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40대 남자의 ‘빅 픽처’에 관하여.
40대 한국 남자를 다른 연령대, 특히 30대 이하가 질색하는 이유는 여럿이다. 예를 들어 강호동, 박진영, 유재석 등의 ‘캐릭터’는 그들의 인기나 영향력과 별개로 40대 한국 남자의 문제들을 골고루 체현하고 있다. 서열 폭력을 감추지 않아 노골적으로 유해한 형님 강호동, 주위를 가볍게 들러리로 만드는 남성적 자기애의 화신 박진영, 좋은 분위기를 살린다고 작은 변화마저 무화시키는 근면 보수 유재석.
어쩌면 많은 40대 남자의 세대적 자부심의 모델일지도 모를 이들은 아랫세대에게는 혹시 닮을까 두려운 경계 대상이다. 그 캐릭터에 대한 비판은 세대를 잇는 ‘한남’ 연속체 사회인 이곳의 ‘알탕’ 문화가 유지되는 한 계속될 터라, 여기서는 다른 위험한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김어준은 한국 사회를 미세 먼지처럼 뿌옇게 덮은 ‘신세대 음모론’의 대표 선수다. 음모론이란 말은 딱지붙이기도 낙인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구멍 난 인식을 갖고 있고, 그럼에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 인식과 믿음 사이의 근거 부족이라는 간극을 음모론은 그럴듯한 이야기로 깔끔하게 메워준다. 이렇게 음모론은 이미 세계 관찰과 해석의 편리한 방법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음모론이 거짓인 것도 유해한 것도 아니다. 어떤 음모론은 결국엔 사실로 판명되고, 일부 음모론은 감춰진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음모론은 강자의 억압 도구가 되기도 하고, 약자의 저항 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니 김어준이라는 캐릭터를 신세대 음모론의 원천 기술자로 부르는 게 크게 부당 한 일은 아니다.
신세대 음모론은 구세대 음모론과 어떻게 다른가. 거칠게 말하면, 신세대 음모론은 시대에 맞게 구색을 갖출 줄 안다. 구세대 음모론은 비합리적인, 그러니까 운과 불운, 덕과 부덕, 복과 박복, 길함과 불길, 신성함과 천함 같은 구분으로, 그들이 보기에 불운하고 부덕하고 박복하고 불길하고 천한 것이라면 덮어놓고 배척하며 어떤 설득도 불가능한 낙인을 찍어왔다.
신세대 음모론은 똑같은 빈틈과 균열을 구세대의 게으른 편견 대신, 자유로운 논리 비약과 그럴듯한 외신 보도와 있어 보이는 논문 등으로 채운다. 이전 세대와 비교하기 힘든 교육의 수혜와 문화적 경험 덕분이겠지만, 자신의 음모론을 ‘근거 있(어 보이)는’, ‘과학적 입증이 가능한(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한다.
그래서인지 ‘김어준들’은 신세대 음모론은 구세대의 ‘카톡 찌라시’ 같은 유언비어나 가짜 뉴스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정당하지도 않고 진실도 아닌 카톡 찌라시와 달리 신세대 음모론은 정당하고, 조만간 진실로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았으니 음모론이라 불리는 것까지는 감수하지만, 실은 음모론이라기보다는 합리적 의심에서 비롯된 치밀한 탐사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40대 한국 남자의 주류 장르가 음모론 서사가 되면서 그들의 인간형까지 점점 어그러지고 있으니까.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그를 바라본다는 말처럼, 그들이 음모론이라는 장르를 만들지만 장르 역시 그들을 만들어간다.
신세대 음모론에 익숙해진 그들은 어디서나 ‘빅 픽처’를 남발하고, 대화를 통한 합의에 앞서 툭하면 의도와 배후를 들먹이며, 비판하는 동료 시민을 금세 적으로 돌리고, 의견의 평화적 경쟁 대신 폭력적인 말싸움을 일삼는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혼란과 모호성을 없애주는 확실한 답변을 원하는 ‘종결욕구’를 앞세워, 우연과 불확실을 다룰 수 있는 능력 대신 간명하고 단순한 세계 인식을 얻는다. 서서히 과잉 합리주의자가 된 채로 이 세상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간파한 똑똑한 나라고 믿는다. 음모론자의 인간형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 단계에 이르면 그들은 자신의 객관적인 사회적 지위에 눈감고, 음모론을 약자의 무기로 제시하고, 피해자의 자리를 먼저 차지하며, 그걸 알리바이 삼아 무책임의 위치로 곧잘 숨는다. 그들은 속지 않으며 틀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들의 탐사와 추적은 어느새 종교적 열정에 가 닿는다. 김어준의 좌우에 언론인 주진우와 종교인 김용민이라는 캐릭터가 있는 것은 그래서 징후적이다.
음모론을 마치 세속 종교처럼 간주하는 스트롱 음모론자부터, 온갖 썰에 의심 없이 귀 기울이는 샤이 음모론자까지, 한국 음모론자의 인간형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게 분포한다. 이런 스펙트럼을 온실 삼아 음모론의 다른 변종 인간형들도 숱하게 생산된다. 비난 문화와 결합한 음모론자는 조금만 비판적인 낌새를 보여도 누군가의 삶을 조리돌려 파괴하고, 공포 마케팅과 손잡은 음모론자는 아픈 아이에게 약 대신 숯가루를 먹게 한다.
이렇게 신세대 음모론이 인간형을 망쳐가는 폐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애써 계몽이나 설득에 나선다 해도 별로 효과가 없을 듯하다. 신세대 음모론 못지않게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구세대 음모론의 전형인 카톡 찌라시 문제처럼. 특히, 그냥 홍준표도 아니고 박근혜-이후-홍준표에 대한 지지를 떠올리면 우울한 전망을 피하기 어렵다. 과학혁명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말을 고쳐서, 새로운 세계관의 승리는 설득이 아니라 낡은 세계관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 새로운 세계관에 익숙한 세대가 자라나면서 이루어진다며 그만 관심을 거두고 싶다.
신세대 음모론의 문제도 거기에 물든 사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그들은 설득을 위한 어떠한 비판도 다른 쪽의 음모에 불과하다는 음모론 고유의 메커니즘으로 흡수해서 무화시킨다. 설득 피로에 지쳐 평화적 무시라도 할라치면 어마무지한 모욕의 역풍을 맞는다. ‘사람이 먼저’인 새로운 최고 존엄마저 신세대 음모론자의 행태가 공론장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만드는 ‘양념’이라고 순화시켜주는 상황이니, 역시 전망은 암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음모론자의 비틀어진 인간형이 되고 싶지 않다면 각자도생의 길이라도 찾고 버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지적인 자기 방어를 위해서 가드를 한껏 올리고, 시인 존 키츠가 말한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을 기르는 데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소극적 수용력이란,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성마르게 인과나 진위를 단정 짓지 않은 채 모순되는 두 가지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개인과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합리적 의심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에 관심을 여는 지적 자제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게 사적인 요새를 쌓는 동안에도 신세대 음모론은 점점 세력을 확장할 것이다. 그 기세에 우쭐해진 40대 남자들은 카톡 찌라시나 돌려 보는 구세대를 이렇게 무시할지 모른다. 자신들처럼 과학적인 방법과 합리적인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고립된 네트워크에 갇혀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이다 거짓에 빠져든 가여운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카톡 찌라시를 신봉하는 앞세대는 김어준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김애란의 단편소설 <서른>을 빌려 말하면,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 에디터
- 글 / 박준석(1972년생, 문학평론가)
- 포토그래퍼
- 양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