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잠 없는 엘리트

2014.08.20이충걸

E.L.

어렸을 때 어른들은 하나같이 강조했다. 나폴레옹은 하루에 4시간 잤고, 다빈치는 5시간 잤다고. 나이팅게일과 에디슨도 거의 안 잔 거나 마찬가지였다고.(근데 사당오락四當五落의 시절이라면 다빈치는 대학입시에 떨어졌겠네?) 결론은, 잠 없는 엘리트, 불면증의 귀족, 강인한 영혼들은 고작 몇 시간만 자고도 세계를 정복했다는 건데, 똑같이 부모와 사회와 신이 만든 존재긴 하지만, 우린 스티브 잡스가 아니다. 4시간만 자고도 총선에서 3번이나 이긴 건 마거릿 대처 이야기일 뿐. 글쎄, 노인이 돼 잠을 줄여봤자 그땐 너무 늦었으려나?

잠으로 하루를 탕진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꼭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오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아. ‘많이’ 사는 게 중요하지. 누구에게는 잠이 최고의 순간일 수도 있겠으나,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 잠은 죄의식을 주는 긴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잠은 분명 먹는 것, 웃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어떤 성취만큼 간절한 생의 기쁨. 게다가 잠은 또 하나의 섹스와 같다. 잠에 대한 질문은 섹스에 대한 질문과 어지간히 닮았다. 충분히 자고 있나? 잠의 질은 좋은가? 양은? 수면 시간은 적당한가? 얼마만큼이 적당한 양이라는 건가?

문제는, 다들 필요 이상으로 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잠을 못 자기 때문에. 불면증 환자들은 통계보다 더 많다. 우주론이나 엔트로피 같은 문제에 지적인 소매를 걷고 들어가면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너무 더워서. 너무 추워서. 그놈의 카페인 때문에. 그놈의 술 때문에. 치아 교정기가 아파서. 그걸 뺀다는 걸 깜빡해서. 빈뇨증이 있어서. 오줌을 누고 잘지 그냥 잘지 갈등하느라. 옆에 인간이 누워 있어서. 구석에서 고양이가 뒤척거려서. 너무 일찍 자리에 누워서. 너무 늦게 자리에 들어서. 낮에 화나는 일이 생각나서. 내일이 기다려져서. 어제 잠을 진짜 많이 자서. 잠이 안 오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느라. 그 와중에, 무심한 찰나를 평생 가두려고 멜라토닌 호르몬을 줄이는 밝은 스크린에 착 달라붙어선 소요하는 생각을 140자로 욱여넣고, 1분에 5백 번 아마존을 클릭한다. 도대체 자기에게 잠을 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밤과 아침 사이에 억지로 잠을 끼워 넣어 8시간을 자고 일어나는 인공적인 수면 패턴이 언제부터 신성시된 걸까. 1차 세계대전 초기, 군수품 노동자들이 숙취 상태로 출근하거나 결근하는 걸 막기 위해 영국에서 도입했다는 이론과 상관없이, 어쨌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야 한다. 기린은 2시간, 코끼리는 4시간, 비단뱀은 18시간, 호랑이는 16시간. 사람은 8시간을 자야 한다는 명제는 월드컵 4강, 부동산 호황, 블랙 프라이데이 쇼핑, 멀티 오르가슴과 동격의 강박이 되었다. 오직 캘리포니아에 사는 랜디 가드너만이 11일 동안 안 자고 버틸 수 있다. 4일 동안 2시간만 자고 3번째 일출을 본 포항의 어부 친구는 환각의 벼랑에 떠밀려 자기가 히딩크라고 생각했다. 교통 표지판을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헛것이 수시로 보이고, 또 아주 그럴듯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수면 폭식을 했다 하나 결국은 못 잔 셈 아닌가.

수면 위생이라는 말은 얼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불면증에 대한 책은 새로운 (문학) 장르가 되었으니 불면증은 나름의 언어를 낳았고, 지금 모두 그 언어가 유창하다. 사실 불면증만 한 사업도 드물다. 처방전에 적힌 수면제나 수면 클리닉은 말할 것도 없고, 거칠건 부드럽건 꿈의 나라로 인도하는 테라피는 열거할 수조차 없다. 곧추선 근육과 성근 영혼을 진정시켜주는 아로마 오일, 캐모마일이 들어 있는 미드나잇 밀크셰이크, 쥐오줌풀이 함유된 허브 알약, 목의 체적대로 받쳐주는 베개, 살짝 데운 우유, 방구석에 둔 양파, 베개에 뿌리는 스프레이, 귓불에 붙이는 약, 최면을 거는 앱…. 하지만 다 소용없다. 그것들은 다들 오늘 밤 잠을 잘 거라는 희망 없이 자리에 눕는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오늘 못 자면 큰일이라는 차가운 두려움은, 욕구란 즉각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불면증 확인 행동을 강화시킨다. 결국 잘 수 없다. 잠은, 부를 때는 절대 오지 않는 고양이와 같고, 아예 무시해야 관심을 주는 거만한 미녀와 같고, 가장 필요할 때 결코 입금되지 않는 원고료와 같아서. 정말 억울한 건, 불면증은 종종 긴장이나 우울증의 증상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골자는 무위無爲. 밖에 나가 당근을 뽑거나, 막 피려는 꽃을 잡아떼거나, 유충이 어서 번데기가 되라고 재촉하는 대신 눈을 감고 곧 펼쳐질 잠의 세계에 입회하려 하지만… 감은 눈 속에 기하학적인 패턴이 슬라이드 쇼처럼 스쳐간다. 가수면 상태로 잠깐 깨면 천장에 무등산 수박만 한 거미가 매달려 있거나, 심술난 타조를 닮은 익룡이 날개를 펄럭거린다.

문득 뭔가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거나, 냄새가 난다. 내 방에 없었던 것들이다. 나의 즉각적인 감정은 묻는다. 무슨 소리지? 저 형체는 뭐지? 환영은, 실제 지각 같은 중립적 경로로 생기지만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도 아니다. 그냥, 스위치를 끌 수가 없다….

클리셰는 우리가 삶의 3분의 1을 자는 데 쓴다는 것이다. 더 씁쓸하고 게슴츠레한 진실은 나머지 3분의 1을 잠들기 위해 용을 쓰며 보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깨어 있는 것보다 잠을 자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잠은 죽은 뒤 영원히 이어질 어떤 상태에 대한 연습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매일 잠자기가 힘들어서야 죽어서도 영면에 들지 못할까 봐, 그게 좀 걱정되긴 한다. 그건 그때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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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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