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를 넘기며, 언젠가 한 번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만화 속 그 여자 때문에.
박은하 1996년 한국은 OECD 가입으로 떠들썩했다. 선진국은 소주에 콜라를 섞어 마셨다. 맹하는 취해서 속옷까지 ‘훌렁’ 벗을 뻔했다. 구영탄의 영원한 연인 박은하는 <미스 맹하><miss맹하>에서 ‘맹하’다. “(왜 맹하인지) 모르겠어요”라는데, 맹하를 아는 사람은 안다. 커피를 사오라면 설탕을 사오고, 뜻밖의 순간에 혼자만 웃는다. 고행석은 늘 천재로 등장했던 구영탄을, 손대면 망하는 출판사 사장으로 만드는 대신 박은하를 천재로 만들지 않았다. ‘백치’라는, 사랑하기보다 건드리고 싶은 존재에 안달 난 남자들을 보여주면서 당신은 어떤지 물었다. 구영탄처럼 “안돼!”라고 할는지. “세련되진 않았으나 순수함이 있으며 발전이 기대된다.” 맹하의 조언에 따라 해피엔딩으로 바꿔서 투고한 구영탄의 소설 심사평이다. 한국은 OECD 가입 이후 눈부시게 발전했고, OECD 가입 국가 중 자살률 1위다. 이제 고행석이 그리는 구영탄은 졸린 눈이 아닌 “신경과민”의 눈을 하고 있다. 정우영
핑크 핑크의 머리색은 만화책에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피피핑-‘ 소리를 내며 공주로 변신할 때, 그 머리가 핑크색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머리를 한 작은 핑크는 해변에선 머리에 반다나를 두르고, 흰 양말은 늘 곱게 접어 신는 요조 숙녀다.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음악책의 음표를 털어 콩나물국을 끓일 줄도 안다. 오똑한 코도 없고 다리에 굴곡도 없지만, 두 무릎을 안은 채 동그랗게 앉아 있으면 어쩔수 없이 마음이 두근거리고 만다. 김동화는 어른으로 변한 핑크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출렁이는 머리칼을 세필로 그려낸다. “잘 그린 컷을 골라 실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찰랑이는 치맛자락부터 하트 모양으로 구부러진 더듬이까지, 작가가 신경 쓰지 않은 컷은 하나도 없었다. 불쑥 지도에도 없는 나라로 떠나버릴 것처럼 아련한, 언젠가 숙녀로 변신할 것처럼 신비한, 행여 깨질까 괜히 두려워지는 환상 속의 여자는 쉽게 탄생하는 게 아니니까. 손기은
나애리 나애리는 나쁜 계집애가 아니다. 터무니없는 계략을 꾸미거나 하니에게 대놓고 화를 내지도 않는다. 꼬마티를 못 벗은 하니를 오히려 귀여워하는 쪽이다. 진달래여중 2학년 나애리는 뭘 좀 아는 언니, 칼같이 끝단을 맞춘 단발머리의 차가운 여자, 게임에 져도 쿨하게 떨칠 줄 아는 선수에 가깝다. 나애리가 이름도 사연도 나이도 모르는 하니에게 처음으로 1등을 뺏긴 날, 그녀가 지은 표정은 이렇다. 도끼눈을 뜨지도 않고 억울함에 복장을 치지도 않는다. 쇄골이 드러나도록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저 눈을 좀 크게 뜰 뿐…. 남자라면 하니보단 나애리다. 이진주 작가가 처음 이 만화를 구상할 당시 주인공이 나애리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쩐 일로 하니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긴 나애리는, TV용 만화영화에선 좀 표독스러워졌고 목소리도 우리가 기억하는 그 앙칼진 톤으로 변했다. 지금이라면 나애리 목소리로 누가 어울릴까? 글쎄…. 한고은? 박시연? 손기은
셰어 두 종류의 셰어가 있다. 하나는 건이 엄마이자 MX-16호의 아내이며, 다른 하나는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아도 켤 수 없다. “기계에게 자유는 없다.” 셰어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똑같은 기억과 모습을 가진 사이보그로 재탄생하지만, 인간인 MX-16호에게 아내로 인정받지 못한다. <기계전사 109>는 두 종류의 셰어로 대표되는, 기계와 인간의 대결 같은데 실은 인간이 차라리 인간이라는 종을 거부하는 과정이다. 경매에 팔려 넘어간 셰어는 옷을 벗으라는 관리자의 명령에 넋을 놓는다. “저는 여자인데….” 어렸을 땐 이 장면에서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이 사이보그임을 인정한 후, 거리낌없이 옷을 벗는 모습이 훨씬 섹시하단 걸 몰랐다. 8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 인간만 한 “건방진 사치품”은 없단 걸 알았다. 정우영
이름 모름 80년대, 그러니까 ‘호스티스’라는 말이 유난히도 빨간 글씨로 주간지 표지를 장식하던 때야말로 한희작 만화 속 여자들의 전성기였다. 굽실굽실 웨이브진 머리, 버선코보다 더 뾰족한 코, 옷을 벗으면 생각보다 클 것 같은 가슴, 그리고 술집과 술병과 술잔. 한희작 만화 속 여자들은 언제나 술을 마셨다. 남자들이 먹일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이 정도쯤이야 하는 투로 술잔을 비웠다. 그러다 보면 뭔가 일이 벌어진다는 걸 그녀들도 알고 있었다. 쾌락이든 후회든 그건 나중 일. 우선 마시고 본다. 컬러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때였다. 86이니 88이니 하는 말들이 꿈처럼 횡행했다. 어쩌면 지금 강남대로보다 더 화려했을 영동의 밤거리, 주현미 노래에 있듯이 “오색등 네온불이 속삭이듯 나를 유혹하는 밤” 여자들은 술집에 있었고,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았다. 그러다 일기에 쓰듯이 “우린 술을 마셨지. 어느새 나는 그만 취해버렸어” 야릇한 과거형 시제로 중얼거렸다. 어쩐 일인지 자꾸 <유나의 거리>에 나오는 미선(서유정)이 떠오른다. 장우철
유로미 영화 <비트>가 개봉된 1997년, 원작 만화 <비트>의 연재가 끝났다. 영화에서 고소영이 연기한 로미는 ‘오렌지족’이지만, 만화의 로미는 ‘아티스트’에 가깝다. 어린 로미는 피아노 개인교사에게 백남준의 아방가르드 기법으로 피아노 치는 법을 보여주겠다며 야구 배트로 피아노를 내려친다. 다 큰 로미는 민을 “산 채로 떨어지는 푸른 나무의 이파리”라고 표현하고, 배설의 쾌감이 뇌신경을 자극해 기분이 좋다며 변기에 걸터앉아 영어단어를 외운다. 대학교에 가선 어설픈 사과 대신 <아비정전>의 맘보 춤으로 갚는다. 그러니까 로미는 멋있다. 할 말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살고 있는 감정에 충실하다. “남자는 여러 층으로 된 방을 지녔지만 여자는 단 하나의 방밖에 없다”며 자신을 ‘장기임대’할 민을 찾아 나설 때까지 언제나. 로미는 핸들을 이리저리 틀어도, 속도는 항상 ‘풀악셀’이다. 하필, 지금 로미 같은 여자가 귀하다 느낀다. 양승철
- 에디터
- GQ 피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