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태풍의 눈

2013.02.26GQ

전태풍이 팀을 옮기자, KBL 지형도가 거꾸로 바뀌었다. 이름 참 잘 지었다.

검정색 턱시도 수트와 흰색 턱시도 셔츠와 보타이는 모두 권오수 클래식, 구두는 비아 바이 이정기.

검정색 턱시도 수트와 흰색 턱시도 셔츠와 보타이는 모두 권오수 클래식, 구두는 비아 바이 이정기.

새 소속팀 오리온스가 무려 6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고 있다. 역시 전태풍 효과인가? 처음 오리온스 들어올 때 목표는 우승이었다. 지금은 일단 6강에만 들면 맘이 편할 것 같다.

당신답지 않은 말이다. KCC에서 첫해 준우승했을 때도 “너무 화가 난다”고 했는데. KCC랑은 차이가 크다. KCC엔 베테랑 선수가 많았다. 분위기가 안 좋아도 시합 뛸 때 집중하면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리온스는 젊은 선수가 많은데다, 6년 동안 플레이오프에 못 올라갔다. 회사나 구단 분위기가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 스텝 바이 스텝.

오리온스는 주전만 놓고 보면 화려하다. 최진수, 김동욱, 윌리엄스. 벤치 멤버가 좀 아쉽나? 구단에서 벤치 멤버들의 자신감을 키워줘야 한다. 연습할 때 일대일을 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혼자 두면 안 된다. 다 실력 있는 선수들이다. 연습 엄청 하는데 시합을 자주 못 뛰어서 아쉽다.

역시 추일승 감독은 주전 선수들을 믿고 가는 쪽인가? 스타팅 멤버들, 그리고 핵심 백업 멤버 몇 명 빼고는 잘 안 믿으신다. 그래서 벤치 멤버들이 자신감이 없다.

고참으로서 어필을 해보는 건 어떤가? 조금 했다. 많이 하면 감독님 좀 삐칠 거다. 하하.

오리온스에선 통역 쓰나? KCC에선 자주 못 쓰게 한 걸로 알고 있다. 일부러 안 쓴다. 통역 쓰면 한국말 실력이 더 떨어질 거다. 또 난 한국 국적이고, 한국 사람처럼 살고 싶은데, 통역 쓰면 ‘내가 아직 한국 사람이 아닌가’ 싶은 맘이 들기도 한다. 계속 한국말로만 하고 싶다.

어쨌든 포인트가드니까, 코트에 들어가면 지휘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거랑은 다르다. 한국말을 잘 못하니까 라커룸 안에선 얘기를 많이 안 한다. 근데 시합 뛸 땐 얘기 많이 한다.

인터뷰는 어떤가? 좋다. 한국 선수들은 원하는 걸 얘기 못한다. 인터뷰 때 그나마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몇 명 안 된다. 위계질서가 확실하니, 주로 빤한 이야기가 많다. “우리 감독님 좋고요”, “나머지 선수들 좋고요.” 이런 거 재미없다. 그럴 거면 인터뷰 왜 해. 다 로봇 같다. 난 이렇게 말해도 혼혈이라서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학 시절엔 어땠나? 스테판 마버리, 크리스 보쉬의 모교인 조지아 테크에서 4년간 주전 포인트가드로 뛰었다. 오우, 완전히 말 많았다. 시합 뛸 때도 그렇고 라커룸에서도 그렇고.

회색 턱시도 재킷과 바지는 비아 바이 이정기, 셔츠와 보타이는 권오수 클래식.

회색 턱시도 재킷과 바지는 비아 바이 이정기, 셔츠와 보타이는 권오수 클래식.

고교 시절 조지아 주의 ‘미스터 바스켓볼’로 선정될 정도로 유망주였는데, NBA 진출엔 실패했다. 너무 속상했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유럽에서 뛰면서도 이건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돈은 잘 벌었지만 계속 실패란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때 구단들이 “아, 넌 2라운드 중반이나 후반에 뽑으면 돼” 이렇게 얘기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 뽑았다. NBA 구단이나 선수들이랑 자주 소통했어야 되는데, 너무 안 했던 것 같다. 확실히 NBA 갈 줄 알았으니까.

NBA 선수 중 질투나는 선수가 있나? “내가 쟤보단 잘하는 것 같은데” 싶은. 하하. 벤치 멤버 가드 전부 다. NBA 팀엔 포인트가드가 보통 세 명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포인트가드 보면 막 짜증난다. “아 쟤는, 아 얘는 뭐야 이거.”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지금도 크리스 폴? 크리스 폴, 스티브 내쉬, 그전엔 앨런 아이버슨, 앨런 아이버슨 전엔 아이재이아 토마스. 작고 수비 잘 뚫는 가드 중심의 쇼타임 농구를 좋아한다.

아무래도 허재 감독이 좀 그립나? 우리 허재 감독님 좀 보고 싶다. 처음 KCC 올 때만 해도 허재 감독 스타일을 몰랐다. 욕도 많이 하고, 눈으로 레이저도 막 쏴서 기분 나빴다. 그런데 뒤에선 “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제치면 3점 슛 그냥 쏴” 그렇게 말해줬다. 대신 다른 사람 앞에서는 팀을 컨트롤해야 하니까 “야, 너 자꾸 이렇게 할 거야?” 그러고.

술도 같이 좀 마셨나? 소주 네 병까지 마신다고 들었다. 조금, 조금. 이젠 많이 마시면 필름 꺼진다. 하하. 요즘 사우나를 엄청 많이 간다. 경기 끝나면 바로 가야 된다. 안 가면 아프다.

야투율이 작년에 비해 5퍼센트 이상 떨어졌다. 야투율은 체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데. 몸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의 문제다. 난 좀 프리 스타일이다. 속공하고 싶으면 치고 나가고, 3점 쏘고 싶으면 3점 쏘고. 그런데 오리온스는 좀 더 꽉 짜인 팀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가는 대로 해야 하는데, 이번 시즌엔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때 아닌 지역방어의 전성시대에, 3초 룰도 없어졌다. 빠른 가드에겐 악조건 중의 악조건이다. 답답하다. 한 명 뚫어도 또 수비가 나온다. 대표팀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 같다. 다른 나라엔 3초 룰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다.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줘야 한다.

대표팀에 뽑히고 싶어서 귀화했는데, 한 번도 안 뽑혔다. 2010년엔 이승준, 2011년엔 문태종….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나? 되게, 되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별 느낌이 없다. 꼴등 아니라는 거에 만족한다. 이승준, 문태종, 그 다음. 꼴등 아니다.

하필 대표팀에 빅맨이 너무 귀할 때였다.
빅맨이 없긴 했다. 그런데 빅맨이 있다고 우리 팀이 이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좀 바꿔볼 수 있지 않나? 좀 잘 제치는 가드, 패스 잘하는 가드로..

좀 더 빨리 한국에 올 생각은 안 했나?
했다. 스물네 살 때부터 KBL에 계속 연락했다.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용병 캠프 있을 때마다 매년 갔다. 그런데 KBL 커미셔너가 매년 “아직 안 될 거야, 지금 안 될 거야” 그랬다. 4년 동안 계속 갔다. 사람 만나고, 얘기하고….

20대의 전태풍의 경기 방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나? 오우, 완전히! 훨씬 더 재미있었다. 개인기가 좋았고, 대신 리딩은 잘 안 했다. 다른 선수들 생각 안하고 혼자 했다. 하하.

은퇴하고도 한국에 살 건가? 할아버지 될 때까지. 한국 농구는 틀에 박혀 있다. 젊은 친구들을 답답하게 한다. 그런 걸 꼭 바꾸고 싶다. 김선형 같은 선수가 필요하다. 난 정말 선형이 팬이다.

그래도 가드 중엔 전태풍이 1등 아닌가? “그럼! 선형이 2등. 완전 2등.”

소문난 트래시 토커다. 수비수에게 무슨 얘길 하나? 아무거나 얘기한다. “야, 넌 쓰레기야.” 하하.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런 게 필요하다. 설렁설렁 뛰면 플레이가 잘 안 나온다. 나랑은 서로 다 트래시 토크 한다. “왜 이 쓰레기야, 너도 쓰레기야.” 하하.

당신을 흥분시키는 건 이미 ‘핵-어-샤크’ 같은 하나의 전략이 된 것 같다. 사실 내 스타일은 원래 흥분하는 거다. 화나면 더 열심히 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감독님들은 싫어한다. 나 좀 놔두지. 심판이랑 좀 싸우기도 하고, 열정 보여주면 관중들도 좋아한다.

경기하면서 안 보일 때 찌르고, 때리고 하는 건 어떤가? 아, 그건 싫다. 정말 싫다. 왜냐면 내가 다른 선수들한테 그럴 땐 심판들이 잡아내는데, 상대방 선수가 나한테 하면 안 분다.

여전히 경기장에서 차별을 느끼나? 휴, 지금도 똑같다. 언젠가 막 무릎에 피 나고 그랬는데도 자유투 한 번도 못 쐈다. 난 KBL 최고의 포인트가드다. 다른 팀에서 벤치 멤버, 신인 내보내서 때리고 괴롭혀도 심판은 모른 척한다. 앞으로 우리 경기할 때 보면 안다.

KBL 최초의 드래프트 출신 귀화 혼혈 선수이자 가장 성공한 귀화 혼혈 선수로서, 어떤 선수로 남고 싶나? “태풍은 완전 달랐어. 그냥 보통 선수 안 하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마음대로 했어. 태풍은… I didn’t follow the trend. 얘 혼자서, 혼자 길로 다녔어.”

    에디터
    유지성
    포토그래퍼
    안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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