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과 연속

유병재는 자신을 코미디언이라 말했다. 웃긴다는 확신만 있다면 뭐든 계속하겠다고 했다.

트렌치코트는 산드로옴므, 여자 속옷은 모두 아장 프로보카퇴르.

극한직업의 유병재는 “연기 잘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예능에서도 비슷하니까 “얘 여기서도 연기하네”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죠. 내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나? 어디까지 연기지? 지금 이 인터뷰를 하면서 짓는 표정도 연기일까?

한편으로 자기가 잘 하는 것이 뭔지 아는 사람이란 생각도 들어요. 제가 원래 개그맨을 꿈꿨다 안 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이에요. 물론 시험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만약 붙었다면 내가 싫어하는 것도 해야 되잖아요. 예를 들어 누가 뺨을 때리면 “왜 때려요!” 이렇게 바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맞은 뒤에 눈치를 보는 게 더 재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표정을 더 잘하고. 그래서 다른 루트로 온 거예요. 제가 작가 일을 하면서 저한테 어울리는 연기만 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제가 못 살릴 것 같으면 다른 사람 줘요. 누구한테 잘난 척을 한다든지, 고함을 지르는 건 저한테 잘 안 맞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떨떠름하고 무던하니, 과하단 느낌이 없죠. 코미디가 뭘까 계속 고민을 하는데 감히, 그나마 한 단어로 말하자면 기대배반인 것 같아요. 물론 관객이 기대한 대로 반응을 해도 웃음은 나와요. 하지만 기대와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때의 쾌감이 더 커요. 제 코미디의 방식이 완전 새로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없던 스타일이라….

무심한 유병재를 요즘 제일 흥분시키는 건 뭔가요? 프로레슬링을 좀 좋아해요. WWE 레슬 매니아 31편이 진짜 잘 나왔어요. 올해는 엔딩도 신선하고 기대에서 벗어난 장면도 꽤 많이 나왔어요.

어떤 선수를 좋아하죠? 옛날 레슬 매니아를 다시 보고 있는데, 숀 마이클스가 진짜 좋더라고요. 어느 한 부분 빠지는 게 없어요.

숀 마이클스야말로 ‘리액션’이 뛰어난 레슬러였죠. 상대 공격을 실감나게 맞아주잖아요. 유병재처럼. 저요? 저는 뭐, 자주 맞아주는 사람이죠.

그런데 왜 하필 맞는 연기였나요? 방송에 출연하기 전 UCC에서부터 맞는 연기로 유명해졌어요. 예전에 최양락 아저씨가 콩트에서 자주 쓰시던 ‘깐족깐족’ 하던 패턴 있잖아요. 그게 지금 봐도 정말 웃겨요. 거기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정확히 어떤 감정으로 그 뺨 맞는 프리스타일 랩 배틀 영상을 찍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지하철 타고 친구 집 가다가 문득 떠올라서 바로 찍은 거거든요.

유병재는 작가인가요, 개그맨인가요? 그냥 코미디언인 것 같아요. 그 안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외국엔 저 같은 케이스가 많잖아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면서 영화도 만들어서 찍는다거나. 제가 작가로 시작해서 좀 다르게 보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코미디언 분들도 자기가 다 꽁트 짜고 작가가 감수만 해주는 경우가 많아요.

TV 밖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사람이에요. SNS에 쓴 말을 모은 ‘유병재 어록’도 있죠. “젊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어도 젊은이는 헐값에 살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같은. 이율배반적인 얘기긴 한데, 그게 싫기도 해요. 어록이나 일침 같은 말. 어쨌든 제가 올린 것들이 맞긴 하지만 누굴 가르치고 훈장질하고 이런 것 자체에 되게 거부감이 많거든요. 그래서 강연 섭외 같은 게 들어와도 거의 안 해요.

수트와 셔츠는 모두 이스트로그, 데님 타이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일침과 어록이 싫어서 쓴 말이 다시 일침과 어록이 되는 상황인가요? 그런 얘길 쓰는 이유는 어떤 상황이 있으면 그걸 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제가 정리한 생각을 생략하고 줄여 쓰는 연습을 꾸준히 해왔어요. 작가 일 하면서. 구구절절 다 말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SNS를 코미디의 한 채널로 쓰고 있는 거긴 한데, 어쨌든 좀 부끄럽죠.

< SNL > 코너였던 면접전쟁, 인턴전쟁이 결정적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이제 유병재의 코미디에 뼈가 있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단순하게 웃기는 것도 정말 좋아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아,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같은 말을 듣는 게 더 기분 좋거든요. 실제 제 나이대 주변 친구들이 겪고 있는 일을 얘기하다 보니까 더 좋게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거창하게 세대를 대변한다거나 하는 말은 좀 부담스럽기도 해요.

작가와 주연을 맡은 새 드라마 < 초인시대 >도 동년배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죠? 이른바 ‘루저 감성’이라 말할 수도 있는. 외피는 히어로물인데, 사실 초능력 쓰는 것도 거의 안 나오고 다 현실적인 내용이에요.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제 또래들을 삼포세대라고 하잖아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사회가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죠. < 초인시대 >를 통해 그래도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그래서 무능력하다는 20대 중반 남자에게 초능력을 주자는 아이디어를 냈고요. 물론 극 중에서는 초능력이 있어도 취업도 잘 안 되고, 사랑도 못하고 그래요.

진짜로 초능력이 생긴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 초인시대 >에서 제가 갖고 있는 초능력도 그거예요. 청춘의 가장 큰 무기가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당장 권력도, 돈도, 명예도, 자존심도 없을 수 있지만 시간은 누구보다 많잖아요.

하지만 유병재는 동년배 친구들과 달리 성공한 ‘위너’라 말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얘기하는 분이 있으면, 제가 듣고 받아들여야죠. “아냐. 내가 얼마나 병신이냐면”이라는 식으로 나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왜, 친한 친구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가난 배틀이라는 게 붙잖아요. “우리 집 화장실은 똥이 산처럼 쌓인 적도 있어. 퍼낼 돈이 없어서” 뭐 이런 얘기들. 그런데 고생은 상대적인 거라서 자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돈 자랑, 술 자랑, 주먹 자랑처럼. 저도 똑같이 시청자로서 고민해본 적이 있어요. 예를 들어 <무한도전>에 나오는 분들은 대한민국 톱인데 그렇게 ‘평균 이하’라고 자칭하는 게 맞나? 주성치는 영화에서 루저 역할을 맡는데 실제로 그가 루저인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슬슬 새로운 방식의 코미디가 필요한 시점일까요? 나름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SNS를 하는 이유도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어디 가면 불쌍한 표정 지어주세요, 울어주세요 이런 주문 받는 게 좀 싫기도 하거든요. 그것만 시키니까.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아직은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시키는 거잖아요.

다른 개그맨들로부터 빼앗고 싶은 능력 같은 게 있나요? 김영철 씨나 광희 씨처럼 밝은 분들 있잖아요. 전 그게 안 돼요. 혼자 막 이미지 트레이닝도 하고, 거울 보며 웃는 연습도 해보고 그랬는데도. 누군가는 스위치를 켠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가만히 있다가도 인터뷰할 때나 방송할 때는 “자!” 하면서 에너지를 내는 거죠. 일부러 촬영 전날 밤을 새울 때도 많아요. 약간 몽롱해지면 재미있는 말이 나오는 것 같아서.

요즘 즐겁나요? 아니요. 사실 별로 즐겁진 않아요. 좀 무서워요. 겁이 많이 나죠. 일주일에 3일은 행복해요. 흥분되고 오늘 잘했다 싶기도 하고. 그런데 4일은 좀 재미없고 힘들고 그래요. 그렇지만 전 일주일에 이틀만 행복해도 되게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직업이 취미도 아니고. 저도 처음엔 하기 싫은 거 안 하고 싶어서 개그맨 시험 포기하고 UCC 만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하기 싫은 일도 몇 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떼쟁이 같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는 말 자체가.

티셔츠는 쟈딕 앤 볼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