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은영을 한번 키워보자”

나는 당신에게 제안한다. 이 작가를 한번 키워보지 않겠는가. 더불어 함께 시간을 보내보지 않겠는가. 한 소설가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겠는가.

여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한 소설가가 있다. 10년 뒤, 20년 뒤, 50년 뒤에도 당신이 지지할 정도의 성취를 이룰지, 지금의 나는 기껏해야 51 퍼센트의 낙관을 보탤 뿐이며 100퍼센트가 아니면 0이나 마찬가지다. 고작 첫 소설집(<쇼코의 미소>) 한 권과 그 이후에 쓴 단편소설이 약간 있을 뿐인 작가에게 공을 들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단호히 ‘있다’고 말한다. 동시대를 살며 타임라인을 공유할 만한 작가를, 당신에게 소개한다. 최은영이다. 세상의 많은 지지 선언이 그렇듯, 기존의 무엇에 ‘반反’해 최은영을 세우려는지로 시작하겠다.

얼마 전 사석에서 어느 문화 평론가로부터 “노란 장판지 문학”이라는 표현을 들었다. 그 자리의 화제는 한국소설이었고, ‘읽고 싶지 않다’는 비판을 위해 선택한 표현이었다.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나 역시 한국소설의 열렬한 팬은 아닌 시간을 꽤 오래 보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주인공은 언제 집 밖으로 나갈지, 나가기는 할지 생각하곤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상처를 입은 것 같은 주인공의 내면은 번화가에 위치한 월세 40만원짜리 단칸방처럼 볕이 들 기약이 전혀 없어 보였다. 타인의 날숨을 들이쉬지 않고는 호흡이 불가능한 출퇴근길의 지하철이나 버스를 작가가 경험해본 적은 있는지 궁금해한 적도 있다. 아니다. 사실 궁금하지조차 않았다. 마트에서 떼쓰며 뭐 사달라는 아이를 혼내는 엄마의 경구 “xx는 마트에 살아, 엄마는 집에 갈 거야”처럼, “작가님 거기 살아, 나는 다른(나라) 책 읽을 거야”라고 해왔다.

영원히 사건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방문 턱을 넘어가면 익사할 듯 강박적으로 폐쇄적인 세계의 사람들. 노란 장판지의 무늬를 아무리 아름답고 눈부시게 혹은 비루하고 처절하게 묘사한다 한들, 그 이상의 풍경을 보여주기는 어려운 법이다. 실제로 읽어보면 노란 장판지가 격심하게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세계, 과거에 매몰된 사고, 자기혐오와 짝을 이룬 자기 모에화, 시작한 딱 그 지점으로 돌아와 끝맺는 플롯, 구분되지 않는 캐릭터들,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하지만 무슨 뜻으로 넣었는지 모르겠는 ‘한 문장’들은, 읽다 보면 ‘물린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른바 ‘순문학 스타일’이 아닌 경우는 어떨까. 사회 현상을 적극적으로 의제화하는 소설들은 소설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화법(더 정확히는 시사 주간지와 SNS 사이에 위치한 화법과 문제의식)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다. 미스터리나 공포, SF의 경우는 아직 더 많은 소설이 출간되고 읽혀야 앞선 책들처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투덜거림 끝에 <쇼코의 미소>를 만났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는 현실의 나쁜 것을 말하는 방식을 최은영 식으로 개발한 결과물이다. 나의 경우 책을 읽고 나서 타인에게 글로든 말로든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최은영의 소설이 건드리는 부분들이 나의 ‘나쁜 고리’에 해당해서다. 현실의 나쁨을, 최은영은 말한다. 말하는 방식은 꽤 맑고 밝아 보인다. 거기에 기막힌 착시가 있다. 자기기만을 통한 자기변명을 최은영은 허락하지 않는다. 젊은 여자들이 주로 등장하고, 외국의 도시들이 기막힌 한 순간의 무대를 빌려주며, 그녀가 당장 경험하는 일이 피와 뼈가 드러나는 폭력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들은 주로 무엇을 방관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방관자로 소설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한눈에 그녀들과 최은영을 여리고 순한 이른 봄 나뭇잎을 바라보듯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형광등 아래 거울에서 바라보는 태도는 전혀 유순하지 않다.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의 등단작이다. 거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장면 전환과 과거-현재, 한국-일본, 쇼코-나, 막연한 미래-부서진 현재의 구도인데, 여기서 최은영은 제법 이상한 짓을 한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일본의 자매학교 교류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 쇼코를 일주일간 집에서 재우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를 배운 할아버지는 ‘나’보다 쇼코와 더 잘 지낸다. 이후 쇼코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어로, ‘나’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꾸준히 쓴다. 그걸 우정이라고 불러봐야, 대학에 가고 바빠지면서 멀어지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들 사이의 연락이 끊기고 시간이 흘러 대학교 4학년이 된 여름, ‘나’는 쇼코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오지 않는 편지가 불어넣은 공허함과 잊히기 싫은 허영심.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다. ‘나’는 아무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된다. 영화를 하려고 했는데, ‘현실과 타협한’ 직장인 친구를 만나지도, ‘꿈을 좇아’ 영화를 하는 친구를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자기 고백은 소설 후반부에 길게 이어지고,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를 찾아온다. 할아버지는 한눈에도 남루한 자취방에서 안타까운 눈을 하고는 “난 그거, 멋지다고 본다”며 ‘나’의 삶을 칭찬한다. 아무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한번 꼬인 것은 저절로 풀리지 않는다. 기껏해야 죽음이 도울까.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지는 <쇼코의 미소>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멈춘다. 속을 알수 없는 예의 바른 미소와 함께.

실패했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번 생은 어쩔 수 없겠다. 그런데 그게 내 몫의 책임이 아닐수도 있다. 이미 실패한 채 시작해버렸다. ‘신짜오, 신짜오’는 독일에 정착한 한 한국인 가족과 친해진 베트남인 가족 이야기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투명인간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투이의 가족과 가까워져 엄마는 버티고 있었다. 그마저도 너무 늦게 알게 되지만. 이제 전부인가 싶은 즈음, 대체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제기되던 문제가 불거진다. 한국인은 가해자 측이다. 독일 학교에,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말하는 독일인 선생의 방식에 불만을 느끼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투이의 가족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자랑스럽게덧붙인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 해서는 안 될 말.

투이는 말한다.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했어.” 두 가족은 다시는 가까워지지 못한다. 시간이 흐른다. ‘신짜오, 신짜오’는 사건의 흐름과 구성이 ‘쇼코의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집 수록 순서도 딱 붙어있다. 그런데도 소설이 끝나면, 우리는 <쇼코의 미소>의 엔딩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서 있게 된다. 상냥해 보이는척 최은영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의 책임을 묻는가 하면, 가족의 비밀을 까발리지 않고 말하는 법을 숙고하고, 세월호 유가족의 시위 현장인 광화문으로 손을 잡아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식으로 말하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재난의 시대에, 최은영은 아무것에도 패배하지 않고 또한 짓밟지도 않고 견디고 살아남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에 실패를 분명히 자각하는 세대의 서사다. 앞세대는 영문을 알 수 없다고 느끼기나 할. 이것이 앞세대가 만든 폐허를 살아가는 법이다. 이런 작가와 함께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와 시대를 호흡하며 성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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