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건축 상실의 도시

2011.07.11GQ

건축 상실의 도시, 서울

서울엔 건축이 아니라 건설만 남은 것 같다. 건설은 돈이다. 하지만 그게 도시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건축가로서 당신이 보는 서울은 어떤가?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외국 사람이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물어왔을 때의 대답을 생각하면 된다. 그게 정체성이다. 서울의 정체성은 하나로 정리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이 도시가 너무 오래됐고, 크고, 요소가 많다. 서울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세계 어떤 도시도 따라올 수 없는 복합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서울을 쉽게 얘기 못하는 거다. 갖고 있는 게 너무 많아서.

굳이 정의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대 도시’다. 영어로 메가 시티. 메가 시티가 되려면 인구가 1천만은 넘어야 된다. 세계에 스무 개쯤 있다. 미국에 있고, 유럽에는 없다. 메가 시티 중에서 6백년 역사를 가진 도시가 있나? 도쿄도 에도 막부 이후에 시작됐다. 서울보다 2백~3백 년 늦다. 뉴욕의 역사는 서울의 절반이다. 아테네 같은 곳은 엄청나게 오래됐지만 사람이 많은 도시는 아니다. 여기에 자연의 존재감을 더해야 한다. 북경은 오래된 거대 도시지만 거의 평지다. 서울엔 자연이 있다. 역사, 규모, 자연 이 세 가지를 더하면 세계에 단 하나의 도시가 있다. 그게 서울이다.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은 이 삼각구도 안에서 이해하면 된다.

그건 서울을 건축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사람으로서, 서울이 그런 도시로 안 보인다는 데 문제가 있지 않나? 한강은 집값 상승의 원천이다. 산에는 가장 비싼 집과 가장 싼 집이 섞여 있다. 세빛둥둥섬, 1백33층짜리 빌딩은 랜드마크에 대한 집착으로만 보인다.
한국엔 랜드마크 마니아가 많다. 한국을 이해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 하나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의 절대 다수가 토건 마피아라는 거다.KYO서울이 원래부터 만들어져 온 도시 조형의 원리를 생각해봤을 때, 서울은 건물이 아니라 자연이 랜드마크인 도시다. 세종로를 보면 알 수 있다. 굉장히 많은 골목길이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양 도시는 길 끝에 건물이 있지만, 서울에 난 길 끝에는 산이 있다. 그래야만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도시를 훑고 간다. 바람길이기도 하다. 도시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기에도 좋다. 길 끝에 있는 경관이 주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포근함이 있다. 서양에서 건물로 만드는 것을, 한국은 자연으로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자연이 랜드마크고 건물은 아니냐? 그건 아니지만, 세종로처럼 자연을 놓고 건물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총체적 경관이 한국의 랜드마크지 높은 빌딩 하나는 아니라는 거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서울은 자연의 스케일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그 앞에 건물 몇 채 지어봐야 안 된다. 그 생각을 갖고 도시 개발을 얘기하는 경우를 한 번도 못 봤다. 특히 공공 영역에서. 환경에 관심 있는 분들은 무조건 자연이라고만 주장하고, 시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무조건 건물 얘기만 한다. 그 사이의 균형에 뭔가 존재할 거라는 얘기는 사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규모, 역사, 자연을 다 무시하고 어디서 빌려온 것 같은 아이디어로 서울을 만들고 있다. 실제로 많이 빌려온다.

파리의 에펠탑,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어디의 마천루가 서울에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
도시를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게 문제다. 파리의 뭐, 리우데자네이루의 뭐 하는 식의 구도에 익숙하니까. 서울을 뭐 하나로 다 설명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이 있다. 서울은 하나의 건물로 꿸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그 이유를, 결국 토건 마피아적 사고방식 이외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없다. 뭔가를 자꾸, 많이 지어야만 한다는 생각. 그것도 큰 걸 지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도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 토건 마피아의 대표적 정서다. 더 빨리 더 크게 더 높이. 올림픽 구호와 같다.

서울이, 도시 건축을 스포츠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게 우리한테 유효한 패러다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유효기간이 지났다. 그건 20세기 패러다임이다. 한국은 사실 그래서 성장했다.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좀 더 섬세한 차원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시민의 문화적 성숙도를 정치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어떤가?
그 반대다. 시민혁명을 경험한 나라치고 한국의 사회, 문화적 민주화는 더딘 상태다. 기관이 공공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에서 그게 잘 드러난다. 서울시도 노력하고 있다. 사업도 많이 벌인다. 의도의 진정성에 대해 별 의심은 없다. 다만, 서울시가 생각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있다. 분명히 시민사회를 위해서 뭔가 하고 있는 건 맞는데, 그 시민사회가 생각보다 넓고 복잡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도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프로젝트가 완공된 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 의회의 과반수가 민주당이 되면서 의회와 언론의 도마에 심심치 않게 오른다.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례로.

당신의 프로젝트가? 한강 다리 위에 지은 카페를 서울시가 의뢰하고, 서울시 의회가 예산 낭비 사례로 지적했다는 건가?
여러 비판이 있다. 서울시는 처음에 그 것을 토목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현상설계라는 것을 토목회사를 상대로 했다. 교량이니까. 그래서 나온 당선작이 목불인견인 거다. 결국 토목회사에 더 좋은 디자인을 해보라 했다. 그러니까 서울에 대해서 평소에 관심 있던 건축가를 섭외해서 일을 한 거다. 그래서 그 프로젝트가 나한테 온 거다.

서울시의 애초 계획과 달라진 부분이 있나?
이 부분이 중요하다. 서울은 굉장한‘ 그린 시티’다. 양적 녹지 비율이 30퍼센트 정도 된다. 세계 어지간한 도시들보다 높다. 베를린 정도 된다. 근데 실제로 서울을 걸어보면 서울이 베를린 정도로 자연적인 도시로 느껴지나? 아니다. 그 어마어마한 녹지 면적 대부분이 북한산 국립공원, 남산 국립공원, 궁궐, 한강 시민공원이다. 일상과 굉장히 떨어져 있거나 돈을 내야 한다. 뉴욕 센트럴 파크 주변의 인구밀도는 시에서도 가장 높다. 그 비싼 맨해튼에도 작은 공원이 많다. 그런 게 도시를 더 녹색으로 만든다. 우리가 한강에 하려고 했던 소위‘ 브리지 카페’는 한강 접근성을 높이자는 거였다. 둔치에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제한적이니까. 88도로나 강북대로에서 차를 타고 접근하든지, 아니면 아파트 단지에 나 있는 토끼굴 내지는 개구멍, 쉽게 말해서 당신이 자가용 소유자이거나, 강변의 비싼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접근이 굉장히 어려운 곳이 한강이다. 이걸 극복해보고자 시작된 프로젝트다. 토목 회사에서 현상설계를 했을 때는, 엘리베이터 하나뿐이었다.

둔치에서 다리로 올라갈 수 있도록?
다리에서 둔치로 내려갈 수 있도록. 그 단계, 엘리베이터만 달랑 다는 상태에서 설계에 참여해달라는 위촉을 받았다. 그래서 기초 자료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봤더니 시설 이용 밀도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극과 극이었다. 한겨울에는 다닐 일이 별로 없고 불꽃놀이 축제를 할 때는 미어터진다. 그래서 계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도 나면 시민들은 어떻게 되나? 버스에선 계속 사람이 내릴 텐데. 다리 위에 고립되거나 심지어는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의 수송능력은 비교가 안 된다. 그 계단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몇개월이 걸렸다. 그랬더니“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층만 위로 올리면 전망도 좋고, 시민들이 휴식도 취할 카페를 할 수 있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다. 수용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시장이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보기에, 그 공간이 카페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망대에 가깝지 않나?
그 다음에 문제가 발생했다. 카페 운영 주체로 등장한 회사가 서울관광 마케팅 주식회사다. 거기서 크기가 너무 작다 했다. 거의 다 지어놨는데 늘려달라는 거다. 이유가 뭐냐 그랬더니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해야 된다는 거다. 점차 주객이 전도되기 시작했다. 질문을 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당신들이 여기서 생각하는 테이블 회전율과 객단가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생각한 건 문자 그대로 휴게실이지 오래 앉아 있는 곳이 아니었다. 커피 하나 사서, 시민공원에 걸어 내려가거나 엘리베이터 타고 가서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집에 가서 자기 전에 잠깐 커피 한잔 마시는 곳. 길어야 20~30분 머무는 공간.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종각에 있는 탑 클라우드 같은 느낌이지. 비싸고, 마음먹어야 갈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거기서 술을 팔겠다는 거다. 와인 바를, 와인 카페를 만들겠다는 거다. 그럼 객단가가 올라가고 회전율은 떨어진다. 그러니 크기를 늘려야 한다는 거다. 나도 와인 좋아한다, 그렇지만 시민 중에서, 거기까지 가서 와인을 마실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며, 그게 공공성이 있는 판단인가? 이 사람들이 참 공공 마인드가 없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개장 후엔 더했다. 서울시에서 홍보자료를 언론에 보냈는데, ‘낭만적인 교량 카페’가 개장했다고 홍보한 거다. 당장 시민들이 블로그 같은데서“ 그 카페에 가라고 다리 위에 버스정류장을 만들었네?” 그런다. 우리 사무실에 아직도 있는 그 프로젝트의 정식 명칭은‘ 한강 교량 보행자 접근 환경 개선 시설’인가 그렇다. 주객이 완전히 바뀐 거다.

한강 접근성을 높이자는 애초의 취지는?
뒤로 가버리고, 카페에만 모든 관심이 쏠린 거다. 결국 공공을 생각하는 마음 자체가 역전됐다는 거다. 건축가인 내가 설계에 욕심이 나서 더 크게, 더 화려하게 하고 싶은 게 맞고, 그들은 공공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하실 순 없다고 하는 게 맞는 거다. 다수 시민들의 입장을 누가 대변하고 있나?

다시 시민사회 얘기로 돌아가자. 시민사회가 공공 건축을 논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지적부터 이 얘기가 시작됐다.
그렇기 때문에 공직자들이 정밀하게 생각을 못하는 풍조가 아직도 있는 거다. 시민사회라는 의식 자체가 아직까지 성숙이 안 되어서. 도시에 대해서 특히 인색하다. 좋은 음악과 안 좋은 음악을 구분하는 취향에 비해 도시, 그러니까 서울사람들이 서울 자체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어떤 심미안은 굉장히 인색하다.

기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이 생각하는 서울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가장 화려한 홍콩의 밤이거나, 가장 높은 미국의 어디 아닌가?
시장이나, 시에서 일하는 고위 결정자들이 개인적으로 누리는 삶의 질을 일반 시민사회도 쉽게 누릴 수 있다고 너무 믿어버린다. 그래서 한강다리 위에서 와인을 팔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공적인 성찰이 없는 거다.

그럼, 서울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공 건축은 뭐라고 생각하나?
절대 다수의 대중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한다. 동시에 질은 상대적으로 높아야 한다. 공공시설은 시장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같은 5백원이라도, 공공시설의 5백원은 상업시설의 5백원 가치보다 높아야한다. 가급적 더 많은 시민이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맞고. 이런 것이 공적 마인드의 세부다. 그게 없다.

‘플로팅 아일랜드‘’ 세빛둥둥섬’은 어떤가? 거긴 지금 유행하는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는데.
우리가 했던 한강 교량 시설과는 성격이 다르고, 나는 플로팅 아일랜드는 반대다.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전시 행정의 결과다. 나보고 그걸 설계해 달라고했으면 안 했을 것 같다. 건축가로서 해보고 싶은 재미난 프로젝트이긴 한데, 십 년 이십 년 후에 어떻게 되어 있을지 생각해봤을 때, 엄청나게 돈만 잡아먹고 별로 공공성도 없기 때문에.

역사, 규모, 자연의 삼각구도로 서울을 이해했을 때, 거긴 규모만 남은 거 아닌가?
서울에서, 그 프로젝트를 결정했던 공직자들은 한강변에서 근사한 데 가서 근사하게 문화를 즐기는 게 좋겠다 생각했을 거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한강 공원이 갖고 있는 최대 장점은 복잡한 도시 서울에서 숨 쉴 공간을 준다는 거다. 도시 전역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거기는 양질의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접근을 쉽게 해주는 게 급선무다. 굳이 거기까지 가서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커피나 와인을 마실 필요가 없다. 거긴 자연을 느끼는 곳이다. 우거진 갈대밭, 억새밭. 진짜 전원 같은 호젓한 서울 풍경들. 도시 중심에 그런 곳이 있는 게 한강의 매력이다. 거기에 기기묘묘한 것들을 만들어놓는 게 매력은 아니란 거다. 서울을 이해하는 삼각구도에서 밀려난 관점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는 반대다.

공공 건축은 그렇고, 건물이 이렇게나 많은 서울에서 건축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뭔가? 한국의 수많은 건축가가 지은 멋진 건물들은 다 어디 리조트, 교외 주택에 있다. 서울은 건축을 즐길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굉장히 뼈아픈 지적인데, 외국 건축가들이 서울에 오면 공통적으로 주는 피드백이 의외로 좋은 건물이 많다는 거다. 그게 눈에 안 띈다고 한다.

건물을 개별 단위로 뜯어봐야 그게 보인다.
공통적으로 조형이 약하다고 한다. 개성이 있는 건물은 별로 없다고. 자기를 드러내는 건물은 별로 없다. 그런 건물들은 또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사실은.

체신청 건물이 대표적이지 않나? 부정적으로 강렬하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외국 건축가가 그런 얘기를 해서 이렇게 답했다. “아, 그거 굉장히 좋은 지적인데, 그것이 유럽 건축가하고 서울 건축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다.” 유럽에서 일급 건축가들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들을 한다.

돌로 된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그건 그 자체로 정체성이지 않나?
유럽 도시들은 우아한 시체라고 보면 된다. 굉장한 역사가 쌓여왔고, 유럽의 건축법을 들여다보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싶을 정도로 옥죄는 법률이 많다. 자기들 화장실도 맘대로 못 고친다고 한다. 지난주에 우리 사무실을 방문한 네덜란드 건축가가 제안한 공동 연구 주제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활력을 유지할 수 있냐는 거였다. 그 제도적 특성을 살펴보고 싶다 하더라. 네덜란드는 인구가 줄고 있으니까 어떤 건물은 통째로 비기도 한다. 공장이나 카페로 바꾸었을 때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건물인데, 용도 변경을 하려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 법률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유럽 도시들이 보기에는 아주 질서 정연하지만, 그런 환경을 갖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공권력의 개입이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왔던 거다. 이젠 그것 때문에 유럽 어떤 도시든 질식사할 위험이 있다.

거기서 건축가들의 창의력이 제한된다는 건가?
반대다. 거기에 소위 ‘아방가르드’들이 가서 신선한 작업도 하고, 숨통도 틔워주는 거다. 그런 식으로 도시가 활력을 유지하는 거다. 그러니까 건축이 돋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서울은 이미 혼돈 그 자체다. 질서도 없다. 그래서 우리 건축가들이 취하는 전략은 오히려 입을 닫고 질서를 만들어 내려는 거다. 그럼으로써 이 도시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안정감, 균형을 보여주려는 거다. 한국 엘리트 건축가의 작품은 조형성이 강하지 않다. 서울은 이미 너무 살아 있는 도시여서 굳이 건축으로 다시 살려줄 필요가 없다. 꼬마들이 운동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와 같다. 애들은 에너지가 넘치지않나? 그걸 주체 못한다. 걔들 운동을 시켜야지, 앉혀놓고 공부만 시키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다. 서울의 활동성도 너무 과하다. 그러니 좀 더 정제된 방향으로 가는 것, 그게 서울 건축가의 임무다. 유럽과는 다르다.

그게 공공 건축, 그러니까 ‘디자인 서울’로 가면 또 달라진다는 건가?
유럽 가서 보고 서울 와서, “야, 걔들처럼 화끈한 거 좀 해봐” 하면, 엘리트 건축가들은 “우리 도시가 필요로 하는 건 그런 게 아닌데”라고 선뜻 물러나고, 이류들이 달려들어서 그냥, 시키는 일을 한다는 거지.

동대문도 자하 하디드 덕에 화끈해지고 있는 중이다.
글쎄, 동대문도 유럽 도시에선 말이 된다. 동대문은 이미 24시간 팽팽 돌아가는데. 혼돈에 혼돈을 더할 필요가 있겠나? 그래서 유럽 건축가들이 서울에 작품을 남기면 보통 성공을 못한다. 그 사람들 작품 목록에서도 빠진다. 자기네들이 보기에도 잘한 것 같지 않은 거다.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디자인은 죽어가는 답답한 유럽 도시, 드레스덴 같은 도시에 지어놓으면 상쇄 효과가 있을 거다.

그럼 서울에 필요한 건 뭔가?
서울은 조용하고 균형이 있고, 사람들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도시다. 효율적인 서울 건물들은 표정도, 말도 별로 없다. 과묵한 건물이 효율적이다. 도시도 자연 같아서, 굉장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미시적으로 진화한다. 그 진화의 방향을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전환하는 게 인간의 몫이다. 서울은 이미 그렇게 가고 있는데, 그걸 조금 더 잘 묶어보자는 거다. 이런 얘기는 빨리 퍼져야 한다. 도시는 생태적이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서울 어딜 가도 공사 중이고, 어디서나 크레인을 볼 수 있다. 혼돈에 혼돈을 더하고 있는 건가?
그 시기도 거의 다 끝나간다. 어떤 사회 어떤 곳이라도 국가 건설을 밀도 있게 하는 기간이 있다. 우린 그걸 20세기에 한 것뿐이다. 애초에 상업 중심이었던 유럽 도시에 비해, 농업 중심이었던 서울에 현대 도시를 만들자니 밀도를 높이는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싫건 좋건 아파트로 주거공간을 획일해버렸고, 많은 역사 문화재를 파괴했고, 한옥도 없어졌다. 그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고속도로 다 깔았고. 항구 다 만들었고. 앞으로 계속 짓기는 하겠지만 지난 50년 동안 해왔던 밀도로 하진 않을 것이다. 건설 회사들이 큰일 났지.

할 게 없으니까?
그래서, 남아 있는 토건 마피아가 대대적인 규모로 발악을 하고 있는 게 4대 강 같은 거다.

서울에서, 건축가로서 느끼는 보람과 분노가 있나?
분노는 생각 안 하려고 한다. 나한테 주는 게 없다. 건축가들은 현실주의자다. 건축은 긍정적인 작업이다.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은 내일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은 세상에 대한 조소나 경멸로 이루어질 수 있다. 건축은 다르다.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에. 보람은 이런 거다. 내가 하는 건축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DNA가 충분히 녹아 있어서, 그 문제를 접근해 가는 방식이나 문제를 풀어내는 태도가 퍼지는 것. 나는 시장 점유율이라는 게 완전히 무의미할 정도의 조그만 규모로 평생 건축을 할 거다.백 층짜리 건물을 설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비록 내가 설계하는 건물이 크지 않고 개수가 적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동원됐던 성찰들은 충분히 서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복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서울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만들 수 있다면 보람을 느낄 거다.

    에디터
    정우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Jung Won 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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