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속 터져 죽지 않기 위해

2014.11.14GQ

뻔뻔하다와 당당하다는 그 의미가 전연 다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뻔뻔한 사람도 당당하게 살아간다. 뻔뻔한 게 유능하다는 뜻이 되어가는건 아닐까? 뻔뻔한 사람을 뻔뻔한 사람이라고 정당하게 배제하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살폈다.

Book판형

 

당신 앞에 편의점 알바가 있다. 잠시 그가 하는 노동을 상상해볼까? 가급적 세세하게. 알바경험이 있으면 알겠지만, 편의점의 단순 노동은 세세하게 나누면 생각보다 복잡하다. 알바가 받는 시급은 상품을 받고, 진열하고, 관리하고, 계산하고, 정리하는 수백 가지 노동에 붙은가격의 합이다. 그렇다면 편의점 알바가 당신에게 건넬 친절 노동에는 얼마의 값이 붙어 있을까. 시급에 매겨진 친절 노동값을 시간당 평균 손님수로 나눈 것이 당신이 지불하는 비용이다. 아무리 넉넉하게 잡더라도 고작 몇십 원을 넘지 않을 것이다.

십 원짜리 친절. 소비자인 당신이 비용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편의점 알바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친절 노동은 십 원어치가 적절하다. 알바는 사회적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담담한 태도 이상으로 소비자인 당신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당신의 필요에 어울리는 직무를 순조롭게 처리하면 충분하다. 택배 노동, 전자제품 서비스 노동, 고객센터 전화 응대 노동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받는 시급 혹은 월급에서 당신을 향한 친절 노동에 할당된 값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소비자인 우리가 그들의 감정 노동에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지도 않으면서, 십 원어치의 수천 수만 배가 될 대접을 당당하게 요구한다면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뻔뻔하시네요.”

소비자로서 대접을 요구하는 마음이 뻔뻔하다는 지적은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가벼운 진상 손님부터 라면 상무까지, 뻔뻔함이 일상화되었다는 방증은 수시로 확인된다. 소비자인 우리에게는 이렇게 누구나, 언제든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뻔뻔해질 수 있는 특권이 예비되어 있는 셈이다. 감정 노동은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므로 사회적 친절의 수위는 낮으면 낮을수록 좋다. 그럼에도 십 원짜리 친절의 수위도 대접 수준으로 높여놓은 데는, 사회적 차별을 넘어 계급 사회로 굳어가는 현실을 모두에게 가상적 특권을 부여해서 희석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마저 든다. 후임만 있다면 이병도 누릴 특권이 생겨서 견딜 만하니까.

이 글에서는 가상적 특권 의식이 체화된 ‘뻔뻔이’들과 어쩔 수 없이 엮이는 ‘우리’가 어떡하면 ‘속 터져 죽지 않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뻔뻔이’는 아론 제임스의 <그들은 왜 뻔뻔한가>, 하야미즈 도시히코의 <그들은 왜 남을 무시하는가>, 윌리엄 어빈의 <알게 모르게, 모욕감>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짝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물론 뻔뻔함은 어디에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뻔뻔하듯, 나도 누군가에게 뻔뻔하다. 이런 일반적인 뻔뻔함과 뻔뻔이는 이렇게 구별할 수 있다. 무개념, 진상, 꼴통 등과 겹치는 뻔뻔이는 뿌리 깊은 특권 의식으로 대인 관계에서 자신이 특전을 누리는 것을 스스럼없이 허락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불만과 항의 따위에는 이미 면역이 되어 끄떡없는 부류.

누가 뻔뻔이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갈릴 수있다. 판단은 그가 그런 행동을 할 ‘권리가 실제로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앞에서 말한 감정노동은 노동자의 ‘자발적으로 강요된’ 호의가 계속되니까 소비자가 권리로 아는 경우에 해당하지, 소비자가 그런 대접을 받을 권리를 갖고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난 그래도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뻔뻔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뻔뻔이는 그런 행동이 성격에 완전히 스며들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인물 유형이고, 바로 이런 점에서 일시적인 무개념, 진상, 꼴통과 구별된다.

“나는 특별해”라는 굳은 믿음에서 뻔뻔이의 모든 행동이 나온다. 그들은 타인을 경시하면서 자신은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가상적 유능감’을 갖고 있다. 그들이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행동은 “내가 누군 줄 알아?”라는 말의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의 관심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리려고 직접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입 밖으로 뜨거운 똥을 토해낼 만큼 뻔뻔하달까.

이러니 이들이 일반적인 행동 규범을 스스로에게 적용할 리 없다. 오히려 사회적 예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당연한 삶의 습속으로 여긴다. 살다 보면 몇 번쯤 새치기를 하거나 말을 자를 때가 있지만, 뻔뻔이는 자신은 매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이 생일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면 뻔뻔이에게는 매일이 생일인 셈이다. 타인을 존중하면서 대접을 받는 것도 가능한데, 뻔뻔이는 대개 자신이 대접받기 위해서는 남을 무시하거나 남이 모욕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뻔뻔이의 뻔뻔함을 특징 짓는 핵심은 부당한 특권 의식이므로 그들이 항상 진상을 부리거나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압구정 어느 아파트의 주민이 경비원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같은 패악질이 압도적으로 많겠지만, 얼마든지 우아하고 고상하고 점잖은 뻔뻔이가 존재할 수 있다. 특권 의식으로 가득한 예의 바른 ‘꼰대’의 뻔뻔함이 그 한 예다. 하지만 공손한 뻔뻔함이더라도 운 나쁘게 뻔뻔이와 엮인 누군가가 저비용 고효율의 감정적 민폐를 겪는 것은 똑같다.

이런 뻔뻔이들을 변화시킬 현명한 방법이 있을까. 서둘러 말하자면 ‘절대 없다’고 생각하길 권한다. 왜냐하면 뻔뻔이는 결코 듣지 않으니까. 그들은 들어도 듣지 않는 ‘는데’의 인간이라서 뻔뻔할 수 있다. ‘알았는데, 알겠는데, 들었는데, 나는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이 반성을 통해서 자기 성찰을 한다면, 뻔뻔이는 반성을 통해서 자기 확인을 강화한다. “음, 이런저런 얘길 들어봐도 역시 내가 맞군.” 그들이 가진 자부심은 정말 끄기 힘든 불과 같다.

그럼에도 대처 방식을 몇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속 터져 죽지 않기 위해’ 쓸모가 없지는 않다. 먼저 ‘내적 대응’과 ‘외적 대응’으로 나눌 수 있다. 내적 대응은 뻔뻔함으로 유발되는 마음의 상처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다. 외적 대응은 개인적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에 따라 ‘탈출, 체념, 저항’으로 드러난다. 우선 뻔뻔이와 얽힌 관계가 ‘헤어져도 괜찮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다.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거나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

지인 모임이나 위계가 약한 사회적 관계들처럼 ‘헤어져도 괜찮지만 도망가기 어렵다’면 자신을 방어할 호신술(述)을 연습해도 좋겠다. “내가 누군 줄 알아?”라는 요구에는 “모르겠는데요” 이상의 대답이 없다. ‘알아줘’에는 ‘몰라줄게’로 응대하기. 예전 어느 방송에서 변희재를 ‘몰라주던’ 낸시랭의 전략처럼, 모든 위계나 유명함은 그 위계와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면 일시적으로라도 와해된다. 사단장도 군대를 벗어나면 그냥 아저씨이고, 워렌 버핏도그를 모르는 사람 앞에선 슬리퍼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백인 노인일 뿐이듯.

직장이나 가족 등과 같이 ‘헤어지기 어렵다’면 탈출은 최후의 선택으로 멀어진다. 오히려 외면과 묵살의 방식으로 체념하거나 따끔한 말로 일갈하는 저항이 손쉽달까. 그러나 뻔뻔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헤어지기 어려운’ 관계에서는 뻔뻔함의 현장에서 도망가는 탈출도, 현장에 머무르는 체념도, 현장을 바꾸려는 저항도 장기적으로는 거의 무력하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비관적 낙관, 절망적 희망, 체념적 시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뻔뻔이를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왜 우리가 이런 시도를 해야 할까. 체념이든 저항이든 헛된 노력을 하는 목적이 뻔뻔이를 제외한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뻔뻔이에게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삶을 소모해선 안 될 것이다.

“피하라.” 이제껏 얘기한 것을 요약하면 이 한마디가 된다. 뻔뻔이에게서는 가능하다면 무조건 도망가라. 도망갈 수 없다면 꿈틀대야 하며, 그 목적은 뻔뻔이의 변화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그것을 통해 만들어질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다. 다만, 어느 아파트 경비원처럼 도망갈 수도 꿈틀댈 수도 없어서 뻔뻔이의 샌드백이 되고 마는, 감정과 존중의 취약계층이 거기에서 가라앉고 있다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한다. 이 과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도망 갈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우리가 사회에 치러야할 대가라는 것도.

    에디터
    글 / 박준석(문학평론가)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