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더 플라자 호텔에서 내려본 도시

2020.03.15GQ

서울광장을 둘러싼 콘크리트 거석, 그 가운데 불빛이 들어온 더 플라자 호텔 1652호. 한 남자가 창가에 서서 암흑이 내려앉은 도시를 바라봤다.

백은 지난주에도 저 아랫길을 걸었다. 수요일. 서울광장 건너편 바로 저 길을 걸었다. 1652호의 왼편 창으로 내려다보면 바로 보이는 길. 덕수궁 앞길. 엘리베이터를 제때 타고 내려가 힘껏 달리면 3분이면 덕수궁 정문에 닿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릎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백은 달리지 않은 지 꽤 됐다. 마지막으로 달렸을 때는 발바닥을 지탱하던 근육의 막이 찢어졌고, 근막에 생긴 염증으로 2년 반이나 통원 치료를 받았다. 그는 사실 바게트 샌드위치를 씹다가도 어금니가 파절될 나이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정에서 3분이 지났다. 백은 밤에는 덕수궁의 불을 다 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살면서 그는 돌담보다 높은 위치에서 덕수궁을 넘겨다본 적이 없다. 늘 돌담보다 낮은 길을 걷곤 했다. 덕수궁 궁내가 보이지 않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밤의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1652호는 북향이라, 창가 테이블에 서면 곧게 뻗은 세종대로를 따라 광화문광장과 광화문까지 모두 보여야 했다. 하지만 백의 눈에는 이순신 동상도, 세종대왕 동상도 보이지 않았다. 자정이면 세종대로 인근의 불도 모두 꺼졌고, 광화문광장에도 암흑이 내려앉았다. 어두운 시야의 막다른 끝에,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에만 가로로 째진 눈매 같은 불빛이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광화문 현판을 비추는 조명이었다.

백에게 현판 조명은 낯이 익었다. 2016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시즌에, 그는 매주 토요일 광화문광장에서 그 현판을 올려다봤다. 옆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던 광화문광장에서, 단 하나 정적에 잠겨 있는 곳이 그 현판이 있는 자리였다. 삼거리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있는 그곳은 별세계 같았다. 밤하늘도 사색에 잠긴 듯 고요한 자리였다. 광장에서 들끓는 깃발과 구호와 노랫소리가 수증기처럼 솟다가 그 근처에서 흩어져 까무룩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세종대로를 거쳐 서울 이곳저곳으로 흩어질 차량들의 불빛들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백은 다시 서울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서울광장도 어둠에 잠겨 디테일이 생략된 채 두루뭉술한 둥근 형태만 남았다. 캄캄했다. 그가 평소에 이 앞을 그토록 자주 지나다니지 않았다면 서울광장인지 아닌지도 분간하지 못할 것이었다. 랜드마크 서울시청에도 불이 들어온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시청 구관에 달린 시계만, 칠흑 같은 허공 속에 덩그마니 떠 있었다. 서울이 불야성이라는 말은 뭘 보고 나왔을까.

백은 지난주에도 지난달에도 지난겨울에도 저 건너편 길을 걸었다. 저 길은 그가 서울에서 가장 오랜 세월 걸은 길이었다. 서울 어디에 살더라도 그는 삶이 팍팍해진 것 같으면 저 길을 걸어서 서울 시립미술관을 다녔다. 돌담길이 데이트 명소라지만 그는 데이트를 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시청 신관을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평소처럼 광화문을 거쳐 덕수궁 앞길을 걷는데, 시청 본관을 지저분한 앞머리처럼 덮고 있는 유리로 된 신관이 나타났다. 백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껌뻑였다. 푸르스름한 신관 건물이 누가 치대다 말고 팽개친 푸른곰팡이 슨 피자 반죽같이 보였다.

1652호에서는 백이 시립미술관에 들를 때마다 보던 것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서울시청, 서울광장, 지하철역, 그리고 광장과 주변 거리 곳곳에 임시로 설치된 천막들이 있었다. 천막의 주인들은 늘 달랐다. 어느 땐 해고된 노동자였다가, 어느 땐 북한에 망상을 품은 퇴역군인들이었다가, 어느 땐 주거권을 빼앗긴 철거민이었다가, 어느 땐 딱하게도 이미 재기가 불가능해진 정치 지도자를 도로 청와대에 앉히자고 단식을 하는 사람들이 천막 안에 앉아 있었다. 2016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시즌에는 저 넓은 서울광장이 그런 천막들로 가득 찼었다. 백이 그때도 1652호에 있었다면 뭔가 다른 인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덕수궁 돌담길 코너를 돌기 직전, 끝으로 보는 것들이 있었다. 서울광장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서울시청 구관과 마주 보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빌딩들. 지금도 서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 마천루라고 하기엔 좀 낮지만, 처음 들어섰을 땐 당시의 기준으론 대단한 랜드마크였을 빌딩들. 북향으로 난 1652호의 창문은 길이가 끝에서 끝까지 5미터는 되었다. 백은 왼편 끝으로 가서 덕수궁을 보다가 다시 오른편 끝으로 가서 재능교육 빌딩의 전광판을 보았다. 전광판은 그의 시선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었다.

시립미술관으로 가다 말고 덕수궁 돌담길 코너에 서서 보면 백의 눈에, 서울광장을 둘러싼 빌딩들이 꼭 영국 어딘가에 있다는 스톤헨지 거석들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날이 좋아 햇볕이 광장 깊숙이 내리쬘 때 특히 그랬다. 노을이 짙은 날에 그랬다. 아니면 눈이 많이 쌓였거나 날이 추워서 어디든 뛰어들어 몸을 녹이고 싶을 때 그렇게 보였다. 스톤헨지 유적도 뭔가 태양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서울광장을 둘러싼 콘크리트 거석들 중 특히 호텔들이 백의 관심을 끌었다. 더 플라자 호텔, 웨스틴조선 호텔, 한 블록 건너에는 롯데 호텔 서울이 있었다.

백은 어렸을 때부터 그 호텔들을 봐왔다. 그는 명동에 있는 대학에 다녔고,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갈 때면 종종 서울시청 앞을 지났다. 수업이 끝나면 산책을 하듯 명동을 걸어 내려와 신세계 백화점을 거쳐 남대문 시장으로 가거나, 덕수궁으로 오곤 했다. 그는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부터 이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시립미술관을 찾곤 했다. 백은 그때 미술을 좀 더 진지하게 대했어야 했다. 그때 삶의 많은 것들을 좀 더 진지하게 대했어야 했다.

백이 봤던 호텔들이 지금의 그 호텔들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호텔이란 게 중요하고, 무엇보다 호텔들의 전망이 중요하지, 어떤 호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서울시청과 마주 보고 있는 스톤헨지 거석들 같은 호텔들에서는 자신의 거리가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거석들의 어깨에 올라서면 서울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백의 생각이 유별날 것도 없었다. 서울에서도 가장 붐비는 곳이니 평소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 중 못해도 수백 명은 그 같은 생각을 해볼 것이었다. 시청 앞을 벗어나면, 호텔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금방 잊을 그 생각을…. 전망 좋은 객실을 빌려서 욕조에서 더운물로 근육을 나긋나긋하게 만든 다음, 가운을 걸치고 나와 뭐라도 마시며 창가에 서서 서울광장을 내려다보는 생각. 에스프레소도 괜찮고 와인도 괜찮고, 아무튼 스톤헨지의 거석 어깨에 올라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꿈.

백은 더 플라자 호텔 1652호에서,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생각은 광장 근처를 벗어나면 잊고 마는 아주 연약한 종류의 희미한 꿈이었지만, 서울광장을 지날 때면 매번 강박적으로 되살아나기도 했던 꿈이었다. 백은 젊어서는 스톤헨지의 어깨에 올라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가능성은 그의 인생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생활의 가난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고 마음의 가난은 그의 꿈을 더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에겐 여인숙, 여관뿐이었다. 나이가 들어 백은 그런 호텔들이 생각만큼 그리 비싸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시즌에 따라 더 싸게도 묵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톤헨지의 어깨에 올라 서울광장을 내려다보는 일은 그에겐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소박한 버킷리스트로 남아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살고 있고, 가능하다면 한국 바깥의 호텔에서 묵고 싶었다.

백은 1652호의 창문에서 다시 한번 서울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새벽 한 시였고, 그는 침대로 기어들어갈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하지만 기껏 체크인해서 본 것은 밤의 어둠뿐이었다. 서울 한복판이 자정엔 그토록 캄캄해진다는 사실에 그는 좀 놀랐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해가 뜬다. 그러면 비로소 백은, 서울광장을 둘러싼 거석의 어깨에서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캄캄해 실망스럽더라도, 해가 뜨지 않은 날은 그의 평생 단 하루도 없었으니까. 밝아오지 않은 날은 없었으니까. 글 / 백민석(소설가)

    에디터
    김아름
    포토그래퍼
    최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