 본질이 아니다.
당신의 본질은 지키려는 것과 깨부수는 것 증 어느 쪽에 가깝나?
난 내면의 보수성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근데 또 내가 선택하는 것들을 보면, 굉장히 진보적이다. 보수와 진보가 구분돼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음과 양이 하나인 것처럼 함께 존재한다. 나는 모든 진보들에게도 보수의 씨앗이 자리 잡고 있고, 모든 보수에게도 진보의 씨앗이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지금 각자 서 있는 위치가 바리케이드 안이냐, 밖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를 찍고, 성공하는 것이 바리케이트의 기준이 될까?
영화의 성공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바리케이트 안인가 밖인가?
바리케이드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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