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1.

EDITOR’S LETTER – 1.

2018-03-30T13:13:46+00:00 |ENTERTAINMENT|

P.S 이 글을 읽을 때 함께하면 좋을 것
Capsule Coffee Fortissio Lungo – Nespresso.
Vintage Flora Coffee Cup And Saucer – Apilco.

첫 수트는 연한 회색 플란넬이었다. 프랑켄슈타인풍의 넓은 어깨에 싱글 브레스티드. 버튼은 셋. 집안 남자 중 누구의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어두운 옷장에서 오랫동안 잊혀 커다란 좀벌레가 되기 직전에 찾았다. 수선을 맡긴 세탁소에서 온몸이 시침핀 투성이인 채 실버차콜 고슴도치를 생각하고 있을 때, 맹렬히 소매통을 줄이던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이걸 진짜 입으려고요?” 예식장엔 포크에 꿀떡을 꽂고 무작정 달리는 미취학 아동 천지였으며 신부의 화장은 초현실적으로 번져 있었다. 어깨가 실그러진 수트에선 나프탈렌 냄새가 진동했고 ‘아라모드’해 보이려고 만든 바짓단의 턴업 커프스는 맥없이 풀렸다. 식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 속엔 두꺼운 회색 수트에 맥락 없이 테니스 운동화를 신은 수상한 여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땀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애초의 계획은 로렌 허튼이나 다이앤 키튼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친 수달이거나 덜떨어진 레지스탕스, 좋게 봐줘야 누구도 끼워주지 않는 회색분자 정도. 1998년 초가을, 친구는 결혼을 했고 날씨는 전에 없이 더웠으며, 여성용 수트를 살 곳은 변변히 없었다. 그날, 나는 식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신랑 측 하객이었고 덕분에 친구는 출신을 의심받았다. 불운의 첫 수트 이후, 수트를 사는 일이 조금씩 수월해졌다.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도시 여성들에게 흰 꽃을 건네듯 우아하게 권한 상징적 실루엣을 출발로, 소프트한 동시에 단호한 이브 생 로랑의 스트라이프, 천진한 한편 성숙한 랄프 로렌의 트위드, 비밀을 숨긴 커튼이 연상되는 구찌의 보르도 벨벳, 그리고 기이한 검은 새 같았던 뜻밖의 요지 야마모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 처음 크레파스가 생긴 어린애가 세상의 온갖 것을 죄다 그리듯이 수트를 사들였다. 두 벌 사이에서 고민할 땐 (까짓 거) 세 벌을 살 만큼 돈을 벌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한때 맞춤 수트도 좋아했지만, 체크의 간격과 라펠의 각도, 뿔단추의 크기, 티켓 포켓의 위치…. 너무 많은 경우의 수는 고통일 뿐, 기성복 특유의 강제적 심플함이 그리워져서 재단사를 만나는 일은 곧 그만두었다. 2018년 봄은 서둘러 왔다. 계절이 바뀔 때 옷장 정리를 하는 건 정례적인 일과 중 꽤 좋아하는 일이다. 간단하게 구획된 공간에 평범한 옷들만 있는 고졸한 옷장이지만 수트 섹션은 호화롭다. 오랫동안 열심히 모으기도 했고 관리엔 더 신경 썼다. 뚱뚱한 나무 옷걸이와 부드러운 고무 패킹을 단 바지걸이를 ‘스페셜 퍼스널 메이드투오더 울트라 럭셔리’ 세트로 제작하는 데 비용을 기꺼이 들였고, 습기제거제와 섬유탈취제도 화끈하게 썼다. 틈틈이 통풍을 체크하고 불순한 냄새가 배었는지 검사하는 것은 물론. 덕분에 아주 오래된 수트도 아직 재킷 어깨가 견고하고 팬츠 허릿단엔 꼬집힌 자국도 없다. 여름 향수와 알마냑 잔향이 섞여 날 때가 더러 있지만 냄새도 나쁘지 않다. 가끔 옷장에 나란히 걸린 수트를 한참 본다. 어깨를 맞춘 채 절도 있게 도열한 모습이 충성심 강한 병정들 같기도, 신도시에 새로 생긴 날씬한 건축물 같기도 하다. 그 순간, 철학적 심상과 삶의 비결을 비로소 찾는 건 아니어도 최소한 평화롭고 행복하다. 왜 수트를 이토록 좋아하게 됐을까? 이유는 ‘균형’이다. 수트는 부드러운 것과 엄격한 것, 캐주얼한 것과 포멀한 것, 어두운 것과 환한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크고 뭉툭한 것과 작고 뾰족한 것,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지점에서 섞인다. 멀리서 볼 땐 알 수 없지만, 즐기고 자주 입다 보면 천천히 체득한다. 특히 관리가 잘된 청결하고 말쑥한 수트를 내키는 대로 데카당스하게 입는 맛이란. 실크 수트를 입고 돌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기껏 막아둔 포켓을 뚫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고, 품위 있게 차려입고 지저분한 신발을 신는 식인데, 이게 꽤 통쾌하고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지큐 코리아>의 신임 편집장으로 첫 에디터스 레터를 쓴다. ‘뉴 지큐’를 어떻게 만들지 묻는다면 내가 수트를 입는 방식으로, 대신 답하고 싶다. 덧붙인다면 또 이렇게. “당신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멋대로 마음대로, 주저 없이 박력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