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세 편의 영화가 개봉됐다. 하정우는 한 번도 같은 적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뭔가를 시작했다.
<범죄와의 전쟁>, <러브 픽션>, 가 숨 가쁘게 지나갔다. 지금은 영화를 연출하고 있다 들었다. 그렇게 바빠도 괜찮나?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내가 계획을 세워서 선택했다. 나는 그게 행운인 것 같다. 내가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이 정도로 일치해서. 물론 육체적으로 고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받지만 그게 없으면 또 말이 안 되는 거니까. 2012년에는 <베를린>이라는 작품을 했다. 상반기 6개월 정도 참여했는데, 끝내고 한 4개월 정도 미리 계획한 휴식기가 있었다. 단기 어학연수를 갈까? 여행을 갈까? 고민하다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봤다. ‘내가 지금 무엇을 제일 하고 싶나 지금, 이 시점에서.’ 그랬더니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제는 <인간과 태풍>이다. 제목을 그렇게 할지, <롤러코스터>라고 할지 결정을 못했다.
완벽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여유를 느끼는 타입인가? 바쁘고 피곤해 보이지만 그게 행복한 사람도 있다.
맞다, 바로 그 부분이다. 정확하다.
그래서, 지금은 만족하고 있나?
오랜만에 영화와 연기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했다. 연출자 입장에서 배우를 보고 같이 연습하고. 연출자 입장에서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새롭다. 모호한 얘기지만, 영화에 대한 존경심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
존경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행운이지만 끝이 없지 않나? 그 막막함을 매번 어떻게 극복해내나?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그것을 통한 확인. 그런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과연 관객과 공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장르가 코미디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코미디야말로 호불호가 확실하기 때문에. 긴장, 불안, 내 자신의 입맛에 대한 의심? 그런 것들을 같이 느끼고 깨달으면서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2012년에 벌어진 여러 가지 일 중, ‘이 사건이 나를 결정적으로 바꿨다’ 혹은 ‘이 일 때문에 내가 진보했다’고 느낀 적 있나?
바로 이 작업이 그렇다. 막연하게 서른다섯이면 내가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했다. 늘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왔다. 하루하루 보내는 시간 속에서 그것이 무뎌지는 것도 있었을 테고, 더 이상 못 느끼게 된 것도 있었을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출근을 하는데, ‘아, 나의 서른다섯 터닝포인트는 이거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 작품 연출을 시작으로 앞으로 연출가의 길을 가겠다”가 아니라 그냥 영화인으로서, 배우로서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 다시 한 번 영화와 내 삶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올 한 해 가장 큰 이슈가 아니었나 싶다. 관객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영화인이 되는 게 어떤 최종 목표다. 한국, 나아가서 아시아나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
올해 가장 큰 아쉬움은 뭐였나?
성격상 그렇게 돌아보고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진 않는다.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반성이나 다짐 정도로 끝내지, 지난 것들을 끄집어내서 자신을 괴롭히진 않는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계획한 걸 이루듯 만들어진 건가?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니까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참 부질없는 게 많다.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마냥 그러면 삶이 좀 곤란해지지 않나?
맞다. 그런 거 아닐까? 경험이 쌓이면서 사람을 순수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아, 이건 진짜 안 되는 건가?’ 같은 고민. 그런 것들을 딱 맞이했을 때 포기하기보다는 ‘스킵’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는 얘기다.
영화 나 ‘하정우 FC’ 같은 이름의 축구 모임을 보고, 주변에 사람이 참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 사람을 챙기는 일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것이 내 사명이라는 생각도 든다. 신이 나에게 어떤 재능을 주셨다면, 내가 그것을 나 혼자 취하는 게 아니라 다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영화를 통해서 좋은 작품을 보여주면서 관객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 주변 사람들 또 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내 것을 좀 주고 같이 살아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타인으로부터 오지 않나?
그것 또한 점점 기대치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냥 나는 신이 나에게 준 선물들이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누가 나를 배신하든, 본전 생각을 점점 안 하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가졌으니까,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실천력과 피가 있으니까. 시간이 흘러서 죽을 때, 나는 그냥 그 사람을 도와줬고 그 사람이 나로 인해서 어떤 기회를 맞이했다면 충분히 뿌듯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 픽션>은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편하고 익숙했다. 연기하기에도 그랬나?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처음 설정이 좀 수월했다. 신체적으로도 수월할 수 있다. 한편, 전과 다르게 가야 된다는 부담도 있었다. <황해>나 <범죄와의 전쟁>은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사투리 연습을 하고, 고달픈 점도 있었다. 안 해 본 역할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 캐릭터에 숨기가 편했다. 설정이 무궁무진한 부분이 있다.
지금, 좀 신나 보인다. 어떤 캐릭터를 처음 만나서 연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자유로운가?
그게 제일 재밌다. 영화를 찍을 때 나는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내 캐릭터를 연출한다고 생각한다. 캐릭터와 배우가 영화에서 오브제로 쓰이는 거다. 영화 자체가 협업이다. 감독의 연출, 미술감독과 촬영감독의 시선, 각 배우의 색깔과 해석 등 그 모든 것.
하루 중, 가장 완벽하게 편할 때는 언제인가?
자기 전인 것 같다.
긴장과 이완에도 리듬이 있는 거 아닌가? 자는 시간을 빼면 항상 긴장 상태라는 건가?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돌아다니고 생각하다가 일 벌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휴식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살아?” “어떻게 작품을 쉬지 않고 하지?” 그 말들이 오히려 나를 지치게 하는 것 같다. 나는 내 흐름대로 가는 건데. 하고 싶어서 가는 거고 그만큼 내가 작품 안에서 뭔가를 채우려 들고, 해소하려 들고, 위안 받으려고 하는 건데. 거기에 절대적인 양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상대적인 게 아닐까? 물론, 어떤 기준에 따라 절대적인 뭔가 있다는 것에 공감은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기보다 나중을 위해서 담금질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달리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훌륭한 예술가들도 지속적인 담금질을 통해 이루어낸 업적이 있다. 내가 내놓은 작품이나 그런 것들에 왜 그렇게들 주변 사람들이 평가를 하고 조급하지? 이런 생각도 든다.
당신은 왠지 묵직한 단어를 태연하게 말한다. “내일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같은 다짐이나 자유나 행복 같은 단어들.
나는 늘 다짐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 아침에는 어떤 다짐을 했나?
음, 술을… 오늘은 먹지 말아야겠다.
하하하, 더 거창한 걸 기대했다.
하하. 아침마다 후회하지 않나 술 마시면. 하지만 오늘은 좀 뿌듯했다. 어제 누군가를 용서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차에 치였다. 그런데 운전자가 도망쳤다. 뛰어가서 잡았다. 그 사람은 만취였다. 사과 한마디 하면 그냥 보내주려고 했다. 크게 부딪친 것도 아니었다. 근데 도망을 갔다. 잡아서 경찰서까지 데려갔다. 형사들은 “어떤 처벌을 원하시냐, 이건 큰 문제다”라고 했다. 나를 치고, 도주까지 했으니. 그런데 “처벌 안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는 내가 좀 뿌듯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마음이 좀 좋았다.
하정우에겐 분노도 있지 않나?
많이 있는 것 같다.
잘 조절할 수 있나?
늘 노력한다. 그것을 에너지로 바꾸려면, 자기 자신을 위한 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GQ>가 정한 ‘올해의 남자’다.
<GQ>에 대한 신뢰라고 할까? 참 기분이 좋았다. 다른 분들에 비해 내가 두드러지게 한 게 있나,라는 것도 잠깐 생각해봤다.
지금 당신에게 제일 중요한 감정은 뭔가?
나에겐, 늘 코미디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재밌을까? 작품 잘 마무리해서 개봉하는 것 또한 설레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
- 에디터
- 정우성
- 포토그래퍼
- 보리
- 스탭
- 스타일리스트/이현하, 헤어|태석(네함), 메이크업/조수민, 어시스턴트/ 이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