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우리의 분노는 정의가 아니다

2021.06.15GQ

“언론도 그렇고 네티즌도 그렇고, 누군가를 스타로 만드는 것보다 추락시키는 것에서 자신의 힘을 느끼는 것 같아요.” 윤종신이 한 말이다. 반박이 불가하다.

세상이 온통 화가 나 있다. 분노와 조롱과 혐오가 전염병처럼 번진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유명인의 확인되지 않은 사생활을 전시해 폭격 수준으로 씹어댄다. 자칭 정론지라는 신문들에도 비판을 가장한 비난이 넘친다. 인터넷 댓글 창은 인신공격으로 만신창이다. 누군가를 재기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짓밟아야 끝난 것 같은 헐뜯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마침 tvN <알쓸범잡>에서 윤종신은 이렇게 말했다. “언론도 그렇고 네티즌도 그렇고, 누군가를 추앙해 스타로 만드는 것보다 추락시키는 것에서 자신의 힘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걸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의 주옥같은 노래 가사들만큼이나 귀에 박히는 말이다. 하나도 틀린 게 없어서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독일어가 있다. 타인의 불행을 은밀히 즐기는 심술궂은 심리다. 우리나라에선 한 단어로 번역할 수 없다. 한민족 DNA에는 이런 호박씨 까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까. 애써 모른 척해 온 감정이기에 규정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샤덴프로이데를 내재화하도록 부추겨왔다. 학교에 입학해 순위가 매겨진 성적표를 받아드는 순간 예감한다. 인생은 누군가가 오르면 누군가가 떨어지는 제로섬 게임임을. 딸려 오는 건 타인과의 비교다. 쟤는 어느 대학에 갔더라, 걔는 연봉이 얼마라더라, 옆집 애는 부동산으로 대박 났다며? 괜히 의기소침해진다. 뒤처질까 두렵다. 타인의 행복보다 불행에 더 솔깃해하는 건 어쩌면 경쟁 사회의 본능이다.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H. 스미스는 <쌤통의 심리학>(2015)에서 “높은 지위와 그 즐거움을 얻는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들, 특히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지위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반사이익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쾌감을 안기는 것이다. 부와 명예를 갖춘 유명인의 신화가 고꾸라질 만한 논란이 터지면, 사람들은 완벽하다 여겼던 그의 본질을 의심하고 생각한다. 너도 우리와 다를 바 없구나. 추앙받는 이의 삶을 끌어내리며 열등감을 해소한다.

우린 타인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감정이 악마적임을 직감으로 알고 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을 선뜻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사악한 즐거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종 정의라는 이름과 결탁한다. 웹상에서 활동하는 자경단이 이 중 하나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 판단되는 인물의 신상 정보를 털어서 공개 처형한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세심하게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인해 불똥이 애꿎은 사람들에게 튀기도 하니까. 일례로, 성범죄자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사이트인 ‘디지털교도소’에 무고하게 낙인찍힌 한 대학생은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추락시키는 것을 힘이라 생각’하는 그릇된 믿음이 낳은 비극이다.

주로 키보드 뒤에 숨어 활동해온 자경단은 언제부터인가 가면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유튜브 출현 시기와 맞물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튜브가 돈벌이가 되는 시대와 겹친다. 가까운 예로 조두순이 떠오른다. 조두순 출소 당일 조두순 주거지 골목은 취재진과 경찰, 그리고 유튜버들로 뒤섞여 아수라장이 됐다. 유튜브에는 조두순 관련 콘텐츠가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주민들은 몰려오는 외지인 탓에 정상 생활을 할 수 없다며 민원을 제기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유튜버들은 ‘악에 대한 응징이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조두순 거주지로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인근 건물 옥상에 무단으로 올라가 촬영하고, 근처 가게들의 상호를 노출시키는 게 어떤 공익을 위한 것인가. 그사이 조두순 얼굴이 그려진 후드티를 판매하려는 업체가 등장했다가 철회했다. 분노를 상품으로 팔아서 남는 것은 정의인가. 아니다. 조회 수 증가와 쌓이는 포인트와 유튜브 수익이다. 사람들은 이를 ‘조두순 코인’이라 명명했다.

타인에 대한 평가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연예인은 동네북이고, 그들의 추문은 먹잇감이다. 모 남자 배우의 촬영장에서의 불성실한 태도가 뒤늦게 논란이 됐다. 현장에서 파트너와의 스킨십을 거부하고 대본 수정을 요구하는 등 무례한 태도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여자친구인 모 배우의 지령 때문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진실은 확인할 수 없다. 어디에서 입수했는지 심증만 가득한 과거 연인의 카카오톡 내용이 등장할 뿐이다. 이것이 국민의 알 권리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보도한 매체는 히트를 친다. 가십은 또 다른 가십으로 확장된다. 그 여자 배우에게 휘둘린 남자 연예인이 한둘이 아니래. 졸지에 여배우와 호흡을 맞췄던 남자 배우들과 과거 촬영장 영상이 줄소환된다. 여배우에게 무심한 듯 보이는 스타에겐 ‘철벽남’, ‘명품 안목’이란 타이틀이 부여되기도 한다. 추문의 대상을 나락으로 밀어 버리면서 또 다른 스타를 우상화하는 걸 보면, 여기 이 세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 굴 속 세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 언론이 잘하는 건 여론전이다. 언론은 대중이 무엇에 쉽게 분기탱천하는지 파악하고 있다. 어떤 단어로 기사 제목을 뽑아야 조회 수가 치솟는지도 잘 안다. 언론이 종종 노리는 건 ‘진실’이 아니라 ‘감정’이다. 감정을 부추겨서 진실을 호도한다. 타인의 불행을 부풀리는 데 언론이 얼마나 자주 나팔수 역할을 해 왔나. 지난 2010년 사회를 달군 타블로 끌어내리기 사건 배후엔 철저한 확인 규명 없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논란을 확대 재생산한 언론이 있었음을 우린 목격했다. 반대 진영 인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낯부끄러운 논리라도 가져와서 의혹을 부풀리는 모습도 익숙한 레퍼토리다.

타인의 비극을 소비하고 추락시키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건 한국 사회의 슬픔이다. 사회가 개개인에게 충분한 성취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니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걸, 그러니까 사회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절감하는 하 수상한 시절이기도 하다. 세상일에 신경 끄고 소신대로 살기엔 집값이 들썩, 주식도 너무 들썩, 비트코인은 미치게 오락가락한다. 가만히 있다간 ‘벼락 거지’ 소리 듣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1년 꼬박 모은 월급보다 부동산으로 몇 달에 몇억 버는 이들을 보며 열패감을 느낀다.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이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아이 낳는 걸 포기한다. 가진 자들의 갑질과 허물에 관대한 수사기관에 거대한 벽을 느낀다.

불공정 사회에 대한 피로감,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 믿었던 것들에 대한 배반감, 부에 대한 선망과 가난을 향한 혐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박탈감…. 지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건 원초적 감정들이다. 길 잃은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분노가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는데 분출할 곳은 마땅찮은 사회이다 보니, 타인에 대한 비난도 횡횡할 수밖에 없다. 누구든 눈 밖에 나면 땅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심리도 강해진다. 이 과정엔 희생양이 동반된다. 희생양 만들기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다만 중세시대 마녀사냥이 광기에서 왔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마녀사냥은 분노에서 온다는 점에서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사회가 읽힌다. 잊지 말아야 하는 건, 그 분노가 당신을 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정시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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