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한국 육상의 장애물 경주

2013.04.22GQ

육상연맹은 육상에서 김연아나 박태환이 탄생하기를 바랄 뿐인 걸까?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에서 육상연맹은 금메달리스트에게 10억원의 포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금메달은커녕 6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경보의 김현섭과 결선에 진출한 멀리뛰기의 김덕현이 최고 성적을 낸 선수들이다. 지난해 열린 런던 올림픽에선 더했다. 결선 진출 종목이 하나도 없었다. 기록은 2011년보다 더 떨어졌다. 세계선수권 목표는 ‘텐텐’ 이었다. 10개 종목에서 10위권 진입. 간만에 육상에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결과는 실망뿐이었다. 전부 선수들 탓이라기엔 무리가 있다. 애초에 무리한 목표가 달성 가능한 목표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

무리한 목표를 내세우던 육상연맹은 지난해 개혁안을 발표했다.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5개 세부 종목만 소수정예로 대표팀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5개 종목으로 허들, 높이뛰기, 장대높이뛰기, 창던지기, 남자 10종 경기를 채택했다. 세계선수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경보는 제외됐다. 멀리뛰기도 ‘정책육성종목’에 지정되어 있긴 하지만, 17명의 대표팀 명단에 멀리뛰기 선수는 없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멀리뛰기는 금메달 2개를 딴 효자종목이었다. 개혁안 발표 시점을 기준으로 불과 2년 전 일이다.

물론 현재 채택된 5개 종목의 핵심 선수들은 젊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다른 종목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특출나진 않다. 대표팀이 동계훈련 중이던 지난 연말, 국가대표선수 중 올해 열리는 세계선수권 출전 기록 하한선인 B기준을 통과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장의 기록만 갖고 보는 게 아니라, 마스터플랜이 확실해야 해요. 이를테면 여전히 경보는 가능성이 있는 종목입니다. 선수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고요. 잠깐의 슬럼프는 어느 정도 배려를 해줘야 해요.” 육상 전문가 A가 말했다.

연맹은 기업의 통폐합을 스포츠에서도 구현했다. 육상은 기록경기다. 단시간에 되는 게 아니다. 기존 선수가 못한다고 지도자를 바꾼다거나 선수를 대체한다고 해서 단번에 해당 종목의 기록이 오를 리가 없다. 즉, 육상을 경영자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연맹은 그렇게 했다.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외국인 코치를 뽑은 뒤 얼마까지 기록을 줄일 수 있는지, 목표기록을 낼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고 해요. 코치들은 선수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황당하죠.” 한 실업팀 육상 감독 B의 푸념이다.

육상은 기초종목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육상계는 위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기초종목에 대한 좀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기초종목이 강해야 다른 종목들도 힘을 받는다는 얘기는 맞다.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는 다른 종목도 잘할 확률이 높다. 실제로 중고교 육상 유망주들 중 많은 선수가 중간에 종목을 바꾼다. 하지만 지금 대표팀 구성은 전혀 기초종목답지 않다. 기초란 말은 꼭 필요하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가치는 기초종목이란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연맹은 육상에서 김연아나 박태환이 탄생하기를 바랄 뿐인 걸까? 이미 “김연아, 박태환, 양학선, 손연재 등 특급 스타가 나타나 단숨에 비인기 종목의 설움에서 벗어난 타 종목처럼 영웅을 키워내 도약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번 ‘신 육상인(HERO) 만들기, 5대 희망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취지를 밝힌 터다. 대표팀 개혁 역시 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결국은 육상 전 종목 다 실력이 바닥이라 처음부터 해야 하는 상황인데, 기본을 자꾸 거슬러요. 자기 종목 대표팀 구성이 아예 안 되어 있는데, 선수들이 동기를 얻을까요? 전지훈련 가면 지도자들이 선수 눈치 봐요. 우리가 선수들한테 비전 제시를 못해주니까요.” 실업팀 감독 B 역시 답답한 건 매 한가지였다. 사실 선수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건 지도자가 아닌 연맹이다. 지도자는 연맹이 제시한 비전에 따라 선수를 지도하는 것이 본업이다. 하지만 오히려 연맹의 정책은 선수들의 비전을 빼앗고 있다.

육상 선수들은 조로한다. 중고등학교 기록만 놓고 따지면 준수한 편이지만, 성인이 된 이후론 국제 수준과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대표팀 코치를 하면서 매년 계약을 했어요. 6월쯤 되면 슬슬 불안해요. 그런데 선수들이 나만 따르겠냐는 거죠. 코치가 맘에 안 들면 대충 하는 선수들도 있어요. 어차피 바뀌니까.”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C가 말했다. 언뜻 보기엔 지도자와 선수 간의 알력 문제 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본질은 대표팀 개편과 마찬가지다. 대표팀 운영에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육상계가 그렇게 찾고 있는 박태환에겐 노민상 감독이 있었다. 김연아는 최근 신혜숙, 류종현 코치를 선임했다. 둘 다 어린 시절부터 김연아를 가르친 지도자다. 양학선을 키운 오상봉 광주체중/고 감독은 얼마 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을 앞두고 김덕현은 외국인 코치의 지도 방식이 자신과 안 맞는다며 소속팀으로 돌아갔다. 대신 중학생 시절부터 자신을 발굴한 김혁 코치와 훈련했다. 결국 아시안게임에선 금메달, 세계선수권에선 한국 선수 최초로 멀리뛰기 결선에 올랐다. “원래 하던 사람이 하도록 놔둬야 하는데, 좀 잘하는 선수가 있으면 자기가 키워주겠다면서 달려들어요. 그러면서 선수가 망가지죠.” 전 대표팀 감독 C의 지적이다.

취재원 중 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한 육상 담당 일간지 기자의 얘기를 꺼냈다. 연맹의 오류를 지적하는 기사를 자주 썼는데, 육상연맹은 지적을 받아들이기보다 종종 반박기사를 냈다고 한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결국 기자는 회의를 느끼고 다른 종목으로 떠났다. 기자는 떠날 수 있지만, 대표급 선수들은 떠날 수가 없다. 연맹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피해를 보는 건 결국 다름 아닌 선수들이다.

지난 설날에도 어김없이 <아이돌 육상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명절 특집 프로그램 중 시청률도 높은 편이다. 씨스타의 보라와 샤이니의 민호가 달리기를 잘한다는 건 이제 어지간한 젊은이들은 다 안다. 육상은 쉽고, 룰을 정확히 몰라도 흥미롭다. 세계육상선수권은 월드컵, 하계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이벤트로 꼽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늪에 빠진 한국 육상과 별 상관이 없다.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Kim Sang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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