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한국 힙합, 한국 남자

2017.03.03GQ

한국 힙합 속 ‘한남’은 힙합의 고유한 남성성과 는 별 상관이 없다.

평소 줄임말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꼭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때를 제외 하곤 약어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눈과 귀를 습격하는 탓에 불가항력적으로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는데, ‘한남’이 그렇다. 한편으론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행해지는 선 가르기, 그러니까 여느 한국 남자들과 본인을 분리해 우월한 위치에 놓으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봐 의식적으로 거부한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줄 알았지만, 내 무의식은 어느 쪽으로든 이미 한남이란 용어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듯하다. 이는 SNS와 현실 세계에서 쏟아지는 한남 비판에 발끈해 동시다발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남성들의 반응을 보며 쌓인 결과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같은 우려 자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21세기에 등장한 많은 조롱 화법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충’ 붙이기의 일종인 ‘한남충’과 달리 한남은 이전부터 수많은 남자가 일상에서 당연한 듯이 써온 “한국 여자는~”의 남성 버전과 다를게 없다. 다만 보다 활발하게 공론화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철저히 남자의 기준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부류의 여성을 혐오와 비하의 수식으로 특정한 ‘김치녀’, 혹은 ‘된장녀’ 같은 용어와 비교하는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국 ‘한남’에 분노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처럼 의미부여가 뿌연 상황에서 단지 대상화됐다는 사실만으로 화를 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찌 보면, 여성들이 지적하는 한국 남자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난 (한남과) 다른데?’와 ‘(한남이) 왜 문젠데?’ 중 어느 쪽이든 간에 말이다.

어쨌든 점점 여성 문제가 적극적으로 대두되고 이를 둘러싼 남녀 간의 논쟁이 격해지면서 ‘한남’이 품은 부정적인 의미는 배가되어 쌓여가는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같은 흐름에 기름을 부은 것 중 하나가 바로 랩/힙합이다. 근 2~3년 사이 힙합이 한국 대중음악에서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게 되고, 그 이면으로 여성 혐오 논란을 불러일으킨 랩 가사들이 부각 되면서 한국 남자란 존재를 향한 차가운 시선은 고착화되는 것을 넘어 경멸 수준으로 변화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힙합과 한남을 한데 엮어 원샷 투 킬하는 SNS상의 수많은 비하 글들은 꽤 아프게 다가온다. 그들이 말하는 힙합 속 한국 남자의 모습 혹은 정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건 이것이 힙합 음악 속에 전 세계 공통으로 내포된 남성성과는 또 다른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힙합 가사의 근간이 되어온 남성성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극심한 인종 차별과 적자생존의 현실 속에서 남성다움이 불문율과도 같았던 흑인들의 상황을 바탕으로 형성됐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한국 힙합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운다는 수컷 전설에 기반을 둔 드렁큰타이거의 히트곡 ‘남자기 때문에’는 미국 힙합의 그것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한국 힙합에서 새롭게 부각된 남성성은 궤를 좀 달리한다. 이전까지 앞서 예로 든 드렁큰타이거의 곡을 비롯한 많은 래퍼의 가사가 미국 힙합의 마초성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했다면, 근 몇 년 사이 나온 곡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한국 남자 특유의 성질이다. 그것이 때론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부정적인 결과와 맞닿아 있는데, 전자든 후자든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 오며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바가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가부장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가사들이다. 일례로 스윙스, 도끼, 더 콰이엇이 함께 부른 ‘일 안 해도 돼’에선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을 미덕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의 오랜 통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든 벌스에서 돈 벌어다 줄게, 넌 일 안 해도 돼로 귀결되는 가사는 단순히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는 순정과 해줄 수 있다는 과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여자는 돈만 넉넉히 벌어다 주면 언제든 경제 활동을 그만두고 기꺼이 한 남자 혹은 가정에 투신할 거라는 통념에 기반한다. “난 절대로 어지러운 저 거리로 널 보내지 않을 거야. 어디로든. 넌 편히 있어. 걱정들은 모두 버리고 늘. 돈은 내가 벌게. 둘이 다 쓰고 남을 정도로. (중략) 넌 그냥 나의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일은 안 해도 돼.” 여성 차별이 심각한 사회라서 걱정하는 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해결책이 일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으라는 식이라면, 또 다른 측면에서 차별적인 시선을 견고히 할 여지가 있다.

여기서 좀 더 확장되면 나오는게 바로 여성을 특정 프레임 안에서 대상화하는 가사들이다. 아마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많은 한국 래퍼가 묘사하는 여성은 남자가 하는 일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고, 바쁨을 이해하지 못해 칭얼대는 존재들이다. 버벌진트와 산체스가 2015년에 발표한 ‘싫대’의 첫 부분에서도 이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she said 오빤 너무 바빠서 싫대, 모처럼 만나서 쉴 때, 그때도 내 정신은 일과 음악에 반쯤 가 있는게 짜증난대.” 권익신장과 양성평등의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여성의 사회 진출 자체가 눈에 띄게 늘어난 오늘날, 한국 남자들 사이에서 긴 역사를 지닌 한국 여자 클리셰가 여전히 1차원적으로 쓰인다는 건 다소 민망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건 약과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 그렇게 대상화한 여성에게 맹목적인 이해를 요구하는건 물론 통제하길 원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가사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싫대’와 마찬가지로 “오빠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사이먼 도미닉의 ‘ ₩ & ONLY (WON & ONLY)’는 대표적인 예다. 이 곡에서 남자 일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제시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상대가 입은 금전적인 수혜다. “근데 넌 대체 왜이래? 내가 해준게 얼만데 나 땜에 삶이 달라진 널 봐 bae,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인 거라메? 다 아니까 일할 땐 그만 내게 뭐라 해 okay?” 랩 듀오 언터쳐블이 2010년에 발표한 ‘MC’ 에선 한국 남자의 치졸함이 더욱 극대화된다. “너무 바빠서 잠잘 시간 없어 꽉 찬 스케줄, 여자친구 바쁘다고 내게 화를 내도, 지금 힙합 하니까 제발 전화 좀 그만해줘, 옛말에 뿌린 만큼 거둔대, 날 방해하면 넌 가질 수 없지 명품백.” 명품 가방 좋아하는 여자는 곧 된장녀로 치환 해버리거나 여자는 명품 백을 무조건 좋아한다는 정서가 한때 팽배했고,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체감케 하는 구절이다.

그런가 하면,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국 남자 스스로가 형성한 고정관념에 함몰되어버린 예도 더러 있다. 리쌍의 히트곡 중 하나인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에서 화자는 사랑이 변한 이유로 서로의 욕심을 탓하는 한편, 자기 비하를 내비치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몇몇 구절, 특히 마지막 구절(“사랑에 묶이는 남자는 약해 빠진 걸까, 사랑을 굶기는 남자는 무능력한 걸까, 비밀을 숨기는 남자는 나뿐인 걸까, 사랑 대체 왜 변하는 걸까”)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결국 이별의 원인은 한국에서 남자로서 최선을 다한 그를 이해하지 못한 여자의 탓이다. 이 외에도 키 크고 자신감 넘치는 여성에게 지레 움츠러드는 심리와 남자의 동정에 대한 기묘한 집착, 그리고 간호사에 대한 왜곡된 성적 대상화와 남자가 윤락가를 다녀오는 것이 당연한 통과의례 인듯 묘사하는 블랙넛의 ‘8만원’, 자신의 무능력함을 탓하는 듯하지만 실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신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만 드러낸 MC스나이퍼의 ‘뒤로 가는 남과 여’ 등등, 이른바 힙합 가사 속 한남을 만날 수 있는 예는 많다.

오늘날 힙합과 한남을 묶어서 비판 혹은 비난하는 기저에는 필연적으로 여성 혐오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예로 든 곡들을 비롯해 한남 정서가 투영된 곡을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여성을 혐오하고자 만든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 남자로 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적인 사회의식이 쌓이고, 그것이 해당 래퍼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성 혐오 및 비하로 발화되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두 부류로 나뉜다.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거나. 그리고 이때 힙합계 외부로부터 공격이 가해지면, 한남 정서는 곧 힙합 음악이 내포한 고유의 특성(남성성)으로 잘못 치환되고 정당화된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지점이다. 애초에 미국 힙합의 그것과는 출발과 맥락이 전혀 다르고, 설령 같았다 한들 각 사회의 가치 판단 아래 결정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건 힙합과 한남에 쏟아지는 비판에 “그게 왜 문제야!”라며 대립각을 세울게 아니라 “그게 왜 문제일까?”를 한 번이라도 고민해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힙합과 한국 남자의 꺾인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첫 단계다.

아직 ‘한남’이 한남동을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안다.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부를 때 감지되는 특별히 우스운 뉘앙스는 불과 얼마 전에 생겨났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남자들의 말과 행태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어째서 ‘한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제야 시작됐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20173월, 당대의 한국 남자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남자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한국 남자도 답변해야 할 때다.

    에디터
    강일권 (리드머 편집장, 음악평론가)
    포토그래퍼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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