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동 벼룩시장은 사라졌지만, 골목마다 다른 이름을 가진 서울 풍물길이 있다.
아버지는 옛 물건, 헌 물건을 좋아했다. 입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여간해선 새 물건을 사는 법이 없었다. 매일같이 어물전에 들러 제철 생선을 사면서도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금성 다리미는 사오지 않았다. 대신 국제시장에서 고장난 다리미 몇 개를 얻어와 필요한 부품만 골라서 ‘프랑켄슈타인 다리미’를 만들어 장롱 앞에 두었다. “차라리 인두를 사오지 그랬냐”는 엄마의 타박에도 ‘장가이버’는 쉽사리 뜻을 굽히지 않았다.
포니와 스텔라로 시작된 긴 자동차 구매 이력에도 새 차는 없었다. 마당 한가운데서 청량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보닛을 열고 기름때 가득한 공구를 바꿔가며 어딘가를 고치는 아버지의 옆모습에 석양이 엇비치면 일요일이 다갔다. 아버지의 소장품 중 유일한 새 제품은 사촌 동생이 카메라 가게를 열어 어쩔 수 없이 샀다던 캐논 카메라였다. 타향인 부산에서 자수 성가한 아버지는 그렇게 네 딸을 담은 수백 장의 컬러 사진과 할아버지가 물려준, 숱한 손길에 실밥이 다 터지고 손때로 반질해진 검은 동전지갑을 유품으로 남겼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나 역시 오래된 물건만 보면 홀연히 끌린다. 서울로 와 사회생활을 시작한 2001년, 벼르고 벼르다 두둑(했을 리 만무)한 월급을 찾아 들고 간 곳도 ‘황학동벼룩시장’이었다. 시장은, 언제든 바스러질 준비가 돼 있는 연탄재 같은 삼일아파트와 기괴하고 음습한데 장대하기까지 한 것이 꼭 불운한 인생(영화 <오아시스>의 주요 촬영지로 낙점된 이유일까)처럼 보이던 청계고가도로와 좋은 짝을 이루었다. 팔려고 내놓은 건지 버리려고 던져놓은 건지 알 수 없도록 제멋대로 쌓은 물건은 노점 사이 경계도 없이 죽 이어져 난전을 이루었다. 주인장의 태도를 보면 그 의지가 더 헷갈렸다. 손님 보기는 돌같이 하면서 오랜 물건은 마치 연인 대하듯 그윽이 바라보고 정성껏 어루만지니 말이다. 다행히도 당장 필요한 화장지나 두부를 사러간 게 아닌지라 주인장이 뭘 하든 개의치 않고 뒷짐 진 채 어슬렁거리는 손님이 많았다.
낮술에 불콰해져 달마가 되는 주인장, 길을 따라 세월을 거슬러 오르려는 객, 둘 사이에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쓴 채 내려앉은 옛 물건 모두 하나같이 달관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 길 밖 도심과 달리 느긋한 공기와 곰삭은 풍경이 좋아 툭하면 황학동에 들렀다. 안목이 없어 뭐 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사이, 오랜 시장은 도깨비처럼 사라졌다. 청계천 복원으로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은 뒷날 풍문으로 들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토록 바라던 서울의 오랜 마을 북촌에 살게 되었다. 북촌 집은 한눈에는 양옥처럼 보이나 어엿이 황토로 틈을 메운 기와를 인 (덕에 비만 오면 아주 똥물 뒤집어쓴 황구 신세가 되는) 개조 한옥이었다. 새 집(?)에 어울리는 옛 물건이 필요했다. 오가는 길에 들러 대뜸 “저 위에 쌓아둔 서안書案 팔 생각 없냐” 물었던 윤보선고택 옆 고가구 수리점에서 마침 ‘매장 정리 염가 세일’을 감행했다. 몸은 손님을 향하건만 분명 남편 들으라고 외치는 아내의 말에서 “수리는 해도 판매는 하지 않는다”던 주인장의 단호한 철학이 깨어진 까닭을 알았다. “아주 이고 지고 몇십 년이야? 가구가 쓰는 거지, 모시는 거야?” 수리점 가득 쌓여 있던 고가구는 누군가 곧 찾아갈 물건이 아니라 주인장의 수집품인 모양이었다. 가게 앞에 죽 늘어놓은 고가구를 삽시간에, 게다가 헐값에 처분한 호기로운 아내는 한 시간 뒤 도축한 돼지처럼 ‘앉은뱅이 약장’을 등에 업은 채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처음 며칠은 어색하더니 약장은 한지에 먹인 풀처럼 스르르 안방에 스며들었다. “입 없고말 없는 건 어디든 쉬이 스민다”던 한 토우작가의 말에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내친 김에 작정하고 옛 물건을 찾아다녔다. 당시 다니던 일터가 인사동이라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한데 그곳의 골동품상은 황학동 난전과 사뭇 달랐다. 주인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럴 만하네 싶은 고가에 고액연봉자가 되리라는 굳은 다짐은 잠시, 저액연봉에 어울리는 물건을 잘 찾아보자는 결심을 오래 했다. 집 근처 심용식 소목장의 청원산방을 지날 때면 아예 가구 짜기를 배워볼까, 두어 번 고심한 겨를도 있었으나 골목을 꺾으면 금세 잊었다.
그리 수삼 년이 흘렀다. ‘저 우주선은 어쩌다 동대문에 불시착했나’ 싶은 DDP 앞을 지나다 한때 그 자리에 머물렀다던 ‘황학동벼룩시장’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알아보니 상인의 일부는 2008년 동대문구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이라는 현대식 건물로, 또 일부는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황학동과 마주한 동묘 일대, 종로구 숭인동으로 옮겨 갔다고 했다. 마침 동묘에 배롱나무를 보러 갈 일이 있어 어느 주말, 숭인동을 찾았다. 그 옛날 황학동벼룩시장의 정취가 이리도 온전히 면면할 줄이야.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걸어서 10분이면 닿도록 가까운 동묘 앞 난전과 서울풍물시장은 그야말로 ‘풍물 쇼핑’의 최적지였다. 몇 번 드나들다 정이 들어 아예 이름도 따로 지었다. 그냥 시장이라 하면 ‘서울풍물시장’만을 이르는 듯해 통틀어 ‘풍물길’이라 불렀다. 이름에 떡하니 바람을 품은 풍물風物과 그 자체로 바람을 닮은 길이 어쩐지 어울린다며 홀로 활갯짓했다.
풍물길에 들기 전 몰라도 그만이지만 알면 좋을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풍물! 풍물놀이에 쓰는 악기를 이르는가 하면 ‘어떤 지방이나 계절 특유의 구경거리나 산물’을 뜻하기도 한다. 하여 풍물은 ‘오래되었거나 희귀해야 한다’는 전제가 덧붙는 고동古董 혹은 골동骨董을 품는다 하겠다. 그리 오래되지도 희귀하지도 않은 물건은 ‘민속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골동과 갈래짓는 기준은 희귀성보다 생산 연대다. 풍물길 일대 상인들은 대체로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물건을 골동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물건을 민속품으로 구분 지었는데, 앤티크와 빈티지처럼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후를 기준점으로 삼는 데서 묘하게 겹쳤다.
풍물길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우선 동묘앞역 3번 출구에서 청계천 영도교 직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350여 미터 길, 다음은 처음 길의 중간쯤에 자리한 동묘와 희망나눔 봉사센터 사잇길이 난계로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500여 미터 길, 그리고 난계로를 건너자마자 시작되는 서울풍물시장을 위시한 일대 길이다. 새의 시선으로 본다면 전체적으로 ‘ㅏ’ 모음의 가로획을 길게 늘인 형태다. 첫 번째 길은 풍물길 전체가 그러하듯 각종 생활용품과 가전제품, 의류, LP와 시계, 골동품과 민속품을 파는 가게가 마구 뒤섞여 있다. 이곳에서는 점포 배치와 점포별 제품 구성에 의문을 갖거나 맥락을 찾으려 해선 안 된다. ‘도무지, 도대체, 심지어, 게다가’ 같은 부사는 고이 접어 날리고 시공간의 낙차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뜬금없음, 난데없음, 두서없음’을 혼란의 단초가 아닌 흥겨운 여지라 여겨야 폐상자의 한 귀퉁이를 툭 찢어 매직으로 갈겨쓴 ‘고급’ ‘국산’ ‘최신’ ‘천연’이라는 수식이 무색한 1천원, 2천원의 가격에도 담담할 수 있다. 이 길에는 옷가지나 가전제품만 취급하는 주제별 좌판도 있지만, 집에서 쓰던 물건을 죄 가져왔나 싶은 곳도 여럿이다. 선풍기와 발 마사저 같은 전자제품, 역기와 골프채 같은 운동용품, 책꽂이와 책가방 같은 학용품 등으로 나름 갈래를 지어봤자 뚜껑 없는 압력밥솥, 빈 양주병을 마주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 된다. 행여 “그걸 어떻게 써요? 왜그리 비싼가요?”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가는 “그걸 쓰려고 사면 안 되지! 세월에 소비자가가 어디 있어?” 같은 현답을 듣기 십상인 이길은 곧 ‘깨우침의 길’이다.
두 번째 길의 구심점은 동묘다. 동묘는 관우의 신위를 모신 유교 문화의 산물로 그 정체성과 (지금의) 입지가 다소 생뚱해 보이는데, 그래서 풍물길과 잘 어우러지는 데가 있다. 관우 들으라는 듯 “짐 진 자여, 내게 오라! 5천원만 들고 내게 오라!” 외치는 노점상의 호객이나 기똥찬 음질의 카세트플레이어로 조용필의 ‘여자의 정’을 트는 걸인 (혹은 가인)의 선곡 감각은 그래서 예사롭다. 이 길의 점포 중에는 산처럼 쌓인 물건에 간판이 가려졌거나 애초에 간판이 없는 데가 많은데 최동규 씨도 반년 전 그런 가게를 차렸다. 삼십 대 초반부터 옛 물건을 수집해온 그는 예순 넘어 퇴직하자마자 냉큼 동묘 앞으로 달려왔다. 수집가다운 안목이 고스란한 가게 안을 둘러보던 그는 이 물건 저 물건을 치켜세운다. 자식이 따로 없다. “저 화장대는 괴목(느티나무)의 결이 잘 살아 있는 데다 손잡이가 쇠뿔이에요. 아마도 신쭈(주석) 나오기 전에 만든 것 같아요. 이 매미 모양 암호 전달기는 100년이 넘었는데도 멀쩡하게 작동하지요. 최신식 기계로 아무리 잘 만들어도 옛 물건의 모양새와 견고성은 못 따라간다니까요.”
동묘 담장이 끝나는 지점부터 난계로까지 이어지는 ‘직물거리’ 구간은 직물 가게가 문을 닫는 주말에만 장이 선다. 모두 문 닫은 가게 앞에 물건을 펼치는 노점이라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고 흥정이 잘된다. 각각 1만원 달라던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대바구니와 양은 삼단 도시락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두 개 다 할 테니 1만원에 달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도 주인은 그럴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리 내준다. 돌아서며 ‘비 왔으면 5천원에 살 수 있었는데’ 뇌까리는 모습에 스스로 놀라고 마는 이 길은 ‘(가격) 파괴와 (자아) 발견의 길’이다.
마지막 길 또한 주말에 보다 활기를 띤다. 이 길에는 특화된 가게가 많아 “탱크 빼고 다 있다”, “잘만 하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뜬소문이 정말 같다. 샛길의 노점에도 눈이 휘둥그레질만 한 희한한 물건이 수두룩하고 서울풍물시장 안에도 보존 상태가 좋은 민속품과 고가의 골동품이 빼곡하다. 황학동 시절부터 장사를 해오다 서울풍물시장 초록동에 나란히 터를 잡은 임상오 씨와 배성룡 씨는 내내 티격태격하다가도 풍물의 매력이 ‘손때’라는 데서는 딴말을 안 한다. “품목마다 최고의 연대와 산지가 따로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좋은 물건은 첫눈에 알아봐요. 전체 틀도 그렇지만 세공이 다르거든요. 대부분 땟물이 잘 들어 멋스러운데, 그렇게 색 잘 익은 물건을 보면 마음이 참 편해져요.”
누군가 썼던 물건이기에 감가상각으로 원가보다 저렴해야 하건만 ‘땟값, 나잇값’은 이를 상쇄하고도 넘친다. 하니 풍물길에서는 정찰가 책정이 불가하고, 흥정이 필수다. 흥정은 단순히 더 받고 덜 치르는 문제가 아니다. 흥정을 하면서 손님은 주인의 진정을, 주인은 손님의 안목을 가늠한다. 이를테면 “상쇠에게 12만원에 산 걸 5만원에 팜”이라 적어 놓은 꽹과리에 발길이 붙들렸다면? 그걸 정말 상쇠에게 샀는지, 12만원에 샀는지 어찌 믿을 텐가.
그 흔한 CCTV 영상이나 봉투에 담긴 보증서보다 더 믿을 만한 방법은 주인과 눈을 맞추고 몇 마디 나눠보는 일이다. 잠시만 이야기를 나눠봐도 주인장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주인장은 그 물건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지금과 똑같은 흥정의 단계를 밟았던 한때의 손님이었으니 말이다. 때로 주인장은 그 물건의 내력과 그 물건에 얽힌 사연을 술술 읊기도 한다. 결국 풍물길에서의 흥정은 주인장과 손님 말고도 눈앞에 없는 애초의 소유자, 더하여 대체로 장인이라 할 생산자와의 다자간 협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두는 비슷한 취향, 비등한 안목을 확인하며 시공간을 넘어 교감한다. 하니 이 길은 세대와 시대를 아우르는 ‘대통합의 길’이다.
지난 3월, 생태책방과 생태교실을 겸한 작은 공간을 열었다. 새 물건을 들이면 수월했을텐데, 수시로 풍물길을 드나들며 ‘땟물 잘 들고색 잘 익은’ 풍물을 찾아다녔다. 그곳에서 소리안 나는 빈티지 오디오, 유리 깨진 호롱등, 바퀴가 빠져 기울어진 싱거‘미싱’을 샀다. 빈티지 오디오는 세운상가에서 바늘을 구해 소리를 되찾았고, 호롱등은 유리를 새로 갈아 끼우고,‘미싱’은 기울어진 채 그냥 쓰기로 했다. 당장에는 무용지물 박물관 같더니 옛 물건이 새 공간의 넓이와 깊이를 확 늘렸다. 그 옛날 아버지처럼 아침 햇살 아래서 오디오와 ‘미싱’을 닦으며, 미지의 어느 곳과 어느 때를 떠올린다. 나무못으로 짜 맞춘 둥글린 모서리를 매만지며 풍물의 매력은 노고의 순간, 충만한 나날, 그 모두가 뭉뚱그려진 한 시절의 응축이라 어림한다. 지금이 이 물건이 황혼기가 아니라 한창이기를 바라며 기름걸레로 원을 그려 윤을 더한다.
“한국은 “전 국토가 박물관” 이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유치’와 ‘개발’ 플래카드 앞에서 과거는 남루할 뿐이고 ‘(문화유산)지정’ 표어가 나붙어도 실은 앞날을 계산하기 바쁜 시절. 번듯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맛집을 골라줄 순 없어도 직접 발품을 팔아 답사해 차라리 호주머니에 넣은 듯이 간직한 개별의 문화유산에 대해 말한다.”
- 에디터
- 글 / 장세이(생태공간 목수木水 대표)
- 포토그래퍼
- 장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