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젊은 남자

2011.07.08강지영

김남진이 돌아왔다. 3년 만이다. 그는 어딘지 좀 변해 있었다.

그는 엄지 손가락에 밴드를 칭칭 감고 조금 큰 수트를 입고서 커튼콜에 나왔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 빛이 소나기처럼 얼굴 위로 떨어졌는데, 한밤의 불 꺼진 박물관에서 그리스인의 흉상을 본 것처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공연장 밖에는 몇 명의 일본 팬이 꽃을 들고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 장미와 안개꽃이 섞인 촌스러운 꽃다발을 받아 들고 김남진은 길다란 몸을 구부정하게 꺾은 채 인사를 몇 번씩 했다. 그 광경은 조금쯤 기이하게 보였다. 청담동과 하이 패션, 뒤로 숨는 성격과 극단적인 탐미주의. 그간 김남진의 이미지는 그런 쪽이었다. 그런데 혜화동 골목에서 헐렁한 수트를 입고 어이 없는 꽃까지 안고서 온 얼굴이 구겨지도록 웃는 모습이라니. 두 시간 후, 그가 좋아하는 청담동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김남진을 다시 만났다. 라프 시몬스의 화이트 셔츠와 빈티지 리 청바지 차림, 눈두덩이 퉁퉁 부어서 얼굴이 더 홀쭉해 보였다. 그는 옷만 갈아입으러 갔다가 그만 곯아떨어졌었다고 말하면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그러고는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청해 단숨에 마셨는데 온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손가락은 어쩌다 그랬나.
별거 아니다. 어제 공연하다가 살짝 찢어졌다.

공연 후반부에 우울해 보였다.
그랬나. 사실 기분이 별로였다. 우리 공연이 더블 캐스팅이라 두 팀이 요일을 나눠서 공연한다. 오늘은 프레스콜이라 어쩔 수 없이 두 팀이 반씩 잘라서 공연을 했는데, 우리 팀이 후반부에 들어갔다. 중간에 갑자기 올라가니까 감정이 잘 안 잡혔다. 힘들었다. 우는 연기할 때 난감해서 혼났다.

잘만 울던데.
심장을 쥐어짰다. 눈물만 났지 하나도 슬퍼 보이진 않았을 거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연습을 엄청나게 했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세 달 꼬박 했으니까.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해도 몸이 동선과 대사를 기억한다.

이런 일이란 게 뭔가?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라 뭐가 한번 틀어지면 연기가 잘 안 된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갈게요, 할 수라도 있지만 연극은 그런 게 없다. 오늘도 분장실에서 형들이 다음 회에 잘하면 괜찮다고 했지만, 오늘 관객이 다음에 또 오란 법은 없다. 한 회도 엉성하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열심히 하고 싶다.

열심히 하는 김남진, 잘 안 어울린다.
그러게. 나도 내가 기특하다.

그동안 좀 멋대로 하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건 스무 살 때 얘기다. 지금 난 서른 여섯이다.

스무 살 때는 당신 생각에도 멋대로 맘대로 거만했나?
거만까지는 아니겠고, 다만 남들을 별로 의식 안 했다. 어려서부터 워낙 혼자 있어서 낯선 사람과 있는 게 불편하다. 그래서 주로 차 안에 많이 있었다. 어울리지 못하니까 버르장머리 없단 얘기도 들었다.

억울했겠네?
아니, 전혀. 나도 나 싫어하는 사람 싫다.

애들처럼 그게 뭔가.
애 같은 성격이 있다. 누가 칭찬하면 신나서 더 잘하고 싶어진다. 날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 어떤 목적 때문에 아양을 떨거나 친절하게 못한다.

이번 연극의 이해제 연출가는 칭찬을 많이 해줬나?
둘 다 말이 없는 편이라 그런 건 뭐 별로. 며칠 전에 남진 씨에겐 남들에게 없는 게 있다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기분 좋은 얘기를 툭 던지고 휙 가버린다.

남들에게 없는 그게 뭐라고 하던가?
안 물어봤다.

아니, 그건 또 뭔가.
남자들끼리 그냥 그 정도만 얘기하고 씩 웃는 거, 그게 좋다.

3년 만에 홀연히 나타났는데 그게 연극 무대다. 심지어 아이돌에 열광하는 오타쿠 삼촌 팬 역할이라니.
<키사라기 미키짱> 대본을 받았을 때 한 번에 읽었다. 재미있었다. 아이돌의 의문사를 두고 팬클럽 회원들끼리 모여서 우왕좌왕 추리하고 그런 게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다. 연출가를 만났는데 믿음이 갔다. 그냥 나를 다 맡겨보자고 결정했다.

3년 동안 뭐 했나.
놀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소속사 문제가 있었다.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 없이 놀았다. 스무 살에 데뷔해서 10년 넘게 안 쉬고 일했다. 그래서 처음엔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데뷔 때 얼굴은 파도에 떠밀려온 난파선의 일본 선원 같았다. 그때가 스무 살이었나?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피아노 치기가 너무 싫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임성민보다 더 잘생겼다고 예뻐하던 이모가 마음 못 잡는 조카 여행이나 보낸다고 돈을 주셨다. 그 돈으로 모델 에이전시에 등록했다. 한참 일본 잡지 보고 그럴 때였는데 모델이 좋아 보였다. 수업료가 백만원 좀 넘었는데 그걸 현금으로 들고 가서 접수창구에 딱 놓고 돌아왔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게 나눠서 내는 돈이었지 그렇게 한 몫에 낸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하더라. 돈을 내고 그 다음 날 교회에 갔다가 얼떨결에 캐스팅이 되고 광고 찍고 잡지 찍고 정신없이 일이 생겼다. 그러니까 그 수업료는 괜히 낸 셈이 된 거다. 내가 원래 그렇게 허술하다.

그러다가 <천년지애>의 타쓰지가 됐고?
이선미 작가가 잡지에서 내 사진을 봤는데 그걸 쫙 찢어서 책상 위에 붙여놨다고 들었다. 타쓰지는 김남진. 처음부터 정하고 글을 썼단 얘기도 들었고.

그땐 당신이 일본인이다, 일본계 한국인이다, 일본 혼혈이다 말이 많았다.
난 그냥 제주도 남자다.

외로운 섬 소년이 갑자기 인기를 얻으니 어땠나?
어리둥절했다. 그때 뮤직비디오를 엄청 찍었다. 회사에서 누구 뮤직비디오 찍는다고 어디로 가라 그러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갔다. 가서 보면 남진 씨 저기서부터 쭉 걸어오는 겁니다, 그랬다. 울라고 하면 울었고 화난 척하라고 하면 또 그렇게 했다. 그 때 감독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얼굴이랑 몸이란 생각을 했다. 연기가 아니고.

화가 났나?
아니. 그렇단 말이지, 속으로 그랬던 것 같다. 잘 못하는 연기였지만 굳이 잘 하고 싶지도 않았다. 멋있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땐 내가 마냥 아름다운 줄 알고 살았으니까.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12월의 열대야>찍을 때 처음 했다. 너무너무 잘 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요즘 케이블에서 <흔들리지 마>다시 하는 거 알고 있나? 화면 오른쪽에 ‘대한민국 주부 최다 요청 드라마’라고 떡 찍혀서 나온다.
난 그 드라마 좋다. 아침 드라마 하는 걸 두고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니가 이미지가 있지 아침 드라마는 너무 올드해 보인다고들 말렸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이 그런 유의 멜로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치정극, 하나마나한 사랑 얘기. 그렇게 솔직하고 뻔뻔한 거 좋아한다.

하긴, 김남진이 영원히 ‘그런지한’ 홍대 청년일 수는 없다. 쓸쓸한 척도 어릴 때나 하는 거다.
그렇지. 그런데 난 아직도 외로울 때가 많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성격에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나 좋다는 사람한테 마음을 잘 못 연다. 아, 일 말고 그냥 관계 얘기다. 나한테 오는 거 말고 내가 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쉬는 동안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외로웠다.

왜? 잊힌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서 외국영화만 봤다. 그리고 엄마한테 전화가 오면 우울해졌다. 엄마는 내가 지금이라도 평범하게 애 낳고 아빠 되고 그렇게 살길 바란다. 화를 내고 전화를 끊으면 그게 또 종일 마음에 걸린다.

그럴 땐 어떻게 하나?
돈을 보내드린다. 바보 같지만, 그거라도 할 형편이 돼서 다행이다.

옛날 사진을 자주 보나?
어릴 때 얼굴을 보면 신기하다. 얼굴형도 다르고 피부 톤도 다르고 눈 모양이 제일 다른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아닌 것 같다. 얘는 누구지? 내 쌍둥이 동생인가? 속으로 그러고 혼자 웃는다.

다시 스무 살이 되고 싶진 않나?
지금이 좋다. 난 그때보다 지금 더 젊다고 느낀다. 에너지가 그 시절보다 훨씬 많다. 그땐 아무 것도 안 해도 일이 그냥 다 술술 풀렸다. 게으르고 무기력했던 것도 같다. 요즘은 일어나면 빨리 공연장에 가고 싶어진다. 대사 톤을 몇 가지로 바꿔봤는데 그걸 얼른 하고 싶어서 좀이 쑤신다.

다음날 사진을 찍을 때 김남진은 입고 온 그대로 찍고 싶다고 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 달랑 입고서 머리를 툭툭 터는데, 이게 누군가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김남진은 스무 살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리진 않다. 하지만 충분히 젊다.

    에디터
    강지영
    포토그래퍼
    목나정
    스탭
    헤어 & 메이크업 /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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