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모든 길은 내추럴 와인으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태도, 파격적인 맛, 관습에 대항하는 변화의 움직임이 그곳에 있다.
‘카페베네’ 전성기 시절 수준의 확장세가 아닌가 싶다. 무한증식을 거듭하는 서울의 내추럴 와인 바 이야기다. 이제는 을지로, 삼각지 같은 ‘포스트-힙타운’을 넘어 가양동, 응봉동 등 ‘힙’과는 다소 거리가 먼 동네까지 드문드문 번지는 분위기다. 가양동과 응봉동 주민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내추럴 와인이 미식의 변방까지 퍼졌다는 실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1세대에 속하는 ‘빅라이츠’, ‘라피네’, ‘바 피크닉’ 등이 자웅을 겨루던 시기를 지나, 작고 개성 있는 2세대 업장이 내추럴 와인 바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내추럴 와인 바에는 기존의 클래식한 와인 바와는 확실히 다른 즐거움이 있다. 후자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비스포크 수트라면, 전자는 편집 숍에서 파는 오가닉 코튼 셔츠에 가깝다. 접근도 쉽고 규칙도 한결 느슨하다. 이 친근함과 느슨함을 축으로, 최근 문을 연 와인 바들 사이에서 몇몇 공통된 경향이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베끼는 과정에서 생겨난 대한민국 요식업계 특유의 몰개성화 현상일 수도, 주 고객층인 젊은 세대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다다른 필연적 귀결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유행의 첨단을 걷는 서울의 미식 신에 ‘K-내추럴 와인 바’라 할 만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스태프가 와인을 권하는 방식이다. 다양한 캐릭터의 와인을 눈앞에 보여주고 손님의 자율적인 선택을 유도하는 서비스는 이제 ‘K-내추럴 와인 바’의 새로운 관례로 자리 잡은 모양새다. 기나긴 와인 리스트를 숙제처럼 던져놓고 은근슬쩍 손님의 수준을 가늠하던 기존 와인 바와는 서비스의 눈높이가 다르다. “선호하는 품종 있으세요?”라는 소믈리에의 물음에 “너무 달지 않은 소비뇽 블랑이나…” 하고 죄인처럼 말꼬리를 흐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초여름 피크닉의 정취를 연상케 하는 맛” 운운하는 요즘 소믈리에들의 소비자 중심 언어 역시 대중의 침샘을 건드리는 요소다. 4~5개의 ‘추천 와인’으로 객관식 문항을 제시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도 모자라 정답까지 슬쩍 귀띔해주니 손님 입장에서는 묘한 해방감이 든다.
그런가 하면 홍콩이나 도쿄에서 흔히 보이는 ‘쇼케이스형 와인 바’를 표방하는 곳도 부쩍 눈에 띈다. 전용 냉장고에 수십 종의 와인을 진열해 선택의 폭을 넓힌 경우다. 내추럴 와인의 매력 중 하나가 바로 생산자의 캐릭터가 반영된 개성 강한 레이블 아니던가. 이런 곳에 가면 와인을 옷처럼 쇼핑하는 기분이 든다. 어떤 때는 독특한 병 디자인에 이끌려 직관적으로 와인을 고르기도 한다. 그렇게 고급 올리브 오일 병처럼 생긴 오렌지 와인에 도전하기도, 코르크 대신 크라운 캡을 사용한 펫낫의 펑키한 매력에 빠지기도 하면서, 내추럴 와인의 바다에 서서히 발을 담그게 된다.
전위적인 인테리어도 ‘K-내추럴 와인 바’의 큰 특징 중 하나다. 일례로 최근 충무로역 근처에 문을 연 ‘퍼’는 빨강, 파랑, 노랑의 총천연색 가구와 기묘한 형태의 빈티지 조명으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오프너, 와인 백 등 작은 굿즈 하나에도 가게의 정체성이 배어 있다. 마찬가지로 최근 문을 연 ‘스페이스딤’은 와인 바라기보다 실험적인 대안 공간을 연상케 한다. 아크릴, 철제, 플라스틱 등 ‘칩’한 소재를 활용한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자체 제작한 나무 스툴, 그래픽 포스터에서 공간의 일관된 ‘톤 앤 매너’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음악에서도 기존의 관습에 대항하는 변화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올드 팝 바이닐과 디제이 부스를 갖춘 ‘폼페트 셀렉시옹’은 주말마다 흥겨운 디제이 셋 공연을 개최한다.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 몸을 흔들며 스탠딩으로 공연을 즐기는 손님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바이닐 숍과 편집 숍, LP 바가 한 공간에 모여 있는 ‘로스트인내추럴’의 존재는 와인 바가 미식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의 영역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선명한 예다.
몇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파격적인 안주 역시 요즘 내추럴 와인 바에서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내추럴 와인 특유의 시큼한 맛은 매콤한 음식과도 쫀쫀하게 어우러지는데, 그래서인지 한식의 약진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보리새우 미나리전, 강원도 백골뱅이 등 터프한 포장마차풍 안주로 입소문을 탄 을지로 ‘보석’은 2호점 ‘보너스’에 이어 청담동에 3호점을 오픈하며 야심 찬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자양골목시장 안에 자리한 ‘고래포차’는 소주와 맥주, 막걸리와 내추럴 와인을 함께 파는 과감한 전략으로 눈길을 끈다. 황동 주전자와 와인 잔, 새빨간 오징어볶음과 쿰쿰한 오렌지 와인이 한 테이블에서 무람없이 뒤섞이는 광경이 신선하다. 금남시장의 쌩쌩한 재료들을 바탕으로 갈치속젓 파스타 같은 국적불명의 요리를 접시에 올리는 ‘금남정’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의 경계가 흐릿한 안주 메뉴도 ‘K-내추럴 와인 바’의 필수 요소가 된 지 오래다. 당일 날짜가 적힌 A4 용지에 10여 가지 안주가 깨알 같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는데, 살펴보면 1만~2만원대의 단품 요리가 대부분이다. 배가 부를 땐 부라타 치즈 한 접시만 주문하면 그만이다. 덕분에 8천원짜리 아스파라거스튀김과 3만2천원짜리 돌문어구이가 평등하게 보이는 착시를 겪기도 하지만 말이다. 1만원 안팎으로 책정되는 이들 안주 가격에는 사실 현실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 와인 가격을 7만~10만원대로 높게 책정하다 보니 안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단품 요리 위주로 구성하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금의 내추럴 와인값이 기존의 컨벤셔널 와인에 비해 좀 비싸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애매하게 가격을 밝히거나 노량진에서 횟감 팔 듯 ‘싯가’를 앞세우는 곳 앞에서는 제아무리 내추럴 와인의 분방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팔짱을 끼게 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남동의 모 내추럴 와인 바 대표는 “내추럴 와인 시장이 이윤을 남기기 좋은 구조인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웹 검색을 해봐도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 경우가 많고, 인증 시스템도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보니 판매자가 가격을 마음대로 매길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럼에도 내추럴 와인 수입사가 다양해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 건 분명 긍정적 현상”이라며, “아직은 시장의 자정능력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세간의 불만을 의식한 듯, 3만~4만원대의 저렴한 내추럴 와인을 취급하는 보틀 숍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애초에 내추럴 와인 붐은 기득권 생산지의 간섭 없이 시장에 진입하길 원하는 젊은 생산자들로부터 시작됐다. 그 움직임에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와인을 즐기자’는 탈권위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내추럴 와인 바 유행이 밀레니얼 세대가 일으킨 일종의 문화 운동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수입상, 소믈리에 등 ‘업자’들의 영역이었던 내추럴 와인은 이제 엄연한 미식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모양새다. 유튜브만 봐도 신상 내추럴 와인 바를 ‘도장깨기’ 하듯 찾아다니는 일반인들의 브이로그 영상이 넘쳐난다. 환타처럼 노란 와인을 혀로 굴리며 “잘 익은 오렌지 맛이 나네요”라고 품평하는 20대 초반 유튜버도 찾을 수 있다. 컨벤셔널 와인(클래식 와인)만 고집해온 보수적인 아저씨들조차 전국 팔도의 업장들을 정리한 ‘내추럴 와인 맵’을 남몰래 다운로드하는 요즘이다. 고백하자면 거기에는 밀레니얼 세대에 겨우 발을 걸친 나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 글
- 강보라(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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