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아티스트 이배 "나는 실패하려고 그린다"

2022.04.04전희란

도려내어 내 안에 있는 나를 만난다. 뒤집어보면 도리어 새롭다. 아티스트 이배는 그렇게 새로움으로 고투한다.

조현화랑 전시에 선보일 새로운 ‘붓질’ 작품 앞에서, 이배.

GQ 지금 파리라면 뭐 하고 계실 시간이에요?
LB 아침 7~8시쯤이니까···. 동네 빵집에서 크루아상이나 바게트 사서 먹고, 조금 이따가 작업실에 나갈 시간이죠. 겨울이라 아직 어슴푸레한 시간이에요.
GQ 페로탕 갤러리 전시 마치고 얼마 전에 돌아오셨죠. 오프닝도, 취재 열기도 굉장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질문들 많이 받으셨어요?
LB 한국 작가로서 프랑스에 사는 일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더군요. 제가 30년동안 파리와 청도를 반반씩 오가며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한국 현대 미술 시장에 대한 질문도 많았어요. 지금 단색화 열풍을 비롯해 한국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대단해요. 갤러리에서 말하길 오프닝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더군요. 겁나더라고요.

붓질 Brush stroke-230, 2020, Charcoal ink on Paper, 258x192cm.

GQ 뜨거운 관심은 좋은 일 아닌가요?
LB 작가의 숙명인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알려지는 것도 불편하고, 너무 무명인 것도 싫고···. 작가의 삶이라고 해서 특별하지 않아요. 보편적인 삶, 어쩌면 가장 전형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부분이 작가 개개인의 내면 안에 있어요. 인생을 사는 방식이 곧 예술가의 삶이라고 할 수 있죠. 지속적으로 자기 삶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것, 세상의 평가에 휩쓸리지 않고 삶을 구축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삶은 늘 가변성을 띠고 있어서 평가라는 건 시대에 따라 바뀌어요. 지금 좋은 평가가 있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뀔 수 있죠.
GQ 인생을 사는 방식이 곧 예술가의 삶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그런데 삶은 엉망인데 작품은 인정받는 경우도 더러 있지 않나요?
LB 예술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려고 과장한 부분이 있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두 처절하고, 치열하고, 절실했어요. 예술가로서 저는 제 작품이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월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작품. 예술가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고요. 그것이 제게 커다란 퀘스천이에요.
GQ 그럼에도 당장의 세속적 평가와 멀어질 수 없는 게 작가의 숙명 같기도 해요.
LB 지금 이 말을 하면서도 내 자신이 모순되었다고 느끼지만, “당신의 그림값이 올랐다, 오를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거북할 때가 많아요. 그것이 좋은 의도라도요. 예술가가 그런 세속적인 부분에 무관심할 때 오히려 작가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고 믿는 쪽이에요.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해요.

Acrylic Medium, Charcoal black on Canvas, 162x130cm, 2018.

GQ 뭘까요? 깨어 있다는 것이란.
LB 예술가가 예술을 하는 일은 자기 허물을 벗는 일 같아요. 허물을 벗는 건, 새로워진다는 거예요. 자기를 새롭게 하려고 끝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것이 예술가의 일이라고. 그렇지 않고 무엇으로 감명을 주겠느냐고.
GQ 작가님에게 허물이라는 건 무엇이죠?
LB 딱딱한 껍데기 같은 거죠. 지난 세월 동안 쌓인 보수적인 가치관, 나를 지속시키는 권위 의식, 나에 대해 설정된 존재감. 사실 이 모든 것은 다 필요 없어요. 그보다 조금 더 자기를 정제하고, 정화시키고,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지요.
GQ 파리와 청도에 반반씩 사는 것도 삶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될 것 같아요.
LB 내 고향 청도에 온다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성묘하러 가는 것은 조상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선조의 묘지 앞에서 나를 보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여기 와 있는지. 현실 속에서는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잊기가 쉬워요. 파리에 가면, 이번에는 외부죠. 외부는 본래 무섭고 두려운 곳이에요. 환대보다는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공격을 당하기 쉬운 곳이죠. 그런데 그 외부의 내부로부터 소통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새로움이 피어나요.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끼리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일이 바로 문화예요.
GQ 만약 청도에만 사셨다면 작품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까요?
LB 그림 안 그리고 농부가 됐겠죠.(웃음) 농사를 미술처럼 했을지는 모르지만.
GQ 농사를 미술처럼 한다고요?
LB 농사짓는 것도 그림처럼 할 수 있어요. 내가 꼭 농사짓는 사람처럼 그림을 그려요. 화면을 그림의 화면으로 볼 때도 많지만 대지로 볼 때가 더 많아요. 농부의 아들이라 그런지, 거기에 뭔가를 가꾼다는 개념이 은연 중에 내게 배어있는지도 몰라요.

Issu du feu-oil pastel ch-153, Charcoal on Canvas, 162X130cm, 2020.

GQ 최근의 ‘붓질’ 시리즈에서 말씀하신 것 같은 느낌 받았어요. 그리고 붓이 방금 마른 것 같은 기운생동이 느껴졌는데, 작업하면서도 활력을 느끼시나요?
LB 그렇죠. 전에는 숯의 물성을 가지고 주로 작업했는데 점점 신체성으로 관심을 옮기고 있어요. 매일 6~7시간씩 서서 작업을 해요. 신체를 붓으로 삼기 전에 머릿속에서도 수없이 그리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붓을 들고 그리는 순간에 굉장한 신체성, 또한 정신적인 충만감도 있어야 돼요.
GQ 신체와 정신이 합치되는 순간이군요.
LB 그러려고 굉장히 애를 써요. 사실은 그게 서예예요. 정신을 신체로 표현하는 것. 오랜 수련을 통해 정신과 몸을 일치화시키는 거죠. 추사의 글씨만 봐도 리듬감과 충만감, 자연스러운 흐름이 느껴져요. 마치 어제 붓을 놓은 것처럼.
GQ 선생님의 작품은 음악, 패션, 건축 등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어요. 생동감, 리듬감이란 건 결국 영역을 넘어 느껴지는 걸까요?
LB 그렇다면 감사한 일이죠. 그냥 있는 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자꾸 해요. 나를 끊임없이 흔들어 깨워야 한다. 그게 쉽지가 않죠. 좋은 해결책 중 하나가 지속성, 일관성이에요. 다섯 번쯤 해서 안 되면 열 번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스무 번 하고, 사십 번 하고 계속 해요. 그림을 그릴 때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실패하려고 그린다, 그림을 버리러 화실에 간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나를 그 안에 계속 넣으려고 해요. 실제로는 실패인지 성공인지 몰라요.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고 방치해둔 그림이 어느 날 좋아 보일 때도 있고요.
GQ 문자 그대로 많이 버리기도 하시나요?
LB 많이 버려요. 삶이란 게 그렇듯 우연히 되는 것 빼곤, 되는 일이 잘 없어요. 될 때까지 해야 해요. 백 장 그려서 두세 장이라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온다면, 거기에 충만감이 있다면 나머지 98장은 다 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죠.

Acrylic Medium, Charcoal black on Canvas, 162.2×130.3~, 2016.

GQ 숯 작업을 30년 동안 하셨는데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어요?
LB 전시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 특히 그래요. 페로탕 전시 끝나자마자 조현화랑에서 열릴 전시를 준비 중인데,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해보려고 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나의 내면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보고 싶다는 열망과 목표가 있어요. 전시를 오픈하는 날, 어쩌면 준비하는 기간들이 나의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려고 애쓰는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이 나에게 남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숯의 작가로 알려졌지만 여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작품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것이 나의 세계성 안에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작품이었으면, 그런 고민들로 가득 차 있어요.
GQ 해왔던 것을 늘 전복시키려면 굉장히 소모적일 것 같아요.
LB 그렇죠. 존경하는 대가들은 늘 그런 것 같아요. 2019년, 허션미술관에 이우환 선생님 개인전을 보러 가서 깜짝 놀랄 만큼 감명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그분의 작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이배는 젊은 시절 7년 동안 이우환의 조수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작품 일색이었죠. 너무나 새로웠어요. 여든 중반의 대가가 완전히 청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선생은 어쩜 이렇게 머리가 말랑말랑할까. 열등감을 느낄 정도였죠. 아, 이게 바로 대가구나. 예전에 했던 거, 어제 하던 거 오늘 하는 게 아니고, 전혀 다른 걸 하는 실험 정신.

Acrylic Medium, Charcoal black on Canvas, 162.2×130.3~, 2016.

GQ 결국 청춘이란 나이의 문제가 아니군요.
LB 꿈, 열망을 가지고 실험하는 거죠.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GQ 지금 구상 중인 것은요?
LB 전시장 한 방에 어마어마하게 큰 숯 조각 설치 작품을 한 개 놓고, 천장을 꽉 채울 수 없을까, 이것이 나의 허물을 벗는 시간처럼 보이게 할 수 없을까. 내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보여주지 않으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GQ 전시 외적으로는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지 궁금해요.
LB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삶인가, 내가 없어도 이 시대는 그냥 살아지는 것인가, 혹은 시대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내가 큰 폐가 되지는 않았나···.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그런 생각 많이 하게 돼요. 얼마만큼의 삶을 여기에 더 머물지 모르지만, 늘 새로운 시간을 살아야겠다고요. 매일 새로운 시간이란 준비되지 않은 삶이니 투박할 수도 있고, 거칠 수도 있고, 굉장히 힘들겠지요. 자신을 잘 붙들지 않으면 현실은 소용돌이 쳐서 어디로 끌고 갈지 몰라요.

    피처 에디터
    전희란
    포토그래퍼
    안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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