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세 명이 낯선 곳으로 떠났다. 러시아의 작은 도시, 런던 시내, 그리고 파리 공원과 센강. 마침내 온전한 고독에 당도한 조금은 쓸쓸한 이야기.
러시아 표류기
Music
George Winston — <December>, Longing Love
Jethrotull — Elegy
Sia — The Best Songs
Uriah Heep —The Best
Book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어머니> 막심 고리키
<무엇을 할 것인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강철군화> 잭 런던
정말로 혼자 여행을 다니는 사람은 왜 혼자 여행을 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는 사람이다. 정말로 외로운 사람은 왜 그렇게 외롭게 사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듯이. 혼자서 자기 나라의 먼 북쪽인 러시아를 여행하는 사람은, 둘이라면 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체크아웃 리스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두 번째 호텔에서 페테르고프에 가려고 호텔에서 짐을 쌀 때 나는 휴대 전화를 열어 미리 작성해놓은 체크아웃 리스트를 보고 빠뜨린 짐은 없는지 확인한다. 칫솔, 치약, 면도기, 충전기 2개, 영양제, 시계, 엠피스리 플레이어, 보조 배터리, 가이드북, 슬리퍼…. 체크아웃 리스트는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트로이카 호텔 모스크바’에서는 볼펜을, ‘스테이션 호텔 S13’에서는 물병을 두고 나와서 메모를 해야 하고 목이 마를 때 막막한 기분이 되어봤던 사람이 어느 날 가볍게 자신을 책망하던 끝에 발명한 것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 짐을 싸면서 체크아웃 리스트를 들여다본다. 동행이 있었다면 체크아웃 리스트는 작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행이 바로 리스트가 되어줄 테니까. 하지만 동행이 있든 없든, 나는 여행을 계속한다. 내 목적은 여행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 기차를 타고 페테르고프에 내렸을 때는 비가 왔다. 후드득후드득, 빗줄기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할 정도였다. 추웠고(북유럽인 이곳의 9월 중순 추위는 남유럽인 이탈리아 로마의 11월 중순 추위쯤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고), 배낭은 무겁고(배낭 속 카메라와 태블릿 PC의 무게만 3킬로그램에 가깝고), 캐리어 가방도 읽으려고 가져온 종이책들로 끌기가 버거웠다.
나는 호텔로 가기 위해 정류장에서 서둘러 버스를 탔고, 몇 정거장을 지나서야 방향을 거꾸로 잡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러시아의 버스에는 안내원이 타고 있다. 영어는 모르지만 구글맵으로 목적지를 보여주면 당황한 여행자의 질문을 다 알아듣는다. 구글맵은 러시아의 시골에서도 통하는 만국어다. 안내원과 내가 버스 안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동안 우산에서 떨어진 빗방울들이 사방에 튀고 캐리어 가방은 버스 안을 굴러다니고… .
페테르고프나 푸시킨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근교 도시들은, 서울 근교의 일산이나 분당하고는 인상부터가 다르다. 빗속에서 홀로 젖어가며 나는 페테르고프 기차역 주변을 둘러싼 짙고 깊은 녹음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버스 방향을 헛갈릴 정도로 마음을 빼앗겼다. 한국과 식생이 다른 북유럽의 빽빽한 침엽수 밀림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고, 알록달록한 러시아어 간판을 단 단층 상가 건물들이 널따란 풀밭 위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참 멀리까지 왔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혼자 장거리를 다니는 여행자는 찬비를 맞으면서도 처음 보는 숲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시간이 충분하다.
구글맵에서는 보통 공원 같은 녹지가 초록색으로 표시된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회색으로 표시된 부분들도 가보면 녹지인 경우가 많다. 흔히 도심에 푸르름을 더하는 시민공원의 성공작으로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파크를 들지만, 내가 가본 모든 러시아의 도시에는 그만한 공원이 보통 두어 개씩 있었다. 푸시킨의 예카테리나 공원은 얼마나 넓은지 사진을 찍으며 한 바퀴 도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뉴욕 센트럴파크는 면적이 3.41제곱킬로미터이지만 에카테리나 공원은 5.67제곱킬로미터이고, 그 옆의 알렉산드로브스키 공원은 그보다 더 크다. 이 잔디밭이 대부분인 공원은 가이드북에 소개되어 있지 않아 관광객들은 코앞에 두고도 모르고 지나가는 곳이다. 주로 현지인들이 예카테리나 공원의 소란스러운 외국인 관광객들을 피해 조용히 연인, 가족 단위로 시간을 보내는 시민공원 같다. 페테르고프에도 러시아 황실에서 조성한 1.3제곱킬로미터 정도 크기의 대형 정원이 두 개 있고, 그중 작은 정원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하지만 그 길 건너편에는 커다란 호수와 잔디밭, 듬성듬성한 숲으로만 이뤄진 공원이 하나 더 있었고, 나는 우산을 쓰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두 시간쯤 비가 흩날리는 잔디밭 위를 돌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근교 도시인 페테르고프나 푸시킨은 상업지역이나 주거지역을 빼면 대부분 잘 가꾼 공원이나 녹지로 구성되어 있다. 녹지에는 대개 이름도 붙어 있지 않다. 나는 호텔 앞으로 흐르던, 아름답게 장식된 이름 없는 냇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어째서 미국과 옛 소련 사이의 그 기나긴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이 물러서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이번에 고생길이 훤할 줄 뻔히 알면서도 혼자 멀리 러시아 여행을 떠난 이유에는 그런 호기심도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스몰늬 성당을 찾아가다가 또 한 번 센트럴파크만큼이나 멋진 커다란 공원을 만났다. 이곳도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었다.
옛 소련인들은 센트럴파크가 자유주의 진영의 뭔가 대단한 상징인 양 내세우는 미국이 그저 우스웠을 수도 있다. 센트럴파크만 한 넓이에, 센트럴파크만큼 잘 꾸며놓은 공원들이 상트페트르부르크 안에만도 몇 개나 있었다. 미국과의 냉전이 심각한 일이었다는 사실은 냉전의 일부였던 우리 한국인들도 잘 안다. 하지만 스몰늬 성당 가는 길에 찾은 타브리체스키 공원을 둘러보다 보니 옛 소련인들이 가졌을 법한 자신감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한 달 넘게 러시아를 돌아다니고 있다. 지난달 갑자기 추워졌을 때 시장에서 러시아인들이 한겨울에 쓰는 털모자도 사서 썼으니 내가 5퍼센트쯤 러시아인이 된 기분도 든다. 하지만 먼 남의 나라에 와서 관광객이라는 자기 본분을 잊는 것만큼 건방지고 위험한 일도 없다. 그런데 관광객이라니? 나는 어쩌면 여행자라는 말을 지나치게 대충 갖다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자 장거리를 여행하는 사람이 곧 정확한 의미에서의 여행자인 것은 아니다. 대니얼 부어스틴의 <이미지와 환상>에 따르면 나는 여행자보다는 관광객에 가깝다. ‘여행 Travel’ 이란 “원래 ‘문제’ ‘일’ ‘고뇌’를 뜻하는 고통, 즉 ‘트라베일 Travail’이란 단어에서 유래”한 말이고, 그러므로 여행자 Traveler란 뭔가 “노동이 필요하고 골치 아픈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자에겐 능동성이 있다. 하지만 18세기 미국에서 관광객 Sightseer이 나타난다. 미국 사전에서 이 단어는 “특히 즐기기 위한 여행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다. 관광객은 구경거리를 보러 다니는 사람으로, 수동적인 성격이다.
나는 관광객일까 여행자일까. 이번 세 달의 일정에서 ‘일’이라고 할 공식적인 업무는 이틀뿐이니 일을 하러 러시아에 왔다고 하기엔 민망한 감이 있다. 하지만 세 달 열심히 돌아다니며 러시아에 대해 뭔가 문학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 이 여행의 포괄적인 목적이니, 어쩌면 잘 노는 것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정이기도 하다. 어쨌든 애매하다. 그래서 나는 나름 고생을 사서 하며 독창성을 발휘해 여행자가 되어보려고 애쓰고 있다. 능동적이고 일에 가까운 여행에서 수동적이고 즐겁기만 한 관광으로의 이러한 변화는 기행문의 작법에도 반영된다. 기행문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여행지에 대한 정보의 기록이 아니라 “개인적인 ‘반응’의 기록이 되”었다. 지금도 서점에 가면 여행 정보를 실은 가이드북과 여행의 감상을 적은 여행 에세이가 따로 분류되어 있다. 이런 흐름이 시작된 게 200여 년 전이다. 그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게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1829년)이었다. 이 기행문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당시만 해도 관광의 변방이었던 이탈리아를 유럽 관광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는 로마 어디를 가면 어떤 볼거리가 있고 피렌체 어느 거리에 어떤 술집이 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정보는 없다. 하지만 괴테가 사랑했던 19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모습이 책 전체에 살아 숨 쉰다.
혼자 러시아로 떠나오면서 나는 이 여행이 관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도시에 머무르지 않고 근교 도시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일정을 짰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예매할 때도 한 번에 쭉 가지 않고 중간 기착지 도시들에 내려 하루 이틀씩 묵도록 일정을 끊어서 짰다. 그래서 벌써 두 번째 도시인 옴스크에서 밤을 보내고 있고, 내일은 노보시비르스키로 떠난다. 첫 번째 도시인 니즈니 노브고르드도 그 랬지만 옴스크에도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없다. 관광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면, 외국인 관광객이 없다는 사실은 이곳들엔 ‘즐길 만한 구경거리’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관광이 여행이 되려면 능동성이, 볼거리가 없는 곳에서도 볼거리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능동성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니즈니 노브고르도에서 볼가강 올레길은 어떤가? 레핀의 그림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과 돈 코사크 합창단이 부른 ‘볼가강의 뱃사공’을 상상 속에서 떠올리며, 나는 볼가 강의 누런 모래강변을 두 시간이나 걸었다. 이 강변길은 대중교통도 없는 도시 속 오지 같은 곳이다.
옴스크는 도스토옙스키가 유형 생활을 했던 곳이다. 박물관도 있다. 혼자 멀리 와서 나는 시베리아 유형지에 던져진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린다. <죄와 벌>에는 소냐와 로쟈의 이런 대화가 나온다. “외롭게 혼자 있으면 나 역시도 그렇지만, 미쳐버리고 말 거요. (…) (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는 함께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거요!” 하지만 인생이든 여행이든 동행을 얻는 일은 어렵다. 바로 그래서 혼자 여행을 다니는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과 함께 다니게 된다.
혼자 먼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과 함께 다니게 된다. 둘이서 다닐 때는 상대를 챙기느라 종종 잊곤 하는 자기 마음을 비로소 챙기게 된다. 여럿이 다닐 때 생겨나는 위계의 관계에서도 풀려나 비로소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게 된다. 혼자 여행하는 나는 용서를 구할 상대도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법을,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을 익히게 된다. 혼자 장거리 여행을 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이런 이유에서이다. 자기 마음과 다니는 사람은 결국 외로움까지 용서하게 된다. 글 / 백민석(소설가)
런던 드라이브
Music
The Clash — London Calling
Mild High Club — Skiptracing
The Milk Carton Kids — Snake Eyes
Khruangbin — White Gloves
Tin Hat Trio — Helium
Mark Orton — Gossip / Brownie’s Pie
Beirut — Gibraltar
Lorde — Royals
The Smith —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
Oasis — Don’t Look Back in Anger
Book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런던 필즈> 마틴 에이미스
여행에서 좋은 순간은 많지 않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내 첫 해외 여행지였던 아프리카에서였다. 삼 개월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이집트까지 육로로 여행하는 일정이었는데, 이십 대 초반이었던 그때의 내게는 들인 시간과 노력, 비용을 고려했을 때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한 대규모 프로젝트라고 할 만했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내가 기대한 건 그때까지 내가 살던 곳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던 것 같다. 사람들의 모습이나 언어와 문화, 냄새와 소리 등 모든 면에서 빈트후크나 나이로비는 서울과 비교하면 외계 행성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달랐던 것이다. 이전까지 서울을 떠나서도 일주일 이상 지내본 적이 없던 내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사실은 홀로 그런 낯선 곳을 여행하는 데는 인천-요하네스버그 왕복 항공권의 값을 치러야 하는 만큼이나 정확하게 외로움의 값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요하네스버그행 여객기에 탑승하자마자 그것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체크인을 하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출국심사까지 끝낸 다음 기내의 지정된 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백 일 동안 꼼짝없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 그것도 어떤 위험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야 했다. 처음에는 나를 사로잡은 그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프리카라고 여행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실은 많고) 거기다 한국인 여행자도 아주 드문 편은 아니지만, 내가 여행을 시작한 5월 말이 남반구에서는 겨울에 접어드는 시기라 여행 비수기에 해당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장소는 그나마 나았지만 대중적인 루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끔찍한 외로움에 직면해야 했다. ‘끔찍한 외로움’이라는 표현이 조금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어떨 때 외로움은 감정의 수준을 넘어서 감각으로 다가오곤 하니까. 어떤 상황에서는 외로움이 마치 추위처럼 물리적인 실체를 지니곤 하는 것이다. 나는 케이프타운의 아름다운 항구에서, 나미비아에서 잠비아로 넘어가는 한밤의 국경에서, 구십 시간 동안 초원을 가로질러 탄자니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느낀 잔잔한 외로움은 그럭저럭 견뎠지만, 탄자니아에 있는 이름도 낯선 ‘모시’라는 마을 외곽의 작고 음침하고 아무도 없는 호텔에 갇혀(사연을 말하자면 길지만 아무튼 나는 말 그대로 그곳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사흘을 보내고 나서는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소스라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 헤맸다. 그때 나는 외로움 때문에 정말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나라를 잃고 타지를 떠도는 사람들에 대해 자주 떠올렸던 것 같다. 그런데 또 나중에는 어떤 열렬한 해방감이 나를 찾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조증 비슷한 망상적 해방감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무한한 자유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며 온전히 스스로 존재하는 단독자다, 나는 자유다! ‘러너스 하이’가 있는 것처럼 ‘백패커스 하이’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된 거 해방이라도 갖지 않으면 안 되겠어, 하는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프리카에서의 삼 개월을 생각하면 그런 감정의 반복이었다.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어땠어? 좋았어?”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사실 그런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건 마치 “이번 인생은 어땠어? 좋았어?”라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아무리 나쁜 인생이라도 좋은 순간은 있을 테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다. 내 아프리카 여행이 좋았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여행이 이후 내가 떠난 여행들의 원형이 된 것은 확실하다. 나는 이후에도 혼자 여행을 떠났으며, 어떨 때는 몸서리를 칠 정도로 호되게 당하기도 했지만(급성 편도염에 걸리는 바람에 택시를 불러 응급실행을 했다가 숙소로 돌아와 며칠 동안 끙끙 앓으며 혼자 눈물을 흘린다든가), 여전히 혼자 하는 여행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 많지 않지만, 일행이 있더라도 따로 다니는 시간을 갖곤 한다. 아주 작정하고 나만의 시간을 갖기로 하는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혼자 하는 여행과 함께하는 여행의 하이브리드 버전이라고 할까. 친구와 함께 떠난 이번 런던 여행의 테마가 근교 드라이브에서 런던 시내 드라이브로 바뀌게 된 이유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바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솔즈베리, 브라이튼, 라이,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캔터베리까지 둘러보는 것이었지만, 이 중에 정말로 간 곳은 솔즈베리의 스톤헨지뿐이었다. 런던의 평원과 구릉지대를 달리는 건 정말 멋졌지만 우리는 시내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심을 벗어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천문대가 있는 그리니치에도 가봤는데 거기가 우리가 기대한 것만 못했던 것도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차를 몰고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대화재 기념탑이나 타워브리지 같은 것들을 구경하다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싼 런던의 주차비까지 감수하고 시내 한복판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미술관에서 대영제국의 방대한 수집품들을 감상하는 동안 런던 시내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피카딜리에서 코번트 가든으로, 또 하루는 쇼디치에서 서더크로.
그래서 런던에서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아무 목적 없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닌 시간이 대부분이다. 쇼디치에서는 그라피티가 가득한 벽을 구경하며 한참을 걷고 나서야 그곳이 뱅크시가 런던에서 주로 활동한 구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구글에 검색해보니 내가 이미 지나온 길에 그의 스텐실 작품이 몇 개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바운더리 가든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뱅크시도 작업할 장소를 찾아다니다가 한 번쯤은 나처럼 그 기이한 구조의 로터리 가든에 앉아서 숨을 돌렸을 것이며, 그렇게 앉아 있는 (얼굴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그러고 있다가 일상용 소도구를 파는 작은 가게에서 가족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몇 개 사고 일행을 다시 만나 저녁을 먹으며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런 것이 런던에서 만난 좋은 순간들이다.
이번 여행에서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 있다면 혼자 여행한 후에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런던의 거리에서 본 것들을 고스란히 느끼는 대신 그것을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할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하루를 마치고 일행에게 이야기할 버전과,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 가족에게 이야기할 버전 등 수많은 버전의 이야기들이 런던을 걷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세 달 내내, 말라리아에 걸려서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시달리거나 킬리만자로를 등반하다가 고산증으로 죽다 살아났을 때도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생하게 전달할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모시의 그 공포스러운 호텔에 갇혀서도 이걸 어떻게 말해야 내가 얼마나 끔찍스럽게 외로웠는지 제대로 전달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니, 나는 사실 그렇게 끔찍하게 외로웠던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좋은 순간이 꼭 그렇게 많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일행과 함께 그리니치에 다녀온 날 런던 중심부를 관통해 외곽에 있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심한 정체를 만났는데,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사이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전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난 뒤부터 우리는 더 이상 대화도 나누지 않고 길을 따라서 나아갈 뿐이었고, 나는 차창을 통해 비치는 풍경을 보면서 이렇게 끝없이 운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두 시간이 넘게 운전을 한 뒤 결국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친구에게 드라이브를 더 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차에 올랐는데 이상하게도 혼자 차에 오르자 그 정체 행렬에 합류하는 게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외로움을 유별나게 많이 타는 사람인지, 아니면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란 원래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 아직도 조금 헷갈린다. 글 / 정영수(소설가)
파리의 벤치들
Music
John Lewis — <Bach Preludes & Fugue>
조성진 — <Debussy>
Iggy Pop — <Free>
Maria Joao Pires — Schubert’s Fantansy In F Minor
Anne Sophie Mutter — Tartini Violin Sonata In G Minor
Evgeny Kissin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Lust For Youth — Great Concerns
Toro Y Moi — Ordinary Pleasure
Jai Paul — Do You Love Her Now
Book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 아녜스 푸아리에
<감정교육> 플로베르
<파리의 농부> 루이 아라공
<우연과 필연> 자크 모노
파리는 처음이었다. 지인의 충고에 따라 생 마르탱 운하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마레 지구까지 걸어갈 수 있어. 지인이 말했지만 감흥이 없었다. 생 마르탱도 마레 지구도 낯선 지명이었다. 내가 아는 건 파리의 좌안과 우안, 갈리마르와 콜레주 드 프랑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내 말을 들은 친구는 6.25 동란 시절 얘기하냐고, 좌안과 우안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행여나 카페 드 플로르에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사르트르는 고사하고 생 로랑 쇼핑백을 든 정신 나간 관광객들만 가득하니까. 나는 사실 다음 생에는 생 로랑 쇼핑백을 든 관광객으로 태어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작가니까 좀 더 그럴듯한 눈으로 파리를 봐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이 가본 곳에 이제야 간다는 게, 그것도 프랑스 문학과 영화, 역사를 줄줄 꿰고 있는 사람이 이제야 파리에 간다는 게 이상하다고 지인은 말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얘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프랑스의 정신이지 파리의 아름다움이 아니야…. 이번에는 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갔다 와서 얘기하자.
두 개의 신드롬 사이에서 파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파리를 방문한 관광객이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다른 풍경에 놀라 트라우마를 겪는 현상으로 프랑스에서 일한 정신과 의사 오타 히로아키가 1986년 처음 진단했다. 파리에 환상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불친절한 실제 파리를 접하고 충격을 받아 호흡곤란, 심장발작, 공황 등의 증상을 일으켰다고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센강이 보잘것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망할 거라고, 물도 더럽고 크기도 작다고. 소매치기 조심해. 인종차별도. 그래서인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센강에는 더욱 관심 없었다. 거긴 몰취향하고 철없는 관광객들이나 가는 곳 아닌가. 파리에 왔으니 I.M. 페이가 지은 루브르의 피라미드 정도는 봐야지, 그렇지만 다른 건 관심 없어. 나는 쿨한 태도를 유지했다. 거리에선 오줌 냄새가 났고 지하철 창구 직원은 불친절했다. 혼자 돌아다니며 돈을 쓰지 않는 동양인에게 파리는 특별한 곳이 아니었다. 파리에 도착한 둘째 날, 루브르로 향했고 튈르리 가든을 지나 잠깐 센강을 보러 갔다. 카루젤 개선문을 통과해 로터리를 돌았고 카루젤 다리가 보였다. 날씨는 완벽했다. 9월 초였고 햇살은 뜨거웠지만 구름이 자주 해를 가려 나무 아래를 찾지 않아도 그늘이 졌다. 바람은 시원했으며 빛을 받은 회색 대리석 건물들은 희게 빛났다. 센강의 물결과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조깅하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들이 풍경화처럼 위치해 있었다. 나는 루브르에 들어가는 것을 잊고 센강 아래로 내려갔다. 어떤 사람이 다가와 담배를 빌려달라고 했다. 인종차별은 당하지 않았고 소매치기도 없었으며 파리 특유의 오줌 냄새도 나지 않았다. 카루젤 다리와 퐁네프, 멀리 보이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에펠탑, 그리고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빛이 강 표면에 닿아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좌안의 서점과 카페, 상점을 구경하고 해가 질 때 즈음 다시 카루젤 다리로 돌아왔다. 하늘은 어둑어둑했고 강 주변의 조명은 검게 물든 나무와 산책로를 오렌지 빛으로 채색했다. 센강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루브르의 벽에 발렌시아가의 대형 광고판이 걸려 있었고 아래로 유람선이 지나갔다. 나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던 것 같다. 아마 잠깐 주저앉았고 다리를 건너던 커플이 불쌍한 동양인을 발견하고 도와주려 했으나 얼른 다시 일어났다. 공황이 온 것처럼 호흡이 곤란했고 어지러웠다. 나는 난간에 기대 숨을 골랐다. 진단명: 스탕달 신드롬. 이후 여러 번 센강을 찾았는데 모든 지점에서 그때와 같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센강은 아름답지만 가장 좋았던 건 카루젤 다리를 건널 때였다. 한 프랑스인은 구글 리뷰에 카루젤 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리뷰를 남겼다.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다리입니다. 아래에 물이 있습니다. 희귀한 물이 됩니다….” 별 다섯 개.
엘즈워스 켈리의 경우 일명 ‘고스트 아미’는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군의 제603 위장공병 특수대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 부대의 병사들은 미술 및 디자인을 배운 이들로 고무 전차와 트럭 등 각종 시각적 속임수로 독일군에 맞서 연합군을 도왔다.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 회화 작가가 되는 엘즈워스 켈리는 이 부대 출신이었다. 그는 보스턴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자신이 전쟁을 수행했던 그 도시, 파리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직 뭘 좋아하는지도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는 애송이 엘즈워스 켈리는 센강 바로 옆에 있는 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고, 홀로 루브르와 기메 미술관을 들락날락하며 거장의 그림을 모사했다. 언젠가 뭐 하나 얻어걸리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가 다닌 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 루브르로 가기 위해선 카루젤 다리를 건너야 했다. 매일 다리를 건너던 엘즈워스 켈리는 센강의 표면에 부딪치는 빛의 산란을 바라보며 미래의 거장이 될 결정적인 영감을 받는다. 그가 추상화로 발길을 돌린 첫 작품 ‘센seine’(1950)은 센강의 물결과 빛을 사각형 격자로 표현한 그림이다. 고향을 떠나 홀로 파리를 쏘다니던 예술가 지망생을 진짜 예술가로 만든 건 ‘모나리자’도 ‘생각하는 사람’도 아닌 센강이었다.
파리의 랑데부 에릭 로메르의 1995년 작 <파리의 랑데부>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영화다. 에릭 로메르의 작품답게 걷고 이야기하고 또 걷고 또 이야기하는 프랑스인들의 모습과 일상적인 풍경이 담겨 있다. 특히 두 번째 에피소드인 ‘파리의 벤치들’은 본격적으로 파리의 공원들을 비춘다.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불륜 커플로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파리의 공원을 돌아다닌다. 뤽상부르, 라 빌레트, 벨빌, 트로카데로, 페르 라쉐즈…. 영화 때문에 파리에 오기 전부터 공원을 돌아다녀야겠다, 라고 결심했으면 좋으련만 내가 영화를 본 건 파리에 오고 난 뒤다. 파리의 밤은 위험했고 해가 지면 숙소로 돌아와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외장하드에 영화를 여럿 담아왔는데 <파리의 랑데부>는 그중 하나였다. 파리에 왔으니 파리의 랑데부를 봐야지! 유치한 짓이지만 때론 이런 유치한 짓이 놀랍도록 적중한다. 참고로 얘기하면 <파리의 랑데부> 첫 번째 에피소드는 퐁피두 센터 바로 옆의 카페가 배경이고 세 번째 에피소드는 피카소 미술관을 둘러싼 마레 지구가 배경이다. 그러니 파리를 여행한 사람(또는 여행할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꼭 보기를. <미드나잇 인 파리>가 파리가 처음인 관광객을 위한 영화라면 <파리의 랑데부>는 파리에 살 거나 파리 방문이 세 번 이상인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에 나온 공원들을 하나씩 돌아다녔다. 심지어 영화에 나오지 않은 공원까지도! 파리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즐비하고 날씨는 완벽했으며 혼자라는 사실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말을 걸 사람도 말을 거는 사람도 없다. 이 방향이 좋을까, 저 길이 좋을까, 여기에 앉을까, 이곳에 누울까, 묻지 않아도 된다. 배가 고프면 참았고 다리가 아프면 아무 곳에나 주저앉았고 잠이 오면 잤다. 조금은 노숙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파리의 랑데부>에서 산책을 하는 연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가끔은 노숙자가 부러워.”, “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살잖아. 그런 특권은 아무나 누리는 게 아니야.” 파리 집값을 생각하면 정말 맞는 말이다. 공원에는 가족도 있었고 커플도 있었지만 혼자인 사람도 있었다. 트로카데로의 분수대를 수영장처럼 이용하는 백인 소년을 봤고 벨빌 공원의 벤치에 둘러앉아 랩을 연습하는 10대 흑인을 보았으며 아녜스 바르다의 묘지를 찾아 페르 라셰즈를 헤매는 붉은 머리의 중년 여성을 만났다. 그녀가 아녜스 바르다의 묘지가 어딨는지 물었지만 나는 단지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도움은 안 됐지만 그녀는 내 대답에 만족해했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라 빌레트 공원에 가기 위해 전동 킥보드인 라임을 대여했다.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도시에 웬 전동 킥보드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파리는 라임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디언>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썼다. ‘파리는 라임에 점령당했다!’ 라임이 파리의 경관을 해치는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라임의 유동성은 파리지앵의 성격에 완전히 부합한다. 19세기의 고전적인 건물 앞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전동 킥보드. 다른 나라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물론 너무 자유롭게 타고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정부에서 제재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운하를 따라 이십 여분을 달렸다. 운하 주변은 오래된 휴양도시 같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카페와 바에는 아페리티프를 마시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라임을 세우고 라 빌레트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림자 한 점 없이 강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넓은 잔디밭 중앙에 상의를 벗고 혼자 앉아 있는 흑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리는 짧은 금발이었고 어깨에는 문신이 있었다. 배경으로 숲과 라 빌레트의 조형물이 보였다. 나는 그늘 진 벤치에 누워 잠을 청했다.
루이 아라공의 경우 루이 아라공이 1926년에 쓴 <파리의 농부>는 도시 산책자들의 성서와도 같은 책이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의 농부>를 읽고 파리를 배경으로 한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영감을 받기도 했다. <파리의 농부>에서 루이 아라공은 동료인 앙드레 브르통, 마르셀 놀과 함께 낡은 파사주를 통과하고 곧 사라질 덧없는 광고 간판과 상점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그가 책의 마지막에 이르게 된 곳은 19세기 후반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만든 뷔트 쇼몽 공원이다. 뷔트 쇼몽에 이르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루이 아라공은 밤 늦게 공원에 가고 싶었고 그 시간까지 문을 연 공원이 뷔트 쇼몽 밖에 없었다. 그에게 뷔트 쇼몽은 ‘자살의 메카’이자 밤안개에 휩싸인 신비로운 공원이었다. 그는 공원에서 길을 잃고 공상에 빠져 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서술한다. 혼자 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고독에 대해서. 나는 9월 마지막 주 주말 뷔트 쇼몽에 갔고 루이 아라공의 심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가 초현실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초반 파리의 신비로움 같은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뷔트 쇼몽은 다른 공원과 달리 언덕과 현수교, 인공 폭포와 동굴, 작은 규모의 신전을 가진 아기자기하고 잘 꾸며진 공원이다. 주말이라 피크닉 나온 사람들이 넘쳤고 내가 앉아 책을 읽었던 벤치 바로 옆 언덕에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온 부부가 있었다. 한참 <파리의 농부>에 빠져 있을 때 아기는 똥을 쌌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힘을 합쳐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 와중에 부부는 나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불어를 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미국인이었다. “아임 소리.”, “노 프라블럼.” 그러니까 파리지앵들에게도 생소했던 뷔트 쇼몽은 어느새 관광객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나는 뷔트 쇼몽의 언덕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 공원을 내려보았다. 관광객과 파리지앵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 공원에 있는 동안 모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모두 평화로웠다. 글/ 정지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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