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좋아하던 육준서는 왜 군인을 택한 걸까 | 지큐 코리아 (GQ Korea)

그림을 좋아하던 육준서는 왜 군인을 택한 걸까

2021-11-24T18:42:37+00:00 |interview|

“지금까지는 실험에 지나지 않아요.” 육준서가 어둠을 비집고 나섰다.

GQ 준서 씨가 그린 작품을 보고 난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JS 조금 어렵다는 평, ‘난해하다’, ‘세다’가 주된 평가고, 순화해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일반적이지 않아서 재밌네’ 반응해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GQ 준서 씨가 처음 연기에 도전한 펍지유니버스의 단편 <붉은 얼굴>에서 기자가 극 중 화가 오준서에게 물은 질문이었잖아요. 답이 비슷하네요. 당시 대사는 이랬죠. “대부분 조심스러워하세요.”
JS 그 질문이 생각났어요. 실제로 <붉은 얼굴> 대본에 진짜 육준서가 할 법한 얘기와 생각이 반영됐어요. 시나리오 작가님, 프로덕션 팀과 편하게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그러면서 정리된 작품이거든요. 전반적으로 <붉은 얼굴>의 오준서와 육준서는 같은 결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육준서에서 성만 바꼈어요.
GQ 이런 비하인드를 몰랐는데도 인물과 인물이 겹쳐 보였어요. 극 중 오준서가 그리는 작품이 육준서씨가 과거에 그렸던 그림 ‘Red Portrait’(2020)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고.
JS 펍지유니버스에서 제게 무언가 같이 해보자 제안하실 때 레퍼런스로 제시하셨던 게 저의 ‘Red Portrait’, ‘Red Face’라고 하는 그 그림이었어요. 그런 형식으로 그림을 그려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편안하게, 여타 다른 협업과는 다른 느낌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GQ 저는 ‘Red Portrait’를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우울하다. 슬프다. 밀폐돼 있다. 무언가 발산하려고 하는데 억눌려 있다.
JS 정말 그럴 때 나온 작업이에요. 제가 제대하고 나서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던 계기가 후원자를 만난 거였어요. 달마다 작업비를 지원해주셔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작업할 수 있었는데, 상황은 나아지려고 하는데 제 작업 안에서의 퀄리티라든가 디테일한 부분은 그냥 똑같은 거예요. 자기 복제가 심했고 그런 매너리즘에 빠진 상태였어요. 그걸 이겨보고 싶었지만 어려움을 많이 느꼈고. 어쩌다 보니까 전시는 잡혀 있어서 그리는데,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딜레마적인 부분이 부딪힐 때 나온 작업이라서 그런 답답함이 반영됐다고 생각해요, 정말.
GQ 물감에 분노가 섞여 있었군요.
JS 네. 제가 바라는 이상향이 있다면 그에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 혐오는 세지고 자존감은 낮아지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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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혹시 후원자와는 어떤 계기로 닿게 됐어요?
JS 제 그림을 하나 구매해주시면서 따로 프로젝트를 제안하셨어요. ‘자가격리 프로젝트’라고,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격리를 경험해보면서 팬데믹 상황을 직접 느끼는 창작 활동이었는데, 그 프로젝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고미술을 전공하신 박사님이에요. 단순히 돈을 주고 그림을 구매해서 “힘내” 하는 차원이 아니라, 제가 비전공자로서 어떤 고찰이나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필드에서 뛰면서 제대로 배울 시기가 없었는데 그런 부족한 부분을 멘토링 식으로 많이 알려주시니까 제게는 금액적인 것을 넘어서는 훨씬 더 대단한 의미의 후원이죠. 후원자인 동시에 저의 은사님이세요.
GQ 연결고리가 된 작품이 혹시 ‘허상’(2018)이었나요? 준서 씨가 전업 미술인으로서 그린 첫 작품이자 처음으로 판매된 그림이잖아요.
JS 맞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죠. ‘허상’은 제대하고 나서 처음으로 단체전에 참여했을 때 출품한 작품이고요, 제가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만들어준 첫 번째 도약점이었습니다. 지금은, 뛰어넘어야 하는 지표가 되기도 하지만.
GQ 뛰어넘어야 하는 지표.
JS ‘허상’ 이후에 더 나은 걸 만들었다는 생각이 없거든요. 그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색을 쓰고, 아무 부담없이 만든 작품이라서 지금 재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있어요. 여러모로. 그리고 또, 처음 전시회에 출품한 그런 점을 다 떠나서 저희 아버지가 도와주신 작품이거든요. 작품 프레임을 아버지께서 짜주셨어요.
GQ 아버지가 가구를 만드신다고 알고 있어요.
JS 목가구를 하시는데, 아버지가 먼저 액자가 있어야 한다며 프레임을 짜주셨어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이 어디 가서 쪽팔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말씀하신 거였을텐데, 전 너무나 감사했죠. 고마웠죠. 부자간에 그런 커뮤니케이션이 직접적으로 이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데면데면한 사이였거든요.
GQ 육준서 작가의 그림에는 분출하고 표출하고 싶은 강한 감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그건 가족이라든지, 세상이라든지,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는 하나의 관문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JS 맞아요. 그림은 하나의 매개체 같아요. 저는 창작을 하면서 진짜 많은 걸 느낍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확인하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되지, 여러모로 많은 걸 느끼고 있어요. 본질적인 건 제가 무엇보다 하고 싶어 하는, 꿈꾸는, 바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하는 행위라서, 결국에는 다 이어지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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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교복을 입고 군입대 체력 평가를 받으러 갔다고요. 보통 스무 살, 성인이 되길 고대하는 이유는 자유를 갈망해서잖아요. 군대는 그 대척점에 있죠. 통제되는 상황을 통해 도리어 무언가에서 도피하고 싶었나, 그림을 좋아하던 아이는 왜 군인을 택한 걸까 궁금했어요.
JS 그런 건 전혀 아니었어요. 일단 운동을 좋아했고 군인이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희 부모님께서 ‘얘가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그건 딱 봐도 아시잖아요. 어릴 때부터 모나미 볼펜 한 자루만 있어도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래서인지 화가로 먹고살 수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런가 보다, 그럼 안정적인 직업 군인이 돼야겠다, 그런데 기왕이면 제일 힘든 군대를 가는 게 좋겠다. 어린 마음에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군대에서 정년 퇴직하는 게 처음의 목적이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내가 좋아했던 게 뭘까’,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게 맞는 것 같다’란 고민을 하다가 자연스레 다시 그림을 찾게 된 거죠.
GQ 군대가 생각보다 더 힘들던가요?
JS 힘든 게 아니라, 너무 사람 사는 곳이더라고요.
GQ 오히려.
JS 막연하게 환상을 갖고 갔어요. 진취적으로 목표를 달성해나가면서 멋있게 살고 싶어서 간 곳이 특수부대인데, 일반적인 직장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빨리 나와야겠다’ 그랬습니다.
GQ 굉장히 도전적이네요. 본인을 극한 상황에 몰아 넣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오히려 더 거칠고 진취적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JS 그런데 그렇게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GQ 포장이에요?
JS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살고 있어요. <강철부대> 에서 섭외 왔을 때 몇 번이고 사양한 것도 군대가 싫어서 나온 사람이 군대팔이를 하면서 어필하는 건 너무나도 내 자신에게 별로인 행위라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때 제가 맹신하고 있는 딱 한 사람이 저를 설득했어요. 선생님. 나가야 도움이 된다고 확실하게 못 박으셔서 홧김에 “그럼 할게요”가 된 거예요.
GQ 나가야 도움이 된다는 건, 유명세에?
JS 그렇죠. 냉정하게 말해서 그게 있고 없고 차이가 제게 중요한 거죠. 왜냐면 저는 뭐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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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그럼 이건 어때요? 육준서는 늘 그림을 그려왔고 작은 카페에서 소소한 전시를 열곤 했는데, 이름이 알려지며 그림을 다르게 보는 사람이 나타나고 다양한 해석이 오가기 시작했죠. 유명인이 된 건 맞아요. 그런데 작가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JS 나는 똑같은 사람인데, 주변 환경이 달라졌을 뿐인데, 나는 달라진 게 없는 사람인데, 육준서가 작가냐 뭐냐 하면서 저를 욕하는 사람도 많이 보여요. 그런 것에 인정받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저 사람이 왜 나를 욕하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어요. 사람이 미워지려고 한 시기도 있어요. 그런데 이름이 좀 알려지면서 방송 출연도 간간히 하고, 이렇게 촬영도 하고, 새벽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삶이 지속되다 보니까 너무나 자연스럽게,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하던 시간과 내 모습이 너무 그리워지는 거예요. 그럼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릴 이유가 너무 명확한 거예요. 제가 어떤 목표를 가지기에는 충분한 거예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확실한 목표도 있어요. 지금 밝힐 수는 없는데 1년 안에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GQ 2022년의 육준서가 궁금해지네요.
JS 생각하는 대로 흔들리지 않고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GQ ‘어떻게’만큼 중요한 게 있죠. 왜. 육준서는 왜 그림을 그려요?
JS 최근에 든 생각인데 ‘아, 육준서는 정말 말이 엄청 많은 사람이다’. 말이. 하고 싶은 말이. 그런데 그게 언어로는 잘 안 나와요. 행동으로도 잘 못해요, 성격상. 점점 숨으려고 하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일 친숙한 행위였던 그림을 통해 드러내게 되나 봐요. 그렇게 출발하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을 더 뚜렷하게 구체화시키는 게 제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여지껏 했던 건 전부 실험에 지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