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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찬히 달려 본 네 곳의 길

2020.05.04GQ

찬찬하고 온화하게 달려달라며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네 곳의 길.

충주호
내비게이션은 언제나 옳을까? 최단 거리로 유도해 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줄일 수 있지만,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릴 뿐이다. 경로 안내에 몰두하는 동안 운전을 통해 부가되는 우연한 경험과 소소한 기쁨은 조금씩 배재된다. 충주호를 알게 된 계기도 내비게이션의 부재에 따른 공교로운 과정 때문이었다. 내비게이션이 매립되지 않은 차를 타고 스마트폰에 의지한 채 월악산으로 향하던 길이었지만, 충주시로 접어드는 길에 배터리가 모두 소진되고 말았다. 멀찌감치 보이는 봉우리의 기암을 향해 무작정 차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의 가파른 오르막을 거듭하고, 숲 사이로 소심하게 난 길을 통과하자 예정에 없던 전경이 나타났다. 그릇에 소담히 담긴 물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청록빛 호수. 산행이야 늦으면 아무렴 어때. 산의 경사면을 따라 호수를 두른 도로를 느릿느릿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충주호는 한 바퀴를 도는 데 2시간은 족히 소요된다. 댐을 지나야 본격적인 풍광이 펼쳐지고, 5월이면 호수 주변에 늘어선 과수원마다 사과나무 꽃이 한창이다. 호수를 따라 달리다가 청풍대교를 건너 남한강 상류로 연결되는 길로 빠져나가는 순간 암석 절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보너스 트랙’으로 연결된다.

정선 문치재
철처하게 고립되고 싶을 때면, 잠적히 혼자가 되고 싶을 때면 서슴없이 향하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3시간여 걸리는 거리를 감내하면서까지 정선 문치재로 달린다. 고불고불한 급커브가 반복되는 내리막길 초입에 리포터의 건조한 멘트 같은 문구가 표지판에 적혀 있다. “여기는 해발 732미터입니다.” 강원도에서도 내륙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진 문치재는 정선군 북동리라는 산간 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험난한 계곡을 건너온 6륜 구동 트럭을 통해 생필품을 전달받고, 목재를 실어 돌려보내던 교역 경로를 대신하기 위해 해발 1천 킬로미터가 넘는 산 사이로 어렵사리 낸 길이다. 찾아가지 않는 한 지나지 않아도 되는 탓일까, 금광이 발견되며 한때 번성했던 마을이 잔뜩 움츠러들어서일까. 문치재는 지금 고적하다. 1.5킬로미터에 이르는 굽잇길을 내려가는 동안 도로를 채운 건 나지막한 배기음과 엔진의 뭉근한 열기뿐.

삼척 새천년 도로
누구나 서른을 넘길 때면 나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지금이 흘러가면 영원히 할 수 없을 듯한 일을 추려내 실행에 옮기려 한다. 서른 문턱에 닿았을 때 작성한 목록의 첫 번째는 7번 국도 여행이었다. 국토를 종단하는 4개의 굵직한 도로 중 부산에서 시작해 고성까지 해안선을 따라 개설한 구간이다. 약 900킬로미터의 경로를 따라 북쪽으로 오르는 동안 동해의 색은 미묘하게 변했다. 7번 국도의 백미는 삼척에 있는 새천년 도로였다. 브루탈리즘 건축물 같은 회색 시멘트 공장 지대를 지나 정라항에 들어서면 바다에 밀착된 4킬로미터의 길이 펼쳐진다. 2000년에 개통해 새천년 도로라는 이름을 붙였고, 길 옆엔 1백 년 후에 개봉할 타임 캡슐을 묻었다. 고아한 바다와 방파제로 돌진하던 파도 외에도 이곳이 또렷한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도로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에서 의의를 찾는 서른 살에게 새천년 도로는 공연히 또래 친구의 이름처럼 들렸다.

단양 보발재
단양처럼 정결하면서도 유유한 곳을 본 적이 없다. 인구 3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소도시지만, 구석구석 숨겨진 사적과 명승이 호젓한 인구밀도를 대신한다. 구부러지는 강을 따라 번듯하게 포장된 길을 달리면 595번 지방도로 접어든다. 산자락에서 이륙해 파란 하늘을 활공하는 패러글라이딩이 시야에 들어온다. 작은 단양을 포옹하고 있는 소백산 언저리에 당도했다는 신호다. 보발재는 단양을 지나 북동쪽에 위치한 강원도로 올라가는 고갯길이다. 소백산 줄기에서 그나마 온순한 지세를 골라 길을 냈다고 해도 일곱 번의 크고 작은 코너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보발재의 진정한 매력은 굽이지는 길을 내려오는 짜릿함이 아닌 언제나 새로운 배경이다. 계절마다 도로 주변을 채우는 색채가 홀연히 달라져 매번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변곡점을 재빠르게 지나며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스릴을 즐기기보다 오늘의 색을 두고 보고 싶은 곳. 가속페달보다 관성에 의지해 슬금슬금 하향하고 싶은 도로. 한 번도 보발재를 넘으며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들은 적이 없다.

    피쳐 에디터
    이재현
    포토그래퍼
    Sugar P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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