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날이 밝지는 않았다. 배우 김새벽은 어둠을 충분히 응시해야 밝은 곳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작년 한 해 누구보다 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명망 있는 감독들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는 그걸 성공이라고 부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말에는 뭐 했어요? 집에 있었어요. 감기가 살짝 왔는데 괜히 좀 더 안 좋아져서요.
작년에 일을 너무 많이 한 건가요. 생각해보니 한 3분의 1정도는 집 밖에서 보냈더라고요. 개봉을 많이 해서 그렇지 촬영 자체가 많았다기보단 떠돌았어요.
영화 개봉하면 많이 잡히는 홍보 일정? 웬만하면 안 해요. 어렵기도 하고, 사람마다 자기가 가진 에너지가 있잖아요. 그걸 중요한 데 잘 쓰려면 아껴야 되는 사람이라서요. 힘을 내야 할 때 못 내는 게 싫어요.
집에서 안 나간 어떤 사연이 있는 것처럼 들려요. 앞으로 나아갈 힘이 안 났어요.
일과 관련해서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나요? 전체적으로 지쳤어요. 몸에 힘이 없으니까 마음도 약해지더라고요. 기대되는 게 없고 원하는 게 없고 갖고 싶은 게 없는 상태였어요.
그걸 극복하려고 도예, 발레, 필라테스까지 빡빡하게 하고 있는 건가요? 일단 생각한 게, 운동은 꼭 해야겠다 싶었어요. 몸을 안 쓰니까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아서.
도예는 어떤 선택이었어요? 혼자서 낼 수 있는 결과물을 원했어요. 도예는 혼자서 가만히 정직하게 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고요.
영화는 혼자서 어쩔 수 있는 게 아닌 측면일까요. 겨울에 영화 찍는 건 더 힘들겠네요. 겨울 진짜 싫어해요. 추운 거 너무 싫어요. 근데 저는 여름도 안 좋아해요. 극단적인 날씨가 싫어요. 제일 좋아하는 건 가을. 산책을 되게 좋아하는데 겨울엔 힘들잖아요. 자전거도 못 탄 지 좀 됐고.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군요. 수영도 그래서 좋아해요. 사람들과 터놓고 얘기하려면 습관이 필요한 것 같고, 전 그게 없어서 조금씩 해보려고요.
몇 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서 일했는데도요?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더라고요.
친해질 만하면 끝나는 건가요? 영화 찍으면서 힘든 것 중 하나예요. 사람이 계속 바뀌잖아요. 저는 서로 잘 알고 오해가 없는 안정적인 관계를 좋아하거든요. 요즘은 기간이 더 짧아졌어요. 영화는 끝나도 사람은 남았으면 하거든요.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래요.
개봉을 앞둔 <누에치던 방>은 확실히 겨울의 정서가 지배하는데, 그 영화에서 김새벽만이 겨울 바깥이죠. 밝음 혹은 그리움이 있어야 하는 캐릭터잖아요. 처음엔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하면 할수록 이게 구현 안 되면 다른 인물들이 이해받지 못하겠다 싶어서 좀 무거워졌어요. 어쩌면 제가 그리워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저도 고등학생 땐 장난도 많이 치고 지금보다 활발했거든요. 지금보다 자기 검열 없이 솔직하게 표현했던 것 같고요. 옛날로 돌아가듯이, 아니면 지금의 내가 싫은 마음이 깨지길 바라면서 찍었어요.
그래서 깨졌나요? 이미 바뀐 건 잘 안 돌아와요. 하하.
어디선가 영화 <녹색 광선>의 델핀느와 자신이 매우 비슷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죠. 델핀느의 어떤 부분일까요? 미신을 믿는 것? 잘 우는 것? 채식을 하는 것?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서툰 거요. 식사 자리에서 채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취하는 태도들? 자기를 솔직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솔직하지 않은, 어쩌면 비겁할 수 있는 모습요. 제가 제발 그렇게만 말하지 말라고 생각하면 딱 그렇게 말해요.
그래서 델핀느가 사랑스럽기도 하잖아요. 닮았다고 해놓고 제 입으로 그러기가…. 하하.
작품을 끝낸 후 캐릭터의 여진은 없는 쪽인가요? 그렇게 많이 남진 않아요. 현장에서 느낀 것들, 사람을 만나면서 내 크기, 내 태도, 내 마음, 아쉬운 점에 빠져 있는 기간은 있어요.
아까 GQ.COM 영상 인터뷰하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한테 사랑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것보다 현장에서 제 역할을 잘하는, 필요한 사람이고 싶거든요. 그게 연기를 하는 제게 가치 있는 일이니까요.
사람들에게 김새벽을 각인시킨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는 진로를 고민하는 여배우 역할을 맡았죠. 당시의 실제 고민과 겹쳤을 것 같은데 오늘 얘길 들으니 여전히 막막한 것처럼 들리네요. 장님이 돼가는 것 같아요. 하하.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인지도가 생기고, 훨씬 더 많은 작품을 유명 감독들과 하고 있는데요? 제가 뭘 원하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뭘 하고 싶은지.
이 작품은 내가 원하는 것과 가깝다고 느낀 작품도 없었어요? 그렇게 구체적이진 않은데 길을 보고 싶은 욕망이 있긴 한 것 같아요. 안 될 것 같아서 힘들 때도 있고, 또 어떨 땐 그 욕망이 있어서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같고.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 싶어요.
“연기를 잘한다는 건 너무 모호해요. 어차피 없는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좋은 작품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려고요. 마음을 그렇게 바꾸니 좀 편해요.”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솔직하고 투명한 게 있어서 주변 사람에게도 무시 못 할 영향이 있을 것 같은데. <그 후>, <풀잎들> 두 편을 연달아 했잖아요. 워낙 미지의 세계여서 걱정도 했다가, 준비할 것도 없는데 걱정해서 뭐 하나 혼자 다짐도 하고 그랬어요. 겁먹지 말고 오기 있게 하자, 그 마음만 먹었죠. 하지만 용기라는 게, 아, 용기! 가자! 하면 오는 게 아니어서…. 요즘은 다짐하는 것도 싫어요, 뭔가 의식하고 생각하고 힘을 내려는 것 자체가.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고 싶어요. 편안하고 자유롭게.
<그 후>의 “왜 사세요?”라는 질문이 김새벽에게서 나온 거라면서요? 처음 만났을 때 감독님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아무 질문이나 해보라고 하셨어요.
다짐을 하기 싫은 김새벽은 왜 사세요? 정확히는 왜 사세요, 가 아니라 왜 사는 걸까요, 였어요.
자문하듯이 물은 거군요. 갑자기 떠올랐어요. 아직은 잘 모르겠고, 살아봐야겠어요.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해져서, 이젠 그것도 안 하려고요.
결국 누구나 좀 더 잘하고 싶고 나아지고 싶은 건데, 연기는 어떨까요? 연기는 진짜 혼자서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모든 게 합쳐져서 영화인 거니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명연기’를 검색해봤어요. 하하. 할리우드 명연기 모음을 봤는데 그 컷만으로는 별로더라고요. 앞뒤 상황을 놓고 봤을 때 밸런스가 잘 맞아야죠. 또 조명에 따라 앵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이 톤이 어떤 영화에는 딱 맞지만 다른 데서는 과할 수 있고.
모호한 문제에 모호한 질문을 더하면, 연기가 늘었나요? 아니요, 진짜 아니요. 바로 답할 수 있어요.
근거가 있어요?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껴요. 하하.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이유 중 하나는 연기를 잘하고 싶은데 좋은 연기가 뭔지, 이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내 눈에는 안 보이고 안 느껴져서예요.
내가 보기엔 는 것 같아요.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꽤 보이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진짜 조금 차이가 있을 거예요. 됐어, 잘했어, 이런 마음이 드는 정도는 아닌. 늘 돌아서면 아쉽고, 왜 그렇게 촬영했지 싶고.
많이 준비해서 현장에 가는 배우인가요? 친하게 지내는 이상희 배우 말로는, 좁고 깊고 힘들게 연기하는 편이라서, 상대방에게 털어놓지 않는 고민도 많고 저만의 기준도 너무 높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인 사람인가요?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뭔가 원하는 건 있는 거잖아요. 이제 좀 바꿔보려고요. 연기를 잘한다는 건 너무 모호해요. 어차피 없는 그 거 생각하지 말고 좋은 작품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려고요. 마음을 그렇게 바꾸니 좀 편해요.
그렇다면 작년의 영화들이 좋은 경험이었겠네요. 홍상수 감독 영화도, <초행>도 현장에서 결정되는 부분이 많았잖아요. 다양한 현장과 방법이 있는 거니까. 제가 좀 다양한 현장에 가는 것 같긴 해요.
다양한 배역을 하면서요. 그런가. 저는 아직 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주변에 물어보지도 않죠? 네, 근데 이제 조금씩 해보려고요. 뭔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같아서.
출연작은 다시 보나요? 이제 보려고요. 오늘 사진가 분이 평소 어느 쪽 얼굴로 찍느냐고 물으셨는데 저는 잘 모르거든요. 일부러 모르려고 애쓴 게 있어요. 알면 사용할까 봐. 지금 이 인물의 감정에서는 좌우로 움직이는 게 중요한데 오른쪽이 잘 나오면 그렇게 움직일 틈을 찾을까 봐. 지금 와서 보면 알고도 신경 안 쓰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지만요.
제일 좋지만 제일 어렵죠. 예전에는 지금 이 작품을 못하면 다음 역할이 없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조급한 마음이 들면 모든 걸 망치는 것 같아요. 저는 쫓기는 기분이 싫어요. 누가 뒤에서 걸어오는 것도, 재촉받는 것도. 하지만 제가 저를 몰아가고 있더라고요. 아주 길게 열어두고 제게 맞는 속도로, 3년 전보단 낫겠지, 5년 뒤는 좀 나아지겠지, 그러려고요.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박현구
- 스타일리스트
- 박희경
- 헤어 & 메이크업
- 김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