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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시계를 풀렀다

2012.01.06GQ

한동안은 큰 시계야말로 진짜 남자의 시계로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다. 성공의 상징으로 보일 수 있는, 뚝섬의 어느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누군가를 집 앞까지 끌고 오지 않는 한 보여줄 수 없다. 시계는 다르다. 커 봐야 직경 50밀리미터를 넘지 않으니까, 보여주고 싶을 때 손목에 차면 그만이다. 그래서 시계는 남자의 경제력을 드러내는 어떤 수단이 되었다. 남자가 시계의 크기에 민감한 것도 그 때문이다. 벤틀리 컨티넨탈 GT나 마이바흐 62 제플린이 미니 쿠퍼만 한 크기였다면 주목 받았을까? 크고 웅장한 것들은 우선 눈에 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쉽기 때문에 큰 다이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계라는 것이 시간을 보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나타내는 중요한 오브제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겠죠.” 크로노스위스의 브랜드 매니저 김두환 이사의 말이다. 시계 사이즈가 크면 궁금하지도 않은 시간을 보는 척 셔츠 소매를 들추거나, 어퍼컷을 하듯 팔을 들면서 손목을 흔들 필요도 없겠다. 언제부턴가 꾸준히 이어진 큰 시계 유행의 한복판에는 IWC가 있었다. 한 시계 관계자는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 “2005년 이후였어요. 다이얼이 42밀리미터가 넘는 IWC 포르투기스가 나오자마자 시장을 점령했어요. 그 후 다이얼이 큰 시계가 유행처럼 쏟아져 나왔죠. 덩달아 IWC 비슷하게 흉내 내는 브랜드나 시계도 많았고요.” 그는 IWC와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IWC식’ 큰 시계의 열풍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 IWC의 판매량은 어떨까? “손목이 얇은 편인 한국 남자들은 오랫동안 얇고 깔끔한 클래식 워치를 선호했는데, IWC ‘포르투기스’와 ‘빅 파일럿 워치’가 그걸 깼어요. IWC의 매출 성장률은 2005년과 비교해 2010년에는 30배, 올해는 50배에 이르고 있으니까요.” IWC 홍보 담당자 박현정의 말이다. 이 정도라면 그야말로‘ 빅 사이즈 워치’의 약진 아닌가. ‘빅 사이즈’와는 거리가 먼 듯한 까르띠에도 2010년 42밀리미터 다이얼의 남자 시계 칼리브 드 까르띠에를 전개했고, 오랫동안 아담하고 고상한 남자 시계로 남았던 탱크 루이 까르띠에의 ‘XL’ 버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한동안은 큰 시계야말로 진짜 남자의 시계로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유명 시계 제조사들은 매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오버사이즈 워치 컬렉션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수요가 줄어들 거라고 보고 있어요.” 율리스 나르덴의 홍보 담당자 이보경의 말이다. 최근 선전하고 있는 클래식 시계 브랜드의 판매 경향 역시 그 추세를 대변한다. “브레게의 양대 베스트셀러인 ‘클래식’과 ‘트레디션’은 대부분 38밀리미터예요. 심지어 클래식에는 36밀리미터 시계도 있는데, 남성 고객들이 심심치 않게 사가는 모델이죠. 어쨌든 브레게 남자 시계 매출은 대부분 38밀리미터의 클래식 컬렉션에서 이뤄집니다.” 브레게 홍보 담당자 정승아의 말이다. 블랑팡, 예거 르쿨트르, 바쉐론 콘스탄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이들 브랜드에서 가장 잘 팔리는 시계의 다이얼 사이즈는 38밀리미터와 40밀리미터다. 이들 고객 대부분은 40밀리미터 이상의 시계는 부담스러워한다. 클래식한 취향,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미주라 수트를 입고 더블 몽크 스트랩을 굳이 하나쯤 풀어 신을 정도의 분명한 주관을 가진 남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1년, 태그호이어 시계 중에서 유독 잘 팔린 시계들 역시 40밀리미터를 넘지 않는다. “아직도 열 명 중 일곱 명은 직경 41밀리미터 이상인 시계에 관심을 두지만, 간결하고 작은 시계의 수요가 눈에 띄게 늘었어요. 그 영향으로 판매도 양분화되고 있어요.” 태그호이어 홍보 담당자 송지은의 말이다. 경향에 맞춰 2011년에 출시한 까레라 헤리티지 스몰 세컨드, 아쿠아레이서, 뉴 링크 스몰 세컨드는 각각 직경 39, 39, 40밀리미터로, 모두 올해 가장 잘 팔린 시계 10위 안에 안착했다. 벨앤로스의 46밀리미터 BR-01도 꾸준히 팔리고 있지만, 크기만 작을 뿐인 42밀리미터 BR-03은 두 배 이상 더 팔렸다. 그 뒤를 따르는 건 41밀리미터 빈티지 컬렉션이고, 39밀리미터로 가장 작은 BR-S까지 뒤를 바싹 따르고 있다.

이 얘기들을 종합하면 큰 시계의 유행이 주춤한 듯 보인다. 하지만 판도가 완전히 뒤집힌 건 아니다. IWC는 2012년, 더 큰 직경의 ‘빅 파일럿 워치’를 내놓을 예정이다. 48밀리미터냐, 49밀리미터냐의 기로에 섰을 뿐, 더 커질 거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IWC를 사는 남자라면 더 대범하고 더 강력한 시계를 원할 거라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브라이틀링은 의례적으로 44밀리미터의 크로노맷 44의 작은 버전인 크로노맷 41을 출시했지만, 여전히 크로노맷 44의 판매가 월등히 앞선다. 큰 다이얼이 더 ‘브라이틀링스럽다’는 확신 때문이다. 다른 컬렉션에서도 직경을 줄이는 변화를 시도했지만, 베스트셀러로 남는 건 결국 첫 모델이다. 브라이틀링에선 크기가 더 가치를 갖지만, 브레게나 블랑팡에선 큰 다이얼이 별 의미 없다. 결국 사이즈의 문제가 아닌 시계 브랜드마다 지닌 각자의 ‘오리지널’이 핵심이다. 말하자면, 톰 브라운에서 짙은 회색 시그니처 울 수트를 사는 것, 수많은 알든 구두 중에서 코도반 가죽을 쓴 990 모델을 고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에디터
    박태일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손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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