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뱅크시의 새 벽화가 더 특별한 이유

2021.03.10주현욱

“담장에 벽화 그리기, 참 쉽죠?”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새 벽화가 영국 버크셔주 레딩시에 있는 옛 교도소 담장에서 발견됐다. 붉은색 벽돌 위 검은색과 흰색, 회색으로 그려진 벽화는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죄수가 매듭을 묶은 침대 보에 매달려 감옥을 탈출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또 그림 속 밧줄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종이와 타자기가 매달려 있으며, 탈옥수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벽화가 공개되자 현지 언론에서는 뱅크시가 그린 것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됐지만, 뱅크시가 직접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Create Escape’ 코멘트와 함께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며 일단락됐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영상의 초반부와 후반부, 그리고 내레이션에 밥 로스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밥 로스는 과거 1983년에 방영했던 TV프로그램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끈 화가로, 국내에서도 ‘밥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손쉽게 그림을 완성하고는 “어때요, 참 쉽죠?”, “여러분도 따라 해보세요!”라고 마무리하는 그의 말버릇은 온라인상에서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덧붙여 뱅크시가 제작 과정과 밥 로스의 영상을 교차 편집한 것은 일종의 ‘패러디‘이자 ‘존경의 표시’로 해석된다.

뱅크시 인스타그램 영상 바로보기

또한 외신들은 벽화 속 탈옥수가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오스카 와일드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교도소는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를 이유로 1895년부터 1897까지 수감됐던 곳이다. 그는 귀족인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동성애가 알려진 뒤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외설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한 바 있다. 이후 와일드는 감옥에서 나온 뒤 자신의 수인번호 ‘C. 3. 3.’를 필명으로 <레딩 감옥의 노래〉라는 책을 냈는데, 감옥에서 겪은 고된 노동과 고립된 생활, 그리고 수감 동료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내용을 담은 시들로 형벌이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한 지를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타자기를 통해 탈출하는 이 벽화를 놓고 한 갤러리 관계자는 BBC와 인터뷰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신랄하다”라고 평가했다. 레딩시는 지난해부터 해당 교도소를 포함한 지역 일대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뱅크시의 벽화가 등장한 첫날부터 교도소 인근은 이를 감상하고 사진을 찍는 주민들로 붐비고 있다. 이에 레딩시의 한 의원은 “뱅크시에게 레딩 교도소를 살리려는 캠페인을 지지해 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면서 “이 독특한 역사적 건물은 미래 세대들을 위해 보존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뱅크시가 레딩시의 캠페인을 지지하는 제스처로 벽화를 그린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평생에 걸친 로맨스의 시작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오스카 와일드의 생애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에디터
    글 / 주현욱(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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