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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속 빛나는 첫 문장 30편

2021.01.12GQ

10명의 시인과 소설가가 마음에 품은 첫 문장을 내어놓았다. 난데없이 전율을 일으키며 이윽고 끌어당기고야 마는, 한국 문학 사상 빛나는 첫 문장 30편.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중 ‘일찌기 나는’, 문학과지성사 1981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찌기’가 ‘그 옛날’이었다면 ‘예전에’였다면 이 한 구절은 시가 되었을까.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애초부터 아무것이지 않은 자,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람 알 깼다고 본다. 메추리인가 싶고 닭인가 싶고 오리인가 싶은 거지. 그런 의미에서 이 한 구절의 절망과 이 한 구절의 희망은 딱 시다 싶다. 시라는 자유가 터지는 순간의 구절이지 싶다. 김민정 시인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중 ‘달나라의 장난’, 창비 1988

팽이가 돈다
돌아가는 팽이를 보고 싶어서, 그 팽이가 온전히 내 팽이이고 싶어서, 내 속도를 그대로 빼닮은 팽이의 회전을 여유롭게 관찰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문방구에서 막상 팽이를 사오긴 했는데 요즘 누가 팽이 돌리나 눈치 보다 땅에다가는 못 풀고 눈으로 푸는 마음, 그 눈에서 돌아가는 팽이의 마음, 그거 시 같다. 김민정 시인

이문재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 중 ‘기념식수 ’, 민음사 1988

형수가 죽었다
아내가 죽었다 했으면 신파인데 형수라 하니 나와의 그 애매한 거리가 이 구절을 시로 유지시켰다. 김민정 시인

이기성 <불쑥 내민 손> 중 ‘열정’, 문학과지성사 2004

닳아빠진 구두 밑바닥에 쩔꺽쩔꺽 들러붙는 생이 식당 앞까지 쫓아온다.
민망한 고백이지만 대학 졸업 후 생활에는 치이고 월급은 밀리고 외주비는 떼이고 공모전마다 최종심에서 매번 미끄러지고 그러는 동안 시 읽는 재미를 못 느꼈던 시절이 꽤 길었다. 그럴 때 우연히 이기성 시인의 시집 <불쑥 내민 손>을 읽었고, 펼치자마자 이 첫 문장에 초록색으로 줄을 쳤다. 이후 시 권태기에서 벗어나 다시 시를 찾아 읽게 됐다. 시를 외면하고 살 뻔한 인생을 바꿔준 시집에 계속 고마워하면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골라보았다. 구병모 소설가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문학과지성사 1986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 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里)로도 모인다.
이것이 첫 문장이다. 이 충격과 전율에 이유가 필요할까? 구병모 소설가

배수아 <북쪽 거실>, 문학과지성사 2009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하지만 사실상 크게 놀랄 일도 아니며, 따라서 소란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에게 실제로 닥치면 충분히 당황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일… 첫번째 탄원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상, 놀랄 일, 소란, 당황, 탄원서 같은 단어들이 모여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제공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더이상 탄원서가 중요한 게 아닌 총체적 불가해의 미로로 빨려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것. 구병모 소설가

윤해서 <그>, 문학실험실 2020

의미는 안절부절이다.
소설은 공교롭게도 “소설은 시작될 것이다”로 끝맺는다. 알아챌 수 없는 우리들의 찰나와 ‘그’의 의미로 남은 ‘당신’. 백가흠 소설가

김성중 <현남 오빠에게> 중 ‘화성의 아이’, 다산책방 2017

화성에 쏘아 올린 열두 마리의 실험 동물 중 오직 나만 살아남았다.
우주로 쏘아 올린 작가의 상상력, 하지만 우주적 소설의 두 발은 현실이라는 차별의 땅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백가흠 소설가

김남숙 <아이젠> 중 ‘염소와 나’, 문학동네 2020

저녁이면 저멀리 무허가 밭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염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로테스크란 이런 것이 아니던가. 무허가 밭에서 자라나는 우리들의 울음소리. 백가흠 소설가

김소연 <한 글자 사전> 중 ‘씨’, 마음산책 2018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나는 이 문장을 읽자마자, 어쩌면 평생 기억해야 할 문장을 알게 된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고, 덥석 좋아했다. 서윤후 시인

박민규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고삐 풀린 소설의 자유로움을, 그리하여 한국 문학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던 것은 박민규의 소설을 읽을 때였다. 서윤후 시인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 ‘정거장에서의 충고’, 문학과지성사 2019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불행한 것들 중 가장 희망적인 것을 노래하는 것. 나는 그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서윤후 시인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 이다.
그때 서른네 살이던 김지영은 지금 넓게 퍼진 이름이 되었다. 그 이름이 몇 살이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필요한 변화를 갖가지 방식으로 맞이하고 있다. 그 변화의 시작이 저 문장이라 하더라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서효인 시인

박경리 <토지>, 마로니에북스 2012(초판 삼성출판사 1979)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첫 문장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한가위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며 기뻐서 날뛰는 무색옷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를 우리의 현대사가, 그 안의 개인이 소설에서 명멸한다. 그 소설의 첫 문장인 것만으로 저 문장은 가치가 있다. 서효인 시인

김금희 <경애의 마음>, 창비 2018

그의 차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인생을 모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일단 다섯 사람이 탈 수 있지만 뒷좌석에 짐이 차 있고 조수석은 조수석대로 당장 필요한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쌓여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차는 오직 그, 공상수 한 사람을 위한 차였다.
보통 짧은 문장을 간결하고 좋은 문장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한국 소설은 그 명제를 배반하고는 한 다. 흐르듯 길어지는 말에서 인물 외양이나 성격, 사건의 맥락과 의 미가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 김금희의 문장이 소설의 첫 장면에서 부려놓는 공상수의 삶이 그렇다. 서효인 시인
장편소설의 첫 문장이 꼭 끝과 같다. 소설 한 편을 이미 읽어버린 듯 완벽하다. 소설은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처음, 돌고 도는 인생사의 압축이란 이런 것! 백가흠 소설가

은희경 <빛의 과거>, 문학과지성사 2019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 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라고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은희경은 “상관없이”로 끝나는 부사절을 문장 안에 들인다. 친함보다 오래됨에 무게를 실어주는 날렵한 문장을 시작으로, 우리는 ‘과거’를 향해 선선히 발 들일 수 있다. 오은 시인

오정희 <유년의 뜰>, 문학과지성사 1981

홧 아 유 두잉?
소설집 맨 앞에 위치한 표제작의 첫 문장은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다. 영어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건데, 아마도 ‘홧’으로 시작하는 한국어 소설은 이것이 유일하지 않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위의 문장이 한껏 늘어진 의식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다가온다. 오은 시인

김병운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다시 액정 화면을 확인했을 때였다.
어찌 보면 심상한 첫 문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액정 화면은 보는 것이고 목소리는 들리는 것인데, 우리는 순수하게 보기와 듣기를 수행하지 않는다. 보면서 듣고 들으면서 상상하는 것,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오은 시인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중 ‘빈집’, 문학과지성사 1989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1980년대 후반. 군사 정권의 독재와 그에 대한 투쟁의 부딪힘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 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아젠다 아래 개인의 감정은 언제나 후순위였고, 그것은 거의 없는 듯했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으므로, 청춘들은 요절한 시인의 쓸쓸함에, 애절함에 탄복하고 감동했으며 열렬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정소는 특정 세대의 것이 아니어서 기형도는 지금껏, 어쩌면 앞으로도 불멸일 것이다. 그의 시 ‘빈집’ 의 첫 문장은 이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유희경 시인

최인훈 <광장/구운몽> 중 ‘광장’, 문학과지성사 2008(초판 1976)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섭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전후 한국 소설의 가장 위대한 이정표인 최인훈의 ‘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이 망명길 중 맞닥뜨린 바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만장스런 역사의 한 절정에서 대한민국이 맞이해야 할 미래의 비유이기도 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묘사이기도 한 이 문장을, 작가는 죽을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덕분에 이 책은 쇄마다 다른 첫 문장을 가지게 되었다. 인용한 첫 문장은 2008년 최인훈 전집의 첫 인쇄본의 것이다. 유희경 시인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 문장은, 앞으로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그의 문학, 나아가 한국의 문학이 지닌 고유함을 대표해 전달하는 데 손색이 없게 아름답다. 게다가 이 첫 문장은 여러 갈래의 비평적 관점에서 도 흥미를 느낄 만큼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에 논쟁적이기까지 하다. 여전히 진행 중인 작가의 작품이지만 이 자리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유희경 시인

한유주 <불가능한 동화>, 문학과지성사 2013

개. / 개가 있다. / 개가 흘러간다.
한국에서, 저런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는, 불가능한 한유주를 응원하는 마음에서. 이우성 시인

김숨 <바느질하는 여자>, 문학과지성사 2015

어머니가 딸들을 서쪽 방으로 부른 것은 오후 느지막이였다.
‘어머니’와 ‘딸’, ‘서쪽’과 ‘방’이 이어지며 어렴풋이 전해지는 감정이 있다. 이우성 시인

최민석 <능력자>, 민음사 2012

우선, 내가 주인공임을 밝혀 둔다.
툭, 치고 들어가며, 내가 이야기의 능력자임을 명백히 밝혀 두는, 자신만만함. 이우성 시인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황금가지 2003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장대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이후 세상의 다른 일들을 생각할 때 대입하게 되었다. 정세랑 소설가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문학동네 2013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첫문장의 강렬함이 작품의 끝까지 이어지며, 이 작품을 읽은 이후로 욕설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세랑 소설가

구병모 <단 하나의 문장> 중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문학동네 2018

그것을 뒤집는 순간 조금도 위협적이 지 않은 무생물이 된다.
구병모 작가는 서사가 강한 작가로 유명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대단한 문장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세랑 소설가

이근화 <우리들의 진화> 중 ‘엔진’, 문학과지성사 2009

살아남기 위해 / 우리는 피를 흘리고 / 귀여워지려고 해 / 최대한 귀엽고 / 무능력해지려고 해
이근화 시인의 시집 <우리들의 진화>의 여는 시. 우리 삶을 순식간에 아울러버리는, 매우 의미심장하면서도 도발적인 첫 문장. 황인찬 시인

김혜순 <날개 환상통> 중 ‘새의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9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 새하는 순서 / 그 순서의 기록
김혜순 시인의 시집 <날개 환상통>의 여는 시. 새가 되어 새를 하는, 그 아득한 고통의 기록을 알리는 건조한 고지가 오래도록 아프다. 황인찬 시인

    피처 에디터
    김은희
    포토그래퍼
    김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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