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없는 우리 아빠가 월드컵은 매번 보러 다닌 이유

2026.06.30.조서형, Savannah Sobrevilla

40년에 걸친 축구 열병의 기쁨과 좌절.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와 해야만 했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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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Kelsey Niziolek

어린 시절, 나는 4년마다 같은 장면을 봤다. 아버지는 가벼운 운동복 바지 몇 벌을 돌돌 말아 배낭에 넣고, 작은 치약 하나와 축구 유니폼을 챙긴 뒤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늘 아주 먼 나라의 경기장이었다. 그곳에는 아버지처럼 월드컵을 보기 위해 가진 돈을 한 푼 한 푼 모은 수천 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왜 그 일이 그렇게 중요했는지, 또 어떻게 그런 여행을 해낼 수 있었는지는 어린 내게 수수께끼였다. 다만 그 여름마다 우리 집 식탁에는 샌드위치와 시리얼이 자주 올라왔던 것만은 기억난다. 그래도 나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러다 2006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수수께끼의 일부를 이해하게 됐다.

그해 월드컵에는 내가 기억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떠나지 못했다. 미국 영주권 서류를 기다리는 중이라 출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서 TV로 월드컵 결승전을 봤다.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이탈리아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가 프랑스 주장 지네딘 지단을 도발했고, 지단은 지금도 회자되는 박치기로 응수했다. 심판은 곧바로 레드카드를 꺼냈다.

그 순간 아버지는 마이애미 교외의 작은 원룸 거실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었다. 프랑스는 아버지의 팀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남미 사람이니까.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올해 월드컵과 아버지의 날이 다가오면서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왜 하필 월드컵이 아버지를 세계 곳곳으로 데려갔고, 또 무릎을 꿇게 만들었는지 말이다.

“내가 축구에 빠진 건 1970년대 페루 대표팀을 보면서였어.” 전화를 걸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아버지는 막 열세 살이 됐다. 리마에서 자란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친구 집에 가서 근처 공터에서 축구를 하곤 했다. 축구는 잘하지 못했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컸다. 1978년, 페루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2차 조별리그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0대6으로 완패하며 탈락했다. 전화를 하는 동안 창밖 운동장에서는 십 대 학생들이 축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딸아, 예선이 열릴 때마다 나라 전체가 멈춰 섰어. 우리가 이기면 거리 전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였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을 들은 것 같았어. 일요일 경기에서 이기면 다음 날은 아무도 일하지 않았을 정도야.” 아버지는 추억을 떠올렸다. “반대로 지면 며칠 동안 나라 전체가 슬픔에 잠겼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페루는 다시 아르헨티나와 맞붙었다. 이번에는 리마에서였다. “마라도나가 뛰고 있었어.” 아버지는 아직도 소년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열기와 허술한 경기장 안전 관리가 겹치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아버지도 그대로 사람들에게 밟혔다. “덩치 큰 남자가 나를 감싸주면서 ‘이봐 꼬마, 일어나!’라고 외쳤어. 나는 겨우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지.” 친구들을 찾기 위해 뛰어가는 동안 경찰들은 곤봉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며 경기장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완전히 무질서한, 제3세계다운 경험이었어.”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 정말 좋아졌지.”

그가 처음 월드컵 경기장을 찾은 건 그로부터 거의 20년 뒤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페루가 식량난과 테러, 정치 불안에 시달리던 시절 부모님은 미국 마이애미로 이민을 왔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직장을 구했고, 화려한 사우스비치의 작은 아파트에서 드래그퀸 이웃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마이애미 마약 전성기도 끝나가고 있었고, 영어도 점점 익숙해졌다. 삶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당시 페루에서 놀러 온 이모와 함께 아버지는 차를 네 시간 몰아 올랜도 시트러스 볼 경기장에서 열린 네덜란드와 아일랜드 경기를 보러 갔다. 입장권은 60달러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엄마와 이모는 아마 쇼핑을 했을 것이다. 그날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남미 밖 축구 팬들을 직접 만난 날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온통 오렌지색으로 변했어.” 아버지는 말했다. “키 큰 백인들이 모두 오렌지색 옷을 입고 있었어. 정말 모든 게 오렌지였지.” 하지만 낯설었던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나와 사진을 찍자고 했고, 나도 그들과 사진을 찍었어.” 아버지는 웃었다.

“‘와, 페루에서 온 신기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했겠지. 나도 속으로는 ‘그쪽이 더 신기해’라고 생각했고.” 브라질과 네덜란드는 승부차기까지 갔고, 하필 승부차기가 벌어진 골대 뒤가 바로 아버지 자리였다. 가장 싼 표를 샀음에도 말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경기 자체보다 분위기였다. 페루에서는 축구가 늘 ‘우리 대 그들’이라는 적대감으로 이어졌지만, 미국은 달랐다.

“경기장 밖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봤어.”

“‘우리가 상대 팀이라도 결국 모두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분위기였지. 경기 전부터 서로 행운을 빌어줬어.” 아버지는 그때 자신이 ‘월드컵 바이러스’에 완전히 감염됐다고 생각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그의 첫 유럽 여행이었다. 니스와 생트로페, 마르세유를 오가며 월드컵을 즐겼다. “최대한 돈을 아껴서 다녔지.” 하지만 정말 극단적인 배낭여행은 아니었다.

몇 년 뒤 유럽축구선수권을 보러 다시 파리에 갔을 때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콩고 출신 여성의 뒷마당 텐트에서 잠을 자야 했으니까. 마이애미의 여행사를 통해 가장 저렴한 티켓을 샀는데 또 골대 뒤 좌석이었다. 브라질과 네덜란드의 준결승전은 다시 승부차기까지 갔고, 모든 승부차기를 바로 눈앞에서 봤다. “그것도 제일 싼 표로.” 아버지는 크게 웃었다.

프랑스는 어떤 나라였냐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했다. “아무도 내 직업이 뭔지 묻지 않았어.” 그래픽 디자이너인 아버지는 그 점이 인상 깊었다. 사람들은 교양이 있었고 가족 중심적이었다. 머물렀던 가족 운영 민박에서는 매일 저녁 모두 함께 식사를 했고, 집 주인의 대학생 아들도 늘 식탁에 함께 앉았다. 그 모습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프랑스에서는 라틴계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어.” 하지만 축구는 금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줬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도 세계 시민이 된 기분이었다.

2002년 월드컵 개최지가 한국과 일본으로 발표됐을 때, “갈까 말까”는 애초에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무렵 부모님은 이미 헤어졌고, 아버지는 영국 출신의 붉은 머리 여성과 만나고 있었다. 그녀는 월드컵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친구 타로와 함께 마이애미에서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는 구글 지도도 없었어.” 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스마트폰도 없었지. 그때 가장 멋진 물건이라고 해봐야 모토로라 스타택 정도였어.”

출국 전 그는 맵퀘스트에서 모든 경로를 출력해 준비해 갔다. 하지만 롯폰기 역을 나오는 순간 그 종이들은 무용지물이 됐다. 거리 표지판이 모두 일본어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파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본 것도 처음이었다. “문화 충격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거였어. 배낭 하나 메고 친구랑 둘이 서서 ‘망했다. 이제 어디로 가지?’ 하고 있었지.” 둘은 그냥 감으로 한 블록을 걸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그 길 끝에서 예약한 호텔을 찾았다.

캡슐호텔은 아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키 190cm가 넘는 아버지가 결국 캡슐호텔에도 하루 묵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은 신칸센을 타고 시즈오카로 향했다. 브라질과 잉글랜드의 8강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관중석 대부분은 잉글랜드 팬이었다. 영국인 여자친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아버지도 브라질을 응원했다. 아버지가 남긴 여행 사진 대부분에서 그는 맥주에 취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도 당시 경기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한다. 선수 이름은 물론, 승부차기 횟수와 누가 언제 골을 넣었는지까지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그때 브라질에는 호나우두, 히바우두, 카푸,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있었고, 잉글랜드에는 데이비드 베컴, 마이클 오언, 리오 퍼디낸드가 있었지.” 그는 시즈오카 에코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8강전을 떠올렸다. “1대1이었는데 당시 신성이던 호나우지뉴가 먼 거리에서 프리킥 골을 넣었어. 정말 전설 같은 장면이었지.”

경기가 끝난 뒤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긴 길에서 일본 초등학생들이 종이접기를 나눠주며 여러 나라 말로 인사했다. “‘우리 나라에 와줘서 고마워요.'” 시차를 여러 번 넘나들며 이동한 탓에 그해 아버지는 자신의 생일까지 지나쳐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배낭에서는 알록달록한 뿔 달린 인형 두 개가 나왔다. 2002 한일월드컵 마스코트인 아토와 카즈였다. 어린 나는 그 무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건너뛰었지만,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그 아쉬움을 모두 보상해주는 여행이 됐다.

그때는 나도 축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학교에서는 브라질을 응원하는 것이 멋진 일처럼 여겨졌고, 나 역시 카나리뉴를 응원한다는 의미로 노란색과 초록색 유니폼을 여러 벌 모으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샤키라의 ‘와카 와카’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남아공에서 한층 수척해지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행복하게 돌아왔다.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우리를 안아주기 전, 그는 먼저 당나귀 냄새가 난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평소처럼 수많은 명승부를 봤다. 특히 우루과이가 8강에서 가나를 극적으로 탈락시킨 경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요하네스버그의 한 바에서 한 여성을 만났고, 여행 중 데이트도 했다. 몇 년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지금은 남아공에서 말 많은 여덟 살 딸 아우렐리아와 함께 살고 있다.

2010년 월드컵 결승전은 아버지가 마이애미로 돌아온 지 며칠 뒤 열렸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결승전. 우리는 사우스비치의 명소인 에스파뇰라 웨이에서 함께 경기를 봤다. 플로리다의 무더위 때문에 거리에는 땀에 젖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스페인이 우승한 순간, 누군가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열세 살이던 내 머리 위에 그대로 부어줬다. 그때만큼은 그 낯선 사람이 정말 고마웠다.

물론 2014년 브라질 월드컵도 빠질 수 없었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 함께 축구를 하던 친구 열 명과 함께였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브라질 사람들과 최고의 선수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포르투갈어도 배워두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은 페루가 1982년 이후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대회였다. 아버지는 학창 시절 친구이자 학교 축구부 에이스였던 판초와 함께 소치를 찾았다. “작은 도시 전체가 페루 사람들로 가득했어.”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도 “맥주만 없었을 뿐, 충분히 활기찼다.” 도하로 떠나기 전 나는 아버지에게 무지개 팔찌만큼은 차고 가지 말라고 했다. 그는 결국 그대로 차고 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월드컵은 인생의 모든 시기에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여행할 기회를 선물했다. 낯선 사람과도 포옹하고,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맥주를 나누고, 집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낯설지 않은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아주 단순해. “축구는 사람들의 스포츠야. 월드컵은 그 스포츠를 가장 크게 축하하는 축제고.” 잠시 말을 멈춘 뒤 아버지가 덧붙였다. “그래서 축구를 ‘아름다운 게임’이라고 부르는 거야.”

전화를 끊기 전 아버지는 올해도 생일을 비행기 안에서 보내게 될 것 같다며 웃었다. 목적지는 멕시코시티의 전설적인 아스테카 스타디움. 그곳에서도 그는 분명 또 하나의 잊지 못할 경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조서형

조서형

디지털 에디터

조서형은 아웃도어와 건강, 기후 위기, 인물 등을 다루며 웹 콘텐츠를 만드는 'GQ KOREA' 디지털 에디터입니다. 경희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일본의 데이터 분석 회사에서 근무했으며 'GO OUT KOREA', '볼드저널', '일점오도씨' 및 브랜드 매거진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2년간 한겨레신문 토요판 커버스토리를 작성하며 사회 문제와 트렌드 등을 취재했고, 2024년에는 사계절 시리즈 에세이 '여름이 너무해'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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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annah Sobrevilla
출처
www.gq.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