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도 시적 허용이 가능하다면.
줄세우기로 더욱 혼잡해진 명동의 버스 정차 시스템 대신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천국은 절대 없다 글 / 윤성중(월간 <산> 기자, 일러스트레이터)
강기슥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하아, 이제 어떡하지? 도망갈까?’ 수원에 있는 그의 원룸은 누울 자리도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약 11년을 버텼다. 11년 동안 그는 일을 벌였다. 그는 이 일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일은 결국 세상을 아주 크게 바꾸긴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GHT(G eez, Home Today, 젠장, 오늘은 집에서)’라고 이름 붙였다. GHT 프로젝트는 2023년 12월에 시작됐다. 당시 그는 수원에서 명동까지 출퇴근했다. 매일, 평균 4시간을 버스나 지하철에서 보냈다. 그날은 연말이었다. 수원행 M5107 버스를 타려고 그는 명동 롯데백화점 앞, 사람이 빼곡하게 선 줄 속에 끼어 있었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정류장을 100미터쯤 앞두고 버스는 멈췄다. 버스 앞으로 다른 광역 버스가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온 강기슥은 다음 날 회사에 가지 않고 이전부터 생각했던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분노에 찬 그는 키보드를 쾅쾅 두드렸다. 강기슥이 구상한 내용은 이렇다. 증강현실을 이용해 가상현실 속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도록 구현하는 것이다. HMD(Head Mounted Display, 일명 VR 헤드셋)를 뒤집어쓰고 가상현실에 접속, 그 안에서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고, 퇴근하고, 쇼핑을 하는 등 일상에서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꾸미겠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시스템, 그러니까 헤드셋을 쓴 상태로 가만히 앉아 가상현실에 접속하는 방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시스템을 개발했다. 헤드셋을 쓰고 좁은 공간에서 몸을 마음껏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시스템은 특수한 타일을 바닥에 까는 것으로 해결했다. 타일은 작은 구슬로 이뤄져 있는데, 가상현실 속 아바타의 움직임에 따라 구르고 멈춘다. 이에 따라 타일 위에 서면 방안에서 걷거나 뛸 수 있었다. 전용 의자만 있으면 자동차를 탄 것 같은 효과도 낼 수도 있었다. 10년 후 강기슥은 그동안 개발한 프로그램을 세상에 내놨다. 업계가 뒤집어졌다. “혁신적”이라면서 모두 그를 칭송했다. 많은 사람이 “젠장, 오늘은 그냥 집에 있자”라고 외쳤다. 서비스가 출시되고 1년 정도 지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마트, 백화점, 매장들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가게를 접은 전 세계 사람들은 강기슥을 고발했다. 강기슥의 집으로 고발장이 날아들었다.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전화와 이메일 등이 빗발쳤다. 그는 괴로웠다. 인간 사회에서 인간이 바라는 천국은 절대 만들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결혼하면 2억 주는 ‘헝가리 저출산 모델’을 한국에 들여오려는 방안 대신
도파민 파인애플 글 / 윤해서(소설가)
그는 무정형의 상태다. 그에게는 이름도, 성별도, 국적도 없다. 이름, 성별, 국적이라는 말.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미래의 엄마를 선택한다는 말은 그에게 닿지 않는다. 그는 아이가 아니고 여럿이 아니다. 그에게는 기다림이 없다. 그는 모든 시간 속에 살고 모든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가능성 중 하나인 세계의 언어란 분절된 것이어서 그의 덩어리됨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렇게. 펼쳐진다. 나뉜다. 늘어선다. 순서, 질서, 구조라는 말. 나의 선택, 너의 책임, 우리의 미래라는 말. 그에게는 없다. 그는 어제와 오늘을 모르고, 한 시간 전과 한 시간 후를 모른다. 그의 시간은 시계 속에 있지 않다. 인간과 침팬지는 대략 99.5퍼센트의 진화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는 살고자 했다. 오랫동안 그는 살아남고자 했다. 그는 더 잘 살아남기 위해 진화와 퇴화를 반복했다고. 알려졌다. 여러 개의 알을 낳은 새는 많은 새끼를 잃는다. 한 마리의 새가 낳아서 기를 수 있는 새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한 마리의 새가 사는 데 필요한 것. 공기, 물, 먹이에도 수준이 있다. 최소한. 죽지 않을 만큼. 부족하다, 더럽다, 가망 없다. 기아, 세력, 전쟁이라는 말. 그는 살기 위해 살아왔다. 홍콩의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도로를 점령했다. 어느 해 5월의 일이다. 사흘 뒤 중국 쓰촨성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동물들은 안다. 물, 공기. 음파와 기압의 변화. 땅울림, 발광 현상이라는 말. 그는 살아 있고, 살아 있기 위해 살아왔다. 그는 물, 공기, 땅울림, 발광을 흡수했다. 그는 물, 공기, 새의 알과 사체를 흡수했다. 그는 개의 짖음과 물방개의 떨림을 흡수했다. 그는 물고기들의 떼죽음을 흡수했다. 그는 크리스마스섬 집박쥐와 보석달팽이의 멸종을 흡수했다. 짖음, 떨림, 떼죽음, 멸종이라는 말. 역사에도 역사가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표적을 향해 활을 쏘았다. 활을 쏘았다. 표적은 쓰러졌다. 표적을 바꾸는 일은 간단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표적을 향해 활을 쏘았다. 활을 쏘았다. 표적은 쓰러졌다. 표적을 다른 표적으로 대체하는 일은 눈을 감았다 뜨는 일. 중독은 안다. 몰려간다. 쓰러뜨린다. 게임은 다른 게임으로. 중독은 강도를 더해간다. 그는 중독을 흡수했다. 눈 깜빡임, 클릭, 눈 깜빡임, 클릭.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돈에는 돈. 돈에 돈. 그는 위력을 흡수했다. 그는 두려움을 흡수했다. 그는 오랫동안 한 방향의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맹렬히 흡수했다. 짧게, 더 짧게. 조각난 파인애플. 어디에나 창을 열면 파인애플이 열려 있어. 그는 있는 그대로 흡수했다. 물, 공기, 도파민 파인애플. 즙즙. 그는 무정형의 상태로 절여졌다. 그에게는 이름도 성별도 국적도 없다. 이름, 성별, 국적이라는 말. 태어나지 않은. 그가 솟아오르거나 솟아오르지 않을 수 있는 세계가. 그의 선택 가능성 중 하나인 세계가 그의 덩어리됨을 표현하기에. 그에게는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가 남아 있다.
서울 한강변 집값 고공행진 대신
좋은 건 많을수록 좋다 글 / 한승재(건축가, 푸하하하프렌즈)
한강은 오래전부터 그곳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의 각축장이었다. 과거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아마도 강의 중요성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도시에선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배를 타고 먼 곳으로 이동하지 않으니, 이제 한강이 중요한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건 오직 그것의 중요성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드디어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중요함을 가지게 되며 안정적인 화폐로 인정받는다. 마치 황금처럼 되는 것이다. 최근 또다시 개발 붐이 한강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파트 증축, 재개발, 발코니 확장 등 서울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짜내어 돈이 되도록 만든 이들에게 한강은 이미 써버린 카드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강변은 건물로 가득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낡기를 기다렸다가 부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기발한 개발업자가 괴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한강변 개발이 다시 시작되었다. 바로 한강을 복제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들은 강을 따라 긴 둑을 쌓아 한강을 반으로 나누었다. 그렇게 한강을 두 개로 만들었다. 그리고 좁아진 강 사이에 또 한 번 긴 둑을 만들어 한강을 네 개로 만들었다. “우리 한강을 더 만들어요. 좋은 건 많을수록 좋잖아요!” 그렇게 여러 번 거듭해 한강은 여러 개의 물줄기로 나뉘었고, 여러 개의 한강이 만들어졌다. 강을 나누기 위해 쌓은 둑 위엔 공원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마치 샌드위치 속에 끼워놓은 햄처럼 강과 강 사이에 촘촘한 도시가 완성되었다. 한강은 폭이 700~1500미터에 이르는 넓은 강이다. 강남과 강북은 너무 멀고, 걸어서 건너기엔 다리는 너무나 길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만든 강남과 강북 사이의 도시들 덕분에 한강은 아담한 강이 되었고 걷기에 지루하지 않은 장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일을 추진한 개발업체에는 짭짤한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좋은 일은 꼭 선량한 의도로 시작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 사업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었다. 이를 추진했던 개발업자들은 현대의 연금술사라 불리며 또 다른 지역을 복제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산이나 바위, 지역의 고유한 문화재 무엇이든 복제해주면 돈이 될 거라고 여기는 듯이. 그러나 현명한 연금술사들은 도시의 무분별한 복제를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복제할 수 있는 것을 복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과거 연금술이 실패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복제할 수 없는 것을 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그들이 복제한 것이 무엇인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복제한 것은 정말 한강이었을까?
출근 시간대 의자 없는 지하철 시범 운영 대신
붐비는 문제를 해결하는 법, 법, 법 글 / 곽재식(SF 소설가·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
대한민국에 법이 몇 개나 있는지 아는가? 법제처 웹사이트를 보면 2024년 1월 2일 기준으로 한국에는 14만 2천5백88건의 법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 속에는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내용부터, 쓰레기 분리 수거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온갖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14만여개나 되는 그 많은 규정을 다 파악해서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도대체 법이 왜 이렇게 많을까? 교과서에는 법이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다. 설마. 현대 국가의 법은 보면 볼수록 정부가 책임을 다른 누구인가에게 떠넘기는 수단을 확보하고자 만든 것 같다. 세상에 무슨 문제가 생길 경우, 하여튼 그건 다른 누군가 때문이니 공무원에게 민원을 올리거나 정부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뜻이다.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보자. 정부가 나서서 책임지고 교통 체계를 개선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이것은 하수의 방법이다. 어려운 문제를 내가 힘들게 떠맡아야 하지 않는가? 게다가 문제가 잘 개선되지 않으면 장관이나 담당 공무원의 자리 보전에 문제가 생기는 큰 위험도 있다. 그보다는 지하철 관련 기관을 향해 너희 기관이 주관해서 만원 전철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하는 방법이 낫다. 이렇게 하면 정부 책임은 없다. 오히려 기관 담당자에게 호통 치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면 기관 직원들이 모두 정부 공무원들에게 굽실거리게 될 테니, 지위가 높아지며 기분도 좋아진다. 그러나 결국 공공기관은 정부 사람들이 나중에 영전해 자리를 옮길 곳이다. 어차피 한 몸인 그곳을 너무 힘들게 대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가장 좋은 상책은 책임을 떠넘기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교통 카드 찍는 기계에서 “만원이니 탑승을 자제해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오게 해두자. 그리고 그런데도 타는 사람이 있을 경우, 만원 전철에서 무슨 사고나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이 무리하게 탑승했기 때문이므로 그 사람을 처벌하겠다고 하는 법을 하나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해서 전철에서 누가 다치거나 쓰러지면 그 사람에게 다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여론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솜방망이 처벌이 문제라며 처벌 수위를 올리면서 생색이나 좀 내면 된다. 나는 국가 법령 중 상당수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정치인들보다는 14만여개의 그 많은 법 중에서 악법 하나를 찾아 없애겠다는 사람에게 조금 더 눈길이 간다. 적어도 그는 높은 자리에서 남에게 지시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일을 하며 법과 제도를 겪어본 사람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