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저출산 1세대 부모, 70년대 초반생

2017.06.19GQ

90년대 초반, 누가 ‘신세대’를 탄생시켰나. 지금 ‘신세대’는 어떤 선택을 하나.

김보리 , 2016

김보리 <가족사진>, 2016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16>에 실린 ‘정치 태도와 행위의 세대 간 차이’ 보고서에 따르면, 1970∼1974년생들은 2002년 이후 각종 선거에서 꾸준히 진보적인 투표 성향을 보여왔다. 386세대들이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빠르게 보수화된 것과는 분명히 대조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70년대 초반생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인가? 사실 이 세대는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신세대론’이나 ‘X세대론’을 통해 세대론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바 있다.

물론 이들이 직접 자기 또래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그저 호명의 대상이었을 뿐 호명의 주체는 따로 있었다. 바로 386세대의 비평가나 광고 홍보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이제 곧 도래할 소비 사회를 전망해보기 위해 68혁명 이후 유럽의 문화적 전환이나 80년대 일본의 신인류론을 ‘레퍼런스’ 삼아 새로운 세대론의 형상을 빚어나갔다.

바야흐로 1989년 5천 불을 돌파했던 1인당 소득이 1만 불 달성을 향해 가파르게 상승하던 시점이었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소득 1만 불의 시대를 상상하기 위해선 그 시대로의 변화를 주도할, 새로운 인물형을 찾아보는 것이 급선무의 과제였을 것이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70년대 초반생 일부, 그러니까 30퍼센트 초반대의 대학 진학률을 기록한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바로 이런 요구에 딱 들어맞았다. 집단에 귀속감을 느끼기 보다는 나를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 정치적 대의보다는 라이프스타일을 소중히 여기는 일상의 태도, 다양한 매체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시청각적 문해력, 이전 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문화적 경험과 개성을 강조하는 자기 표현력 등등이 이 신세대의 특성으로 나열되었다.

그런데 이 세대의 특성은 이렇게 문화적으로 나열되고 끝나는 것이었을까? 이 연령대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 10퍼센트 이상의 경제 성장을 열 번 정도 경험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20년을 사는 동안 그 절반에 해당하는 10년의 기간 동안 10퍼센트 이상의 성장을 매해 경험하면서 자랐다는 것이다. 아마도 1990년대 이후 출생한 한국인에게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그들에게 10퍼센트의 경제 성장률은 전인미답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 테니까.

아무튼 이들에게도 위기의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의 제2차 오일쇼크나 80년대 초중반의 미·소간 핵전쟁 위협은 이들 일부로 하여금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인류의 미래를 근심하게 만든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펼치는 근심의 상상력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이나 마쓰모토 레이지의 <천년여왕> 같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발동되었다는 점이다.

70년대 초반생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유소년기를 보낸 첫 번째 세대였다. 이들의 특성을 논하는 데 고도성장기라는 시대적 요인이 중요한 것은 부모 세대, 그러니까 40년대생들이 바로 이 시기에 30∼40대의 연령대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미국식이지만 한반도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가 40년대생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토지 개혁을 통해 지주 중심의 봉건적 계급 질서가 빠른 속도로 와해되던 시점에, 이전 세대는 물론 역사상 유래가 없는 현대적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 엘리트 그룹은 시험 성적에 따라 중고등학교를 배정받는 비평준화 정책을 통해 집안을 일으킬 ‘개천용’이자 ‘능력주의’의 신봉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의 대학 문을 열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그들은 추락을 경험해야 했다. 시발점은 지방의 중소 도시에서 이름을 날리던 수재에서 서울 변두리 뜨내기 고학생으로의 전락이었다. 그들은 상경한 후 서울의 최상층부에 잔존해 있던 전근대적 계급 질서를 목격했고, 서울의 양반 사대부나 중인 계급 출신, 지방 토호나 대지주, 서북계 기독교 엘리트를 부모로 둔 또래 집단이 바로 자신의 새로운 경쟁자임을 깨달았다. 사실 서울대 인문대를 졸업한 지방 출신 40년대생 소설가들이 1960년대 중후반에 쓴 소설 상당수는 이런 경쟁을 회피하거나 우회하기 위한 전략의 산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들은 시작 해보지 않아도 패배를 짐작할 수 있는 경쟁에 뛰어들 정도로 우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청춘의 낭만을 알리바이 삼아 자신의 열패감을 심미적으로 연출하는 데 능숙했다.

40년대생 대졸 엘리트 그룹에 이전과는 다른 경쟁의 선택지가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60년대 후반 이후였다.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은 기껏해야 공무원이나 은행원 수준에 머물렀던 화이트칼라 계층의 일자리를 빠른 속도로 증가시켰고, 이 또래의 엘리트들은 산업화의 실무자로, 그러니까 사무직·관리직 종사자로 변신하며 도시 중산층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들의 청춘은 1971년 대통령 선거, 1972년 유신헌법 제정, 1973년 중화학공업 육성책 발표 같은 연쇄적 사건들을 통과하며 완전히 연소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들은 이제 70년대 초반생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남로당 출신의 1917년생 군인 대통령, 봉건귀족·서북계 유학파 출신 혹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20·30년대생 기술 관료들, 40년대생 지방 출신의 대졸 엘리트들이 명확한 세대간, 지역별 위계에 따라 삼각 편대를 구성해 산업화를 주도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마지막 후위 그룹의 아이돌은 1977년, 서른일곱의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 자리에 오른 1941년생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산업화 정책이 서울 지역 중산층의 탄생을 불러오고 이들의 집결지로서 강남 대규모 아파트 단지라는 신시가지 개발로 이어졌다면,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전반에 걸친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수도권과 동남권 지역을 공업화와 도시화로 일으켜 세운 반면, 다른 지방의 지역들은 새마을운동 수준의 정신승리를 강요하며 전근대적인 형태로 방치해버렸다. 배제된 지역의 결과는 참혹했다.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호남과 경북 북부, 강원지역의 연령대별 인구 분포는 이미 1990년대 초반에 고령화 상태에 접어들었고 지방 소멸의 초기 단계에 진입했으니 말이다.

70년대 초반생이 유소년기에 경험한 고도 성장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서울에서는 중산층 중심의 소비 문화가 경제 발전을 원동력 삼아 완성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반면, 지방에서는 불균형 발전의 결과로 지역에 따라 농업 기반의 전근대적 계층 질서가 여전히 유지되거나 공업화의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계층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 동남권과 그 외 지역 등 각각의 지역에서 성장한 70년대 초반생에게 고도성장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경험의 양태는 아파트나 단독주택 보유 여부, TBC와 AFKN 방송의 시청 여부, 신세계백화점 크레디트 카드-포니 승용차-삼익 피아노-마란츠 오디오-소니 컬러 텔레비전 보유 여부, 김민제 아동복과 계몽사 위인전집-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아카데미 프라모델 혹은 타미야 RC카-애플II 혹은 SPC-1000 컴퓨터-워크맨의 보유 여부, 마이클 잭슨-마돈나-듀란듀란-오지 오스본 등 팝 선호도의 변화 추이 등 물질적 소비나 문화적 취향의 패턴으로 유형화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1971년생 소설가 백민석이 자신이 경험한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의 가난과는 다른 가난이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70년대 초반생의 성장기는 계층적으로 차별화되었고 지역적으로 불균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중 일부가 자기 성장기의 특성이 한국 자본주의의 면모와 상당 부분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 덕분이었다. 고등학생의 시선에 비춰진 87년 대선이 광장의 뜨거운 열기나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입만으로는 지역 갈등의 표출을 막기 힘들다는 교훈을 안겨줬던 반면, 대학생으로 경험한 92년 대선은 지역 갈등뿐만 아니라 계층 갈등도 복잡한 정치적 변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물론 60년대 중후반생 운동권 선배들은 ‘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저력’이나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후배들을 나무라곤 했지만, CNN의 중계 영상으로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목도한 신세대 대학생, 특히 3저 호황과 아파트 가격 폭등기를 거치면서 부모의 소득 증대를 곁에서 지켜본 도시 중산층의 첫 번째 자녀 세대에게, ‘독점 강화, 종속 심화’ 같은 테제를 들이밀며 한국 자본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선배들은 그리 미더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의 선의, 그들이 내세운 대의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 선배들의 예측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일까? 70년대 초반생의 전성기는 IMF 외환 위기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이들이 가정을 꾸린 후 30대에 진입하던 그 시점에 한국 사회의 계층 이동 가능성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졸 엘리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도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90년대의 신화가 고도 성장기의 거품이 만들어낸 집단적 백일몽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그 백일몽의 마지막 주인공이었던 70년대 초반생들은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계층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로 고도성장기의 닫히는 문과 저성장 시대의 열리는 문을 양손으로 붙잡고 버티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부모 세대가 실현한 4인 핵가족 모델을 포기하고 저출산 1세대의 부모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자력으로 중산층 진입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걸맞은 지극히 합리적 판단의 결과였다. 아마도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이들이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며 베이비붐 세대 중산층의 보수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 되는 걸 막는 인간 방파제 구실을 해냈다면, 그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유소년기를 보낸 대가라고 할까? 역사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채무의 상환을 요구하는 법이니까.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에디터
    글 / 박해천(1971년생, 동양대 교수)
    포토그래퍼
    김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