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2022년 한국은 동성애를 둘러싼 혼란의 도가니다

2022.08.12김은희

동성 간 키스 장면 삭제부터 BL 드라마의 폭발까지. 대중문화 콘텐츠 속 동성애는 혼란스러운 PC(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의 최고 격전지다.

세상에는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가 있다. 필자가 최근 출간한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에서 소개한 소수자 유형은 총 일곱 가지다. 서울중심주의로 인해 소외된 비수도권 거주자들, 노인과 아이들, 이주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 등 이방인,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성 소수자., 이렇게 일곱이다. 여기에 학력이나 소득 등을 기준으로 또 다른 유형의 소수자를 추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여러 유형의 소수자 중 유독 대중의 애증 어린 관심을 차지하는 부류가 있다. 바로 ‘동성애’다. 애증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젊은 남자의 동성애라는 소재(이른바 BL, Boy’s Love)는 이미 고정 수요를 확보해놓은 블루오션 장르로 여겨지는 한편, 동성애가 콘텐츠에 양념처럼 뿌려지기만 해도 질색하며 비난하는 수요자도 여전히 상당하다.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는 ‘애증’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대중문화 콘텐츠 시장은 아직도 동성애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는 전통적으로 동성애자의 존재를 콘텐츠 내에서 아예 지우거나 혹은 희화화해 멸시하는 방식이 흔했다. 동성애를 삭제한 사례부터 살펴보자. 작년 2월 SBS는 설 연휴 특선 영화로 내보낸 <보헤미안 랩소디>(2018)의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의 동성 간 키스 신을 2회 삭제하고, 남성 단역 배우 사이의 키스 신 1회를 모자이크 처리했다. 논란은 퍼져나가 급기야 방영 약 일주일 뒤에는 성 소수자 시민단체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SBS는 “15세 이상 시청가로 방송하는 설 특선 영화라는 점을 고려한 편집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 영화는 12세 관람가 등급으로 9백94만 명의 흥행 기록을 갖고 있는데···? 국가인권위원회는 SBS에 대해 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지 않도록 개선을 촉구했다.
‘삭제’가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희화화’는 적극적 차별 행위다. 현재 동성애자에 대한 노골적인 희화화는 웹툰이 주도한다. 1등 웹툰으로 명성을 떨치는 <프리드로우>의 등장인물 장봉남은 격투 능력으로는 최강에 가까운 동성애 남성이다. 주로 상의를 탈의하고 삼각형을 넘어 T자에 가까운 분홍 팬티를 즐겨 입는 고등학생(현재는 성인)으로서 일관되게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분홍 팬티만 입고 나왔을 때 최고의 격투 능력을 보이는 그는, 상의를 탈의한 뇌쇄적인 포즈로 얼굴을 붉힌 채 올 만우절 이벤트에 “장봉남 일일 데이트권”으로 등장했다. 작품 밖에서조차 희화화된 게이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웹툰 시장은 여러 차례 동성애 혐오 논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차별적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협회 차원의 모니터링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재밌는데 뭐가 문제냐”는 의견 속에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는 어떨까? 과거에는 MBC <커피프린스 2호점>(2007), SBS <미남이시네요>(2009), KBS2 <성균관 스캔들>(2010)처럼 주인공 남성이 남장 여성을 남자로 착각하고 사랑에 빠져들며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을 설정하곤 했다. 이는 동성애적 묘사를 하면서도 결론에는 동성애와 거리를 두는 ‘안전한’ 방식이었다. 이런 양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변화는 대략 1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tvN <응답하라 1997>(2012), JTBC <멜로가 체질>(2019) 등 다수의 드라마에서 조연으로서 동성애에 대한 섬세하고 긍정적인 묘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최근 1, 2년 사이에는 좀 더 극적인 변화가 생긴다. tvN <마인>(2021)은 레즈비언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왓챠는 <새빛남고 학생회>(2021)와 <시멘틱 에러>(2022)를, ENGD는 <나의 별에게>(2021)를, TVING은 <나의 별에게 시즌2>(2022)를 방영하는 등 그간 웹툰, 웹 소설 등에서 저변을 넓혀오던 BL을 본격적으로 영상화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웨이브는 7월 성 소수자 리얼리티 <메리퀴어>(2022)와 <남의연애>(2022)를 방영한다. 동성애 코드의 콘텐츠들이 물밀 듯이 공급되고 있다. 이렇게 주류 대중문화 콘텐츠 업계가 동성애물의 공급량을 늘리고 팬덤이 형성되는 일은, 동성애의 존재가 아예 지워지거나 회화화되어 단편적으로만 시장에 머물렀던 과거에 비하면 눈에 띄는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BL을 필두로 한 동성애물의 확산을 성 소수자 인권의 확대 문제와 곧바로 연결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먼저 현재 동성애 콘텐츠의 중심이 된 BL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자. <씨네21>의 칼럼에서 웹 소설 리뷰어 김아리영은 BL을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가 보는 남자들끼리의 로맨스”라 정리했다. 말 그대로 BL은 여성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다. 그간 학원물이나 오피스물에서 남성 위주의 시각을 반영한 여성 혐오적인 대사나 묘사(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에 기겁을 하던 여성들은 BL에서 자신들이 안심할 수 있는 대사와 상황을 창조한다. 그러면서도 BL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주연이 반드시 남성들이어야 하므로 여성 캐릭터가 주변화되어 도리어 여성을 소외시키는 콘텐츠가 되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도 직면한다. 여성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는 점의 장단점은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BL 콘텐츠의 제작 과정에서 현실의 남성 동성애자는 소외되기 쉽다. 유통도 거대 플랫폼이 앞장서고 있다. 왜곡된 묘사가 탄생하기에 알맞은 조건이다.
러브라인에만 치우친 콘텐츠의 확산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성 소수자 개개인의 인권 신장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랑에 빠진 채로 살면서 늘 누군가와 성애적인 관계를 맺고 살진 않는다. 동성애 코드가 배제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는 러브라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웰메이드 작품이 수두룩한 반면, 최근 봇물 터지듯 등장하는 동성애물에서는 성애적 묘사가 반드시 포함된다. 현실 세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어려움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보다는 동성애자를 성애적 관점에서 관음의 객체로 전락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법하다. 동성애물의 양적 확산에 따른 이런 문제점은 대중이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거쳐야만 하는 하나의 시련에 불과하다고 선해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한계라는 생각도 든다.


대중문화 콘텐츠 시장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동성애를 대하는 기존의 시각에 크고 작은 균열이 일고 있다. 대표적으로 올 4월 이루어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다. 이 판결은 동성 군인 사이의 합의한 성관계는 처벌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 판결 이전에 동성애는 범죄였던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모두 알고 있듯이 동성 간의 교제나 성행위가 형법에 의해 처벌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동성 간 성행위가 처벌받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했다. 군형법 제92조의6이다. 이 법에 근거해 군대 안팎에서 동성과 합의하고 성관계를 맺은 군인들이 처벌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가 완전한 합법의 영역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이번 판결이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의사 합치에 따라 이루어지는 등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를 직접적, 구체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동성 간 성행위에는 위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성관계에 대한 합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유죄를 인정하던 과거의 판례를 폐기한다는 뜻이다. 대중문화 콘텐츠가 변하는 것처럼 법과 제도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렇게 2022년의 대한민국은 동성애를 둘러싼 혼란의 도가니다. 동성애를 묘사하면 지상파 방송에서 편집 당하기도 하고, 잠재적인 범죄자 집단 취급을 받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변태로 묘사되기도 한다. 반면 봇물 터지듯 늘어난 BL 콘텐츠에서는 매력적인 동성애자 미소년이 흠모의 대상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합의된 동성 사이의 성관계는 군형법으로도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법 조항 그 자체는 여전히 살아 있다. 혼란스럽다. 동성애자들에게 평화는 언제쯤 찾아올까. 이쯤 되면 이 글의 제목을 ‘우리 이대로 사랑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우리 이대로 살아가게 해주세요’로 바꾸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글 / 백세희(작가, 디케이엘파트너스 법률사무소 변호사)

피처 에디터
김은희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