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프리즈 서울에서 발견한 견고하고 명백한 미술의 힘

2023.10.15전희란

프리즈를 즐기는 이들의 의도는 다양하지만, 이토록 많은 인원을 군집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미술의 힘이다.

황다나아트 라이터
프리즈가 아시아권에 처음으로 상륙한 작년, 한국 미술시장은 사상 첫 1조원대를 돌파했다. 그리고 2회를 맞이한 프리즈 서울. 코로나 기간 중 역대급 호황을 누린 미술시장이 세계 경제 침체로 주춤하고 소포모어 징크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모두 기우였다. 인파가 빼곡한 페어장에는 나흘간 7만여 명이 다녀갔다. 아트 바젤이 뉴욕, 취리히의 부유층이 휴양을 떠나는 마이애미, 스위스 바젤에서 미술계만의 잔치로 다소 폐쇄적으로 운영하다 홍콩, 파리에 출범한 데 이어 오는 11월 도쿄로 진출하며 미술시장의 세계화에 부응했다면, 프리즈의 시작은 애초부터 달랐다. 동명의 미술 잡지 이름을 걸고 런던에서 시작된 아트 페어는 수집가 외에도 학자, 애호가, 일반 대중을 위한 현대 미술 플랫폼이라 스스로 일컫는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젊은 페어지만 뉴욕, 로스앤젤레스, 서울로 확장, 단시간 내 급성장하며 아트 바젤과 함께 세계 아트 페어 양대 산맥으로 떠올랐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유화나 알로라 앤 칼자디야, 루돌프 스팅겔 등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작가들의 작품이 프리즈 서울 1회를 더욱 빛나게 했다면, 올해 갤러리들은 한국 시장 탐색을 어느 정도 마치고 복귀한 눈치다. 익숙한 작가의 작품과 낯선 이이름의 재능들이 공존했고, 개인 컬렉터의 취향을 반영한 듯 대작보다는 소규모 작품이 대거 눈에 띄었다. 작년 스털링 루비 작품을 내세워 인상 깊었던 자비에르 위프켄스나 올라퍼 엘리아슨 등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타냐 보낙다르 등이 참여하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중세 시대 고서부터 20세기 걸작을 아우르는 마스터스 섹션은 유럽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걸작을 시차가 바뀌지 않은 채로 한국에서 만나는 호사인 만큼, 긴 줄을 마다하지 않는 관람객의 애정을 한껏 받았다. 프리즈 맞이에 공식 신호탄을 알린 것은 지난 8월 22일 개막한 프리즈 필름. 아마도예술공간, 보안1942, 인사미술공간 등 정평이 난 비영리 독립 공간 세 곳과 서브 컬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마더 오프라인에서 작가 14인의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 해외 미술인의 관심을 사로잡은 는 미술 주간을 앞두고 8월 31일 개막했다. 한국 미술을 이끄는 중견 및 신진 작가들이 대거 참여, 한국 전쟁 정전 70년을 맞아 촘촘하고 정성스러운 기획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DMZ 오픈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맡은 최재천 교수는 북녘땅이 훤히 보이는 전망대 강당에서 열린 개막식 환영사에서 기대감을 한껏 표출했다. “미술의 힘은 강합니다. 어느 작품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우리가 과학 분야 학술 행사나 논문을 통해서 백날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효과가 있습니다.”

해외 갤러리의 다채로운 전시도 두드러졌다. 영국 현대 미술의 주축인 yBa(young British artists)와 함께 성장한 화이트큐브가 호림아트센터에 서울 지점을 열었다. 일본 화이트 스톤 갤러리는 켄고 쿠마가 디자인한 건축물 내 전시를 앞세워 개관했다. 팝업 형태의 전시를 보여준 화랑도 여럿 눈에 띄었다. 독일 기반의 스푸르스 마거스 갤러리는 아시아 첫 팝업 전시로 예술과 디자인 간의 관계성을 탐구해온 <가능한 세계들>로 우리를 인도했고, 런던 리슨 갤러리는 북촌의 고즈넉한 한옥에서 그룹전을 개최했다. 리안갤러리 서울(이강소 개인전)이나 타데우스 로팍(도널드 저드, 요세프 보이스)처럼 증축, 확장한 공간에서 공들인 전시를 소개하는 곳도 있었다. 한국 미술을 다방면으로 후원해온 에르메스나 미술관 소장품 컬렉션을 선별해 전시하는 서울 공간을 보유한 루이 비통은 청담 나이트 프로그램에, 샤넬은 프리즈 위크 파트너로 한국 작가를 조명하는 영상 시리즈 나우 앤 넥스트로 참여했다. 페어 한쪽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우한나 작가의 설치 작품은 신진 예술가를 위해 나선 불가리의 후원으로 마련됐다. 그 외 럭셔리 브랜드들도 앞다퉈 프리즈 서울 특수를 놓치지 않고자 각각 특색 있는 콘텐츠를 앞세워 동참했다. 세계 3대 경매사도 각각 파트너십을 맺어 전시를 선보였다. 소더비는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낙찰된 순간 절반이 파쇄돼 많은 이를 충격에 빠뜨린 뱅크시 작품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를 준비했고, 필립스는 호크니, 쿠사마 등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특별전을 내세웠다. 작년 프란시스 베이컨과 아드리안 게니 두 작가가 조우한 전시로 화제가 된 크리스티는 현대카드와 파트너십을 맺고 앤디 워홀과 장-미셸 바스키아 2인전을 택했다. 크리스티안 알부 아태 지역 20-21세기 미술 공동 대표는 판매를 위함이 아니라, 교육에 목적을 두었다고 밝혔다.

도시 전체가 들썩이는 모습은 밀라노 가구박람회 주간의 장외 전시를 연상시켰다. 일부 행사는 VIP 패스를 보여줘야 입장 가능했으나, 대개는 누구에게나 열린 한남-청담-삼청 나이트로 이어지며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목요일 삼청 나이트. 아트선재센터 3층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속도만큼이나 뇌와 몸도 느릿느릿하다. 경복궁 담장 너머가 이렇게 소란스러울 때가 또 있을까. 청와대 인근 한적한 길에 자리한 모 갤러리에는 민원으로 경찰차가 20번 출동했다는 풍문도 돌았다. 장외를 활보하다 막상 페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프리즈의 토요일을 놓치지 않으려 보폭을 옮겼다. 주말 미술 장터는 북새통을 이뤘다. 파도에 떠밀리듯 전시장 이곳저곳을 놓치지 않으려 부지런히 살핀다. 아무리 동선을 촘촘히 짜보아도 못 보고 지나치는 벽은 있으리라. 우고 론디노네의 수녀와 수도자 3인이 자리하던 글래드스톤 부스는 한 수도자가 이미 먼 길을 떠난 듯 자리를 비웠다. 못 자국만 남은 벽이 여기저기 출몰했고 한 갤러리는 작품 설치는 물론 바닥 시트까지 새로 깔아 아예 새로운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일요일. 늦잠을 자리라 마음먹었지만 미처 보지 못한 키아프가 아른거린다. 미술이라는 해일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지만 어쩌겠는가. 일 년에 단 한 번 오는 기회다. 키아프 서울 2023에서 미술품 1백만원 이상 구매 시 호암미술관 ‘티켓 두 장 증정’이란 광고 문구와 “일부 화랑에서 무이자 할부 24개월 및 미술품 구매 추가 한도 최대 5천만원 상향 조정 가능”이라고 광고하는 삼성카드 부스를 지나면 디올, 티파니, 샤넬, 생 로랑 광고가 끊임없이 돌아간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거쳐 페어장에 입성한다. 국제갤러리와 갤러리현대는 각각 우고 론디노네와 라이언 갠더 1인 작가에 헌정한 부스를 운영했다. 라이언 갠더 특유의 위트가 담긴 하늘색 포르쉐(와 벌레)가 중앙에 놓인 현장을 지키던 갤러리현대 김재석 이사는 “열리는 장소가 페어일 뿐, 일반 전시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신작을 선보인다”고 설명했다. 그옆을 지나던 60대 남짓 노신사가 “대체 저기다 포르쉐를 왜 갖다 놓은 거야?”라고 의아해하는 아내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이해하려면 공부해야겠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가족 단위 관람객의 증가다. 어린이들은 “엄마 이거 신문지야(최병소)!”, “레고 작품 볼래(아이 웨이웨이)” 등의 ‘소감’을 외쳤다. “ART INFLUENCER BACK HERE”이란 글이 쓰인 티셔츠를 입은 아이는 타츠오 미야지마의 작품 속 숫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창의교육의 현장을 목도한 듯했다.

미술은 언어의 장벽, 신념, 경계와 시공간을 초월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나와 공명하는 작품과 마주하는 순간, 오로지 작품에 몰두한 순간을 경험해본 이라면, 이러한 파동이 주는 감동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2023년 9월, 우리는 전에 없던 미술 포화를 경험했다. 좋은 전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렸다. 훌륭한 음식도 과하게 섭취하면 탈나기 마련이고, 미술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터가 가져온 활력을 높이 평가한다. 미술시장만큼 개인이 보는 작품 가치가 제각각인 시장이 또 있을까. 작품을 짓기 위해 온갖 사고와 사념을 모아 집약시킨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너머에 색색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갈망과 과시, 비즈니스, 취향, 학구열, 호기심에 이르기까지 프리즈를 즐기는 이들의 의도는 다양하지만, 이토록 많은 인원을 군집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미술의 힘이다.

황다나(아트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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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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