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 '맷 데이먼'의 이야기 | 지큐 코리아 (GQ Korea)

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 ‘맷 데이먼’의 이야기

2021-10-26T18:13:33+00:00 |interview|

맷 데이먼은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빈티지 셔츠, 스톡 빈티지. 쇼트 팬츠, 폴로 랄프 로렌. 선글라스, 자크 마리 마지. 시계, 파텍 필립 at FD 갤러리.

말리부에 있는 시푸드 프레시 피시 마켓 & 패티오 카페 뒤편 벤치에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패시픽 코스트 고속도로를 따라 드론이 가르는 따뜻한 바닷바람과 저 너머에 부서지는 파도 위에 둥둥 떠 있는 그 누구도, 두 번 돌아보게 만드는 뻔한 장치들을 눈치채지 못한다. “보노가 길 건너에 살았는데…”, “언제라고 명확하게 꼽기는 어렵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보니 제가 그런 배우가…”, “최근 며칠 동안의 촬영이 중단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맷 데이먼은 약속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한 대신 거의 모든 것에 대해 2시간 동안 떠들다가 떠났다. 마스크를 쓴 게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의 열두 살 난 딸 지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그는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약간 미열이 있는 것말곤 증상이 없는 딸은 그녀의 침실에 격리되고 온 가족은 18시간 간격으로 PCR 검사를 받고 있는데, 나머지 가족들은 현재까지 모두 음성이다. 우린 대각선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는 식으로 조심했고, 이건 우리의 어색함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가 공유하지 않기로 신중하게 결정한 인생의 몇몇 이야기는 절대 말하지 않도록 잘 가공된 셀러브리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남자는 그렇게 절제된 방향에는 아예 가깝지도 않을 정도로 매우 직설적이었다.
데이먼 가족은 올해 상반기를 호주 자연 보호 구역 안에서 보냈는데, 약 3주 전에 필연적 이유로 인해 북반구로 돌아왔다. “회오리바람이었어요.” 그가 말을 시작했을 때, 그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그를 강타했는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지역의 상대적인 고요를 거쳐 LA로 또 프랑스로….” 프랑스는 칸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기 말리부로 돌아왔죠. 아시다시피 이런 일들을 해결할 땐”, 이런 일들이란 가족이 아프고, 걱정이 많고,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일들을 말한다. “마치 0에서 100을 오가는 것 같아요. 전 세상과의 재결합에 잠시 들떠 있었는데, 세상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는지를 약간 잊고 있었던 것 같아요.”
데이먼은 새 영화 <스틸워터> 홍보차 프랑스 칸 영화제를 방문했다. 데이먼이 세상과 다시 교감하면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징후는 <스틸워터>의 시사회 직후에 나타났다. 데이먼이 울음을 터뜨렸다는 뉴스가 널리 보도됐다. 그는 당시 자기가 눈물이 차올랐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잘 우는 편이세요? “슬프게도요. 그렇습니다. 지난 몇 년간 특히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쉽게 그렇게 되네요. 전 한 번도 ‘저 사람 또 저러네?’ 같은 부류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금방 질리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요, 특히 남자들이요, 적어도 제 인생 주위에선 사람들이 좀 더 빨리 눈물을 보이게 되더라고요.” 제 생각엔 그들이 울지 않으려고 미치게 노력한 것 같은데요. “아주 그냥 빌어먹을 수십 년 동안요! 그러다 이제 ‘에이 망할, 더 이상 신경 안 쓸거야’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데이먼은 경력 초창기에 그가 울고 말았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 <굿 윌 헌팅>의 이야기는 이제 할리우드의 전설이 됐다. 보스턴 출신의 두 십 대 소년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은 둘 다 배우 커리어를 막 시작한 상태였고 모든 고생을 같이 헤쳐 나가던 중이었다. 그들은 이십 대 초반에 주어진 기회가 너무 적었음에 좌절했으며, 유일한 돌파구는 자신들이 직접 출연할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었다. 데이먼과 애플렉은 보스턴 출신의 불우한 반항아 천재 소년에 대한 스크립트를 쓰는 데 2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출연해 막대한 캐스팅 및 출연료를 아끼려는 의지는 결과적으로 데이먼이 첫 번째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오르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데이먼을 베스트 각본상 수상자 중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자란 기록을 남겼다.(최연소자는 데이먼과 공동 수상한 벤 애플렉이었다.) 데이먼의 눈물은 촬영 첫날 터졌다. 카메라 앞에는 로빈 윌리엄스와 스텔란 스카스 가드가 서 있었다. 데이먼과 애플렉은 앉아서 그들을 지켜봤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 중 하나였어요. 배우들을 보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가 쓴 대본을 말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환장할 것 같더라고요. 그건 기쁨과 믿을 수 없는 기분 사이 어딘가였어요. 그리고 안도감, 또 감사함. 정말 멋진 순간이었어요. 전 그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팬데믹에 접어들던 2020년 초, 맷 데이먼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준비되어 있었다고 할 순 없지만, 지극히 할리우드적인 이유로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2011년에 그가 출연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은 여러 면에서 놀랍도록 정확한 현실의 미리보기 같은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데이먼은 각본을 쓴 스콘 번스, 영화의 과학 기술 고문이었던 바이러스 학자 이안 립킨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영화 이후로도 몇 년간 전염병 같은 위협적인 것들이 유행할 때마다 데이먼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그들에게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다. 처음 중국 우한에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때 데이먼은 번즈에게 연락해 립킨이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아냐, 이번 건 진짜야.” 번즈가 그렇게 말했다고 데이먼은 기억한다. “기하급수적이야. 2주 안에 세계는 완전히 달라질 거야.” 그때 데이먼은 프랑스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과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를 촬영 중이었다. 큰 야외 촬영을 앞두고, 프로덕션팀은 아일랜드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 3월 초, 로케이션을 이동하기 바로 전날, 촬영 일정은 전면 중단됐다.
첫째를 제외한 세 아이와 데이먼의 아내는 그와 함께 프랑스에 머무르고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촬영팀과 전용기를 타고 아일랜드에 가서 촬영 재개를 기다릴 것인지 고민하다 그들은 아일랜드를 선택했다. 여러 면에서 그 결정은 유효했다. “우린 아주 운이 좋았어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형태로 자가 격리를 했던 거죠.” 아일랜드 달키 해안가에는 그들이 머물렀던 집 외에도 출연진과 제작진을 위한 집들이 이미 임대되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꽤 많은 곳이 비어 있었다. 데이먼의 아이들과 함께 여행 중이던 개인 교사가 있었기에 매일 아이들이 걸어갈 수 있는 그들만을 위한 학교가 차려졌다. 데이먼의 어시스턴트와 트레이너도 공간을 하나씩 가졌다. 그들이 임대한 사유지 2킬로미터 안에서는 이동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데이먼 가족은 바다 수영을 하고, 아일랜드 시골길을 하이킹했다. 세상 밖에 머무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고요했죠. 대본 보내는 사람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고 답을 보내줘야 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냥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운동하고, 걷고, 정말 심플한 날들이었죠. 완전히 눈이 뜨이는, 진보적인, 그러니까 제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어요.”
한편 세계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보다 젊은 데이먼이 팬데믹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느라 <컨테이젼>은 다시 인기를 끌었다. 놀랍게도 데이먼 자신까지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애플TV 플러스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이 영화가 거기 떡하니 있더라고요. 사람들은 정보에 목이 말랐을 거예요. 초기에 퍼진 이야기들은 굉장히 무서운 것들 뿐이었잖아요. 아마 저도 사람들과 똑같은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상태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을 거예요.”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약간 긍정적인 방향으로 놀랐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상황이 낫더라고요. 처음 개봉했을 때는 공상과학영화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실제보다 덜 설득력 있게 보였어요.”
데이먼과 그의 가족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2020년 봄, 발칵 뒤집힌 세상에서 <뉴욕 타임스>는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단독 보도했다. “아일랜드 바닷가 시골마을이 맷 데이먼을 받아줬다”는 제목과 함께 데이먼이 동네 마트에서 장보는 사진 등을 게재하며, “그가 이미 이웃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적었다. 데이먼이 저녁 시간 맥주를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 나오는 슈퍼마켓 사진은 스타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촉발했다.
나는 데이먼의 이웃 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미국 영화배우가 난데없이 나타나 일상생활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투덜댔다. “나는 그 마을 바로 옆 동네에서 30년을 살았어요. 그 자식이 거기 3개월을 살더니 아주 달키의 왕이 됐더라고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비닐봉다리를 들고 사진이나 찍히고, 인간적이라면서 사람들이 그를 아주 좋아하더군요. 아주 거슬렸어요.”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밴드 U2의 리더 보노다. “30년간 내가 이 어촌마을에 엄청나게 고기를 풀었는데, 갑자기 웬 어부놈이 와서 모든 인기를 가져갔다고요!” 이 말은 당연히 장난이다. 데이먼과 보노는 오랜 친구다. 데이먼에 따르면, 데이먼의 성인기에서 연기와 가족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국제기구 water.org를 설립하는 데 보노가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이먼은 보노의 자선단체와 함께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기로 했고 적절한 시기를 타진 중이었다. “그가 내게 전화를 걸었길래 제가 ‘아니, 간다고. 갈 거야’라고 했더니 그가 ‘됐고, 지금 가야 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시 ‘아니, 잠깐만. 내 아내가 임신 중이야’라고 하자 그는 ‘이유는 언제나 생겨. 그러니까 지금 가야 돼’라고 말하더군요. 결과적으로 그가 옳았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제가 시작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죠. 제가 거기에 참여하기 전까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다는 걸 그는 알았던 거예요.”(물론 이 대목에 대해 보노는 “데이먼이 날 너무 추켜세웠다” 며, “그러나 데이먼의 업적들을 칭찬한다. 그는 나보다 더 섬세하고, 덜 자극적이며, 무엇보다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대답했다.)
“이 전화를 받은 후 한 시간 동안 그에 대해 생각했어요.” 보노가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난 그에게 이 세계가 원하는 뭔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는 자유를 갖고 있어요. 가장 멋진 거잖아요. 그리고 소위 유명한 사람 중에 그 자유로움을 가진 자는 굉장히 드물어요. 그는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생계를 책임지는 남자 중에 그렇게 자의식이 없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무슨 말이냐면, 저는 자유롭지만 자의식은 과잉이에요. 제가 신문 판매원이 된다고 치면, 저는 신문 판매원인 척하려는 제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맷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그 사람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세요? 너무 잘하면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엔 가끔 있잖아요. 셀럽이 되는 것도 그중 하나예요.” 나는 보노에게 데이먼이 ‘셀러브리티 되기’를 가장 멋진 방식으로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네, 사실일 거예요. 그는 프로가 아니에요. 그 이상이죠. 셀럽처럼 구는 데는 아마추어에요. 그는 인간과 생명을 존중하고 그걸 아낌없이 표현합니다. 맷 데이먼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핵심이죠. 그는 언제나 쓸모 있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해요.”

데이먼이 영화화를 앞둔, 14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어둡고 극적인 에피소드가 펼쳐지는 에릭 재거의 책 <라스트 듀얼>을 읽으라는 권유를 받은 건 2011년이다. 그는 거절했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이미 영화화할 권리를 가졌단 말을 듣고는 “마틴이라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하고 찍을 거야”라고 말하며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판권이 다시 사용 가능해지자 데이먼은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처음엔 20페이지쯤 넘겼을 때 이건 못 하겠다고 생각했죠. 인물들은 절대적인 야만인이었고 사람들은 백년전쟁 한가운데에 태어나서 평생 강간, 약탈, 전쟁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그를 사로잡았다. “자길 향한 평판의 위협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알리는 여성의 이야기가 놀라웠어요.” 그는 <마션>으로 성공적인 협업을 했던 리들리 스콧에게 이 책을 보냈고, 스콧은 그의 열정에 응답했다. 이제 그들에겐 대본이 필요했다.
어느 저녁, 데이먼은 벤 애플렉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십 대 때부터 친구였던 그들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할리우드식 친구 관계를 훌쩍 뛰어넘는 진정한 형태의 가까운 사이를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다. “전 그와 공개석상에서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 우정은 너무 소중해서 경력이나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것보다 제 삶에서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거든요.” 두 사람은 공동 제작사를 운영하며 직장 동료로 남아 있지만, <굿 윌 헌팅>이 오스카를 수상한 후 다른 공동 대본 작업을 시도한 적이 없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꿈꿔왔던 모든 것을 해내느라 바빴다. 그리고 또 그때처럼 같은 일을 하기엔 너무 피곤할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스무 살, 스물두 살이었을 때는 각본 과정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그때 우린 직업도 없었고 딱히 할 일도 없었죠. 우린 2년간 초고를 쓰고 또 고치고 고치다 맥주를 마시고 원고에 대해 얘기하고, 비디오 게임 좀 하다가 헛소리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애플렉이 회상한다. “우리는 그 캐릭터를 완벽하게 이해했을 때 그 인물을 어느 시나리오에 넣어도 말이 되게 만들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쓰는 건 정말 비효율적인 방식이었죠. 우린 둘 다 이 방식으로 다시는 작업할 수 없을 거란 걸 직관적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날 저녁 데이먼은 애플렉에게 <라스트 듀얼>에 대해 이야기했고, 식사가 끝날 땐 책을 빌려줬다. “요즘 벤은 술을 끊었어요. 그리고 그는 뭔가 제대로 할 땐 정말 체계적인 인간이에요. 그런 그가 다음 날 아침 7시에 전화를 걸어 이러더군요. ‘우리가 이걸 써야겠어’라고요.”
그날 애플렉은 새벽 3시까지 그 책을 완독했다. 이전에 데이먼이 작품에 대해 의견을 구할 때 애플렉이 항상 그 정도로 열정적인 관심을 보였던 건 아니다. “갑자기 아주 분명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야 할지 확실히 알 것 같았어요. 전 데이먼과 이 내용을 공유하고 얘기를 끝내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점점 바빠졌고 그를 필요로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더라고요.” 애플렉은 데이먼을 집중시킬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고, 행동 계획을 세웠다. 데이먼은 말한다. “우리의 생활 패턴에 정말 잘 맞더라고요. 아침에 애들을 챙겨서 내보내고 집안일을 해치운 다음, 아주 편안한 근무 환경에서 만나 4~5시간 동안 바짝 일을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가정의 의무를 다하는 거였어요.” 그러나 이 루틴 외에도 그들은 다른 뭔가가 필요함을 이내 깨달았다. 데이먼의 초기 제안은 주인공의 이야기가 다양한 관점에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학대받은 아 내 이야기를 그들은 결코 할 수 없는 다른 형태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감독이자 작가인 니콜 홀로프세너 Nicole Holofcener를 협업 상대로 데려왔다. 홀로프세너는 이 작품이 훌륭한 이야기, 독보적인 이야기 그리고 얼마나 페미니스트적인 이야기인지에 대해 말한다. 데이먼은 완성된 시나리오에 대해 이런 말을 덧붙인다. “만약 <용서받지 못한 자>가 반서부적인 서부극이라면, 이 작품은 반기사도적인 기사도 영화입니다. 정말 좋은 영화예요. 우리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보는지 볼 겁니다.”
이제 데이먼과 애플렉은 앞으로 더 자주 협업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선 <라스트 듀얼> 이후 결정된 차기작은 없다. 데이먼은 올해의 남은 시간은 뉴욕의 침대에서 보내고 싶어 한다. 내년 봄쯤 할 만한 적당한 작품이 있다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고, 없다면 안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다 보면 언젠가는 결국 감독도 하게 될 것이다. 그에겐 벌써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존 크래신스키와 함께 쓴 <프라미스드 랜드>, 그리고 역시 크래신스키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한 아이디어로부터 나온 영화 <맨체스 터 바이 더 씨>를 감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가 케네스 로너건이 그들의 의뢰로 약간 각색한 각본을 받아본 데이먼은 로너건이 감독해야 함을 확신했다.(영화 제작자로서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은 자신을 감독 자리에서 해고한 것이라는 농담을 맷은 좋아한다.)

팬데믹과 무관하게 맷 데이먼이 일을 중단한 2016년부터 2018년 여름까지 18개월 넘는 휴식기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 병을 앓고 있을 때 그는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병원에 있는 동안 데이먼은 매일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아파트 바로 길 건너에 아파트를 얻었어요. 아버지가 건강한 날은 그가 우리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왔고, 그렇지 못한 날은 우리가 아버지 집으로 갔죠.”
그의 아버지는 다발성골수종으로 2017년에 사망했다. 같은 시기 데이먼의 삶의 궤도는 완전히 다른 사건으로 흠씬 두드려맞았다. 그 시점까지 데이먼의 커리어는 별로 굴곡이 없었다. 그의 가장 매력적인 모습을 세상에 내놓는 것을 마스터한 사람처럼 보였고, 세계는 그의 노력에 정당하게 반응했다. 바로 그 일이 있기 전까진. 알렉산더 페인이 감독한 <다운사이징>을 홍보하기 위해 데이먼은 <팝콘 위드 피터 트레블러>에 출연했다. 출연분은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날 아침에 ABC에서 방송될 예정이었다. 트레블러는 할리우드를 휩쓸고 있던 #미투에 대해 일련의 질문을 했다. 데이먼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답을 자신이 갖고 있다는 듯, 자신도 그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고 감사할 것이라고 주제넘은 유명인처럼 대답했다. “우리 모두는 가끔 끔찍하게 모든 걸 망쳐버리기도 하잖아요. 최선을 다했어도 가끔은 최악의 실수를 한다고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오래된 친구 하나가 사건 이후 데이먼에게 즉각적인 응대를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녀가 ‘반응하지 마. 난 좋은 사람이라고 항변하고 싶겠지. 하지 마. 최소한 한 달은 그냥 조용히 하고 들어. 네가 한 말의 반대 입장을 듣고 네가 사람들을 왜 화나게 했는지를 이해하려고 해봐’라고 조언했고 전 그렇게 했어요. 진짜로 이해하려고 할 때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내가 한 말을 옮기고, 내가 성폭행 상황에 대해 남성 중심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갔어요. ‘내가 저랬구나. 나는 전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어. 여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못 했어…’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전 저와 더 공통점이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더 가까운 사람들과 공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나리오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런 상황에 연루된 적 있는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한 달여가 흐른 후 water.org의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데이먼은 짧게 언급했다. “더 이상 누구도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정말로 죄송하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그는 사라졌다. 데이먼의 아내가 호주로 가자고 제안했다. 몇 달 동안 데이먼 가족은 여행을 하고 캠핑을 다니고 해변과 섬을 찾아다니다가 바이런 베이에 있는 근거지로 돌아오곤 했다. 거긴 동정심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 햄스워스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거대한 서포트가 되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여가 흘렀지만 데이먼은 언제 다시 복귀할지 자신도 몰랐다. 마침내 그를 움직이게 한 대본이 나타났다. <포드 V 페라리>. 하지만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전환기는 데이먼이 예상했던 것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그는 전직 레이서이자 레이싱카 디자이너가 된 캐럴 셸비를 연기했다. “뭘 해도 제대로 맞는 느낌이 없었어요. 전 누구에게나 뭐든지 팔 수 있는 남자를 연기해야 했지만, 난 누구한테도 아무것도 팔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실제로 그랬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내가 아직 일할 준비가 안 됐구나. 여름이었고 섭씨 40도가 넘는 날씨였는데, 한 열 걸음 걸으니 이미 발에 물집이 생겨버린 부츠를 신고 카우보이 모자에 머리를 꽁꽁 동여매고는 트레일러 밖으로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들지 않았지만 그런 척했어요. 머리 속엔 ‘정말 거지 같은 일이군’이란 생각뿐이었죠.”
그 거지 같은 일이라는 게 연기를 의미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냥 모든 것이요. 내가 평생 이걸 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더군요.” 그는 열아홉 살의 자신을 회상한다. 경력 고작 두 번 만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인’ 크리스천 베일과 함께 촬영을 하게 됐다. 그가 그 작품을 수락한 이유도 베일 때문이었다. 6개월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110킬로그램이던 베일은 촬영이 시작될 때 77킬로그램이 되어서 나타났다. “햇볕에 약간 그을린 그가 마치 평생 그 작업복을 입어온 사람처럼 당연하게 옷을 걸치고 구겨진 모자를 쓰고 있더라고요. 그건 디테일에 관한 얘기였죠. 미치게 아름답더군요. ‘그래, 이래서 우리가 이걸 하는 거야. 내 평생 할 만한 멋진 일이야. 왜냐면 우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거든. 가장 인간적인 거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야기를 하려거든, 제대로 해야 해요.” 그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맷 데이먼이었고,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맷 데이먼은 소셜 미디어를 받아들인 적이 없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안 하길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저와 페이스북에서 연결되고 싶어 하는 건 알지만, 제 인생은 이미 충분하고 진짜로 내가 교류하고 싶은 사람들과는 모두 이미 연결되어 있어요. 제가 뭔가에 대해서 자동반사적으로 내뱉은 코멘트가 전 세계에 퍼뜨려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데이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적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갖고 있다”고 슬쩍 말한다. 친구의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거나 아주 드물게 포스팅하기 위해서 말이다. 뭘 올리냐고 물었더니 그는 놀랍게도자신의 휴대 전화를 꺼낸다. “보여줄게요.” 앱을 열고 그는 자기 계정의 정보를 읊는다. “76명의 팔로워가 있고 2013년부터 지금까지 40개의 포스팅을 했네요.” 그러고는 가장 최근 사진을 보여준다. 열다섯 살이 된 이사벨라의 생일 파티 사진이다. 사진 속 소녀는 카메라와 아버지를 바라보며 V를 그리고 있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 이후, 또 새로운 사건이 데이먼을 안전함과 개방성 사이에서 표류하게 만들었다. 영국 신문 <더 선데이 타임즈>에 따르면 맷 데이먼이 식사 자리에서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속어 ‘fa***t’을 사용했고 불쾌감을 느낀 딸이 자리를 떴다고 했다. 데이먼은 이 루머를 인정했으며, 딸이 옳았고 다시는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가 어떻게 계속 배우고 적응하고 경청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 했지만, 대중들에게 전달된 메시지는 완전히 달랐다. 맷 데이먼은 몇 달 전까지 저런 비속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불리한 보도가 이어졌고, 데이먼이 “개인적인 깨달음을 거쳤고, 어떤 형태의 은어도 즐겨 사용하지 않으며,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성명을 냈음에도 이 사건은 많은 불편함과 혼란을 야기했다. 나는 이것에 대해 그와 좀 더 대화를 나누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브루클린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마지막에 우리가 나눈 얘기들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그에게 잘못 알려진 것들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그때 2017년 자신의 실수를 다시 한번 언급했다. “내가 느껴본 적 없는 다른 누군가로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디어는 정말 강력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관심의 소방 호스가 압도해버리죠. 좋은 일로 주목받는다 해도 엄청난 일이에요. 어떤 이들은 그걸 사랑하고 원하고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아요. 그에 대해서 제가 뭐라 판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방식은 아닙니다. 전 그런 사람이 못 돼요. 그냥 저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 외의 것들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