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국 지식인들에게 이 말을 돌려줄 때다.
2015년 2월 7일.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그날,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그라치아>에 쓴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글이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날이다.
2015년 초, 서울시 금천구에 살던 김모 군이 이슬람국가 IS에 자원 입대했다. 다양한 정황 증거와 더불어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 “그러나 지금은 남성이 차별받는 시대”라고 트위터에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그의 ‘탈조선’ 이유는 명확했다. 김태훈은 바로 이 맥락 위에서 문제의 칼럼을 기고했다. “페미니스트들이 도대체 김군에게 뭘 어쨌기에 ‘차라리’ 그 무시무시한 IS를 제 발로 찾아 가는 길을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김태훈은 엉터리 지식에 기반한 페미니즘의 역사를 줄줄 읊었다. 가령 “콘돔의 발명으로 여성의 성이 온전히 자율권을 갖게 된 1960년대에 페미니즘은 발생했다”는 식이었다. 어설프게 아는 내용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1960년대에 발명된 것은 콘돔이 아니라 피임약이며, 당시에 부흥한 페미니즘은 ‘두번째 물결’이라고 불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진행된 여성참정권 운동이 ‘첫번째 물결’이다. 마치 1990년대 블러와 오아시스가 로큰롤을 만들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몰상식이었다.
여기에 기반해 김태훈이 도달한 결론은 이랬다. “남성을 상대로 싸운 검투사가 아니”라 “시스템과 싸운 혁명가”라며 ‘과거의 페미니스트’를 자기 머릿속에서 멋대로 이상화한 후, 그에 견주어 “현재의 페미니즘은 뭔가 이상하다”고 단정 지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여성을 납치하고, 성매매하고, 성노예로 삼고, 동성애자들을 공개 처형하면서 그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공개하는 무장 범죄 집단에 자발적으로 입대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공감을 천명했다.
‘옛날’에는 그렇게 글을 써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가령 <선택>은 남자인 이문열이 여자인 종갓집 며느리의 영혼을 화자 삼아, 시집살이라는 것이 힘들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전통인지, 제사상에 올릴 떡을 쪘는데 시루에서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목을 매달아 죽는 것이 왜 훌륭한 일인지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문열의 ‘작가’로서의 명성은 그의 여성혐오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안티조선 운동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추락했다. 전여옥이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입문 하기 전, 그는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논객으로서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당연히 진짜로 테러를 하라는 내용은 담겨 있지 않다. 수사법이고,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김태훈은 현실에 존재하는 테러 집단에 실제로 자원 입대한 누군가를 비호했다. 그 맥락 속에서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나 단순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성들은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고, 그렇게 촉발된 페미니즘의 움직임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새로운 페미니즘의 원인으로 젠더 감수성의 변화라든지 여성 인권의 신장 등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에서 접근해야 한다. 세계의 기본적인 구도가 달라졌지만 ‘한국 남자 지식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 IS가 건국을 선포했다. 물론 지금은 대단히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쫓기고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유포한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기타 근본주의적 세계관만큼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았다. 1980년대까지 서구식 복장을 갖춰 입은 세련된 대학생들이 거닐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은, 1990년대에 탈레반이 집권하면서 부르카에 갇힌 여성들이 오가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IS의 출현에 대해 한국의 여성들은 공포를 느끼고 공감할 때 남자들은 순전히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한낱 비유로 취급했던 것이다.
2016년 가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 아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인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다 알았다. 그러나 미국의 간접선거제도, 단 한 건의 기밀 유출도 없었지만 끝까지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 이메일 게이트, 그리고 ‘저 여자가 대통령이 되는 꼴만은 못 보겠다’는 백인 남성 유권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300만표를 더 얻고도 힐러리 클린턴은 백악관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가장 대통령직에 적합한 ‘여자’와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남자’가 싸워서, 남자가 이겼다. 물론 선거 패배는 궁극적으로 클린턴 캠프와 후보의 책임이다. 하지만 이 선거 결과를 놓고도 ‘이제 여성은 차별받지도 억압당하지도 않는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한낱 기만일 뿐이다.
불과 1백여 년 전만 해도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나라보다 그렇지 않은 나라가 훨씬 많았다. 미국에서 이혼이 일상화된 것은 1970년대이며, 그 전까지 대부분의 여성은 부모가 정해주거나 허락해준 남자와 이른 나이에 결혼해 애를 낳고 ‘굿 와이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변화는 너무도 크고 전방 위적이었기에, 21세기의 어느 시점까지, 사람들은 현재의 진보가 잠시 주춤거릴 수는 있을지 언정 퇴행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다.
2016년 5월 벌어진 이른바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에서, 한 살인자가 칼을 품고 희생양이 될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이 치안은 좋은 나라’라는 신화 속에서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주체가 남자뿐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오히려 더 큰 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성들은 외쳤다. “여자라서 죽었다.” 이토록 생생하고도 직접적인 공포의 경험이 여성들의 사회를 관통했는데 아직도 한국 남자 지식인들은 그 의미를 모르는 듯하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그 시절, 페미니즘은 실천해야 할 운동인 동시에 최신의 지적 유행이었다. 주디스 버틀러, 호 미 바바, 줄리아 크리스테바처럼 어려운 문체로 후기구조주의적인 글을 쓰던 학자들이 주요 페미니스트로 거론되던 시절이다. 그 결과 이론에 친숙한 ‘오빠’들은 여성이 아니면서도 자신들의 지식에 기반해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이론을 설명하고 때로는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런 존재들을 ‘오빠 페미니스트’라고 불렀다. “너는 여성의 인권을 옹호한다고 하지만, 젠더라는 것이 중층결정된다는 점을 다소 간과하는 건 아닐까?” 같은 소리를 해도 욕먹기는커녕 몇몇 여성이 귀를 기울여주던 시절이었다.
그 운동권의 ‘오빠 페미니스트’들은 ‘폴리아모리Polyamory’라는 단어를 지금까지도 그렇게나 좋아한다. ‘일부일처제Monogamy’ 의 반대말이며, 여성 억압의 근원인 가부장제에 근본적으로 저항한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멋진가. 게다가 배우자 아닌 여성에게 접근할 때도 꽤나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주지 않는가. ‘나는 바람을 피우는게 아니라 가부장제에 저항하고 있다, 너와의 사랑으로.’
물론 그 또한 어떤 페미니즘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2017년, ‘폴리아모리 타령을 하는 한국 남자 지식인’은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기 어렵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폭력과 차별을 구체적으로 절감하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수립해나가고 있다. 오늘날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어 하는 소녀들은 <젠더 트러블>이 아니라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집는다. 복잡하고 현란한 이론을 들먹이는 남자가 설 자리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담론의 지형도 속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혹시 폴리아모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며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의 무릎에 손을 얹는 남자 지식인은 다음날 SNS에서 화제의 인물이 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훈의 칼럼 이후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남자 지식인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혹은 여성들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내놓은 반응을 보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본인들이 여성 억압의 원인이거나, 주동자이거나,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방관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버락 오바마를 봐도 강자의 미덕은 여유”라며, “자제함으로써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 힘, 그건 권력”임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남자) 부장님들을 향해 “허례허식에 집착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문유석 판사 정도가 드문 예외에 속할 뿐이다.
스스로가 여성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 내 주변의 누군가가 여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그 구조 속에서 나 또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은 남자들이 가장 먼저 품어야 할 마음가짐이다. 일단 이 태도를 취하고 나면 주변의 여성들이 당신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한국 남자 지식인 여러분,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아직 ‘한남’이 한남동을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안다.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부를 때 감지되는 특별히 우스운 뉘앙스는 불과 얼마 전에 생겨났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남자들의 말과 행태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어째서 ‘한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제야 시작됐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2017년 3월, 당대의 한국 남자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남자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한국 남자도 답변해야 할 때다.
- 에디터
- 글 / 노정태(자유기고가)
- 포토그래퍼
- 강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