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김정기 작가가 펜을 든 시간 중 15시부터 22시 15분까지의 대화다.
<지큐> 창간 20주년 기념 아트워크 라이브 드로잉을 앞두고) 작업 끝나고 인터뷰하시겠다고 들어서 그려도 그려도 라이브 드로잉은 여전히 긴장되는 일인가 보다 했어요. 전혀 아닙니다. 그림 그릴 때는 긴장 하나도 안 합니다. 오늘 사진 촬영이 제일 긴장되지. 예전에 정장 입고 촬영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와, 난 진짜 안 되겠다, 직장 생활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했습니다. 이따 그림 그리면서 말해도 됩니다. 적막한 것보다 소리 나는 환경이 더 좋습니다.
지금 이야기를 하면서도 낙서를 하시네요. 손목은 괜찮으세요? 아직까지는. 처음 그릴 때 자세라든지 연필 잡는 법이라든지 습관을 좋게 들인 것 같아요. 손가락에 굳은살은 많이 박혀 있는데.
정말 오른쪽 중지가 발레리나 발가락 관절처럼 툭 튀어나왔네요. 그렇죠?
진지하게 궁금했어요. 여섯 살 때 선물 받은 스케치북 표지가 너무 예뻐서 그때부터 그림에 빠졌다고 하셨죠. 지금껏 김정기라는 이름으로 쏟아낸 작품 수를 보면 “여섯 살 때부터 계속 그렸다”라는 표현이 흰소리가 아니다 싶어요. 그전에도 그렸을 거예요, 분명히. 여섯 살부터 기억하는 건 친구 아버지가 선생님이었는데 당시 걔네 집에 종이가 엄청나게 많았어요. 그래서 둘이 매일 거기에 그림 그렸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부터 꿈이 만화가였어요. 한 번도 변한 적 없어요. 그 친구도 지금 게임 회사에서 일해요.
뭘 그리 그렸어요? 저는 갖고 싶은 걸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예를 들어 운동화가 갖고 싶다, 그러면 광고나 잡지책에 나온 사진을 유심히 봐요. 친구 신발 들어서 꼼꼼히 보기도 하고, 집에 와서는 그려보는 거예요. 초등학교 때 일기 보면 사람은 단순하게 그렸는데 신발은 엄청 자세해요. 바늘 한 땀 한 땀 그릴 정도로. 그러다 아빠 신발도 그려볼까? 엄마 신발도 그려보고, 신발 그리다 보니까 발에도 관심 갖게 되고. 자전거가 갖고 싶다, 그러면 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 관찰해서 그리고. 자전거를 그릴 수 있게 되면 그다음 오토바이 그리는 건 쉬웠어요. 그렇게 가지치기 형식으로 그리다 보니까 그릴 수 있는 스펙트럼이 정말 넓어졌어요.
그렇다 한들 묻지 않을 수 없어요. ‘김정기 라이브 드로잉’을 검색해서 나오는 영상을 보면 이런 말밖에 안 나오거든요. “뭐야, 이 사람? 대체 어떻게 그리는 거야?” 지겹게 들으셨죠? “하얀 종이가 겁나지 않으세요?”라는 말도 많이 듣고. 그런데 “뭐 그릴 거야?” 물으면 “모르겠어요” 하는 애들이 정말 많거든요? 제가 애들도 가르쳐봤는데 뭘 그릴지 모르겠다는 애들이 정말 많아요. 저는 그릴 게 진짜 많아요.
그릴 게 많은 것과 그 많은 것을 그리는 일은 다르잖아요. 그것도 스케치나 준비 과정 없이 텅 빈 종이에 바로. 생각해보면 제가 일반적인 작업 방식과 다른 점이 뭐냐면, 만약 오리너구리를 그리라고 하면 대개는 컴퓨터로든 뭐로든 오리너구리의 이미지 자료를 찾아야 해요. 저는 예전에 <동물의 왕국>에서 본 오리너구리,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본 오리너구리, 그간 보고 머릿속에 갖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려요. 그걸 꺼내 쓰는 거죠. 보고 그리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본 걸 그리는 거예요.
기억력이 엄청 좋은 거라고 해야 할까요? 어릴 때부터 시각적 기억 능력은 좋았어요. 왜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예를 들자면 제가 영화를 되게 좋아했거든요. <로보캅>을 보고 오면 로보캅 그려보고, 거기 나온 나쁜 로봇, 배우도 그렸어요. 처음엔 당연히 닮지 않았죠. 그런데 훈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으니까 그렸어요.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사물을 기억하는 능력도 훈련이 되었고, 상황을 어떻게 구성할지도 기억이 되었고, 사물의 특징을 보는 것도 훈련이 된 것 같아요.
작가님의 필모그래피를 놓고 봤을 때 현재까지 삶을 크게 두 챕터로 나눌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번째는 2001년, 꿈이던 프로 만화가로 데뷔한 때. 맞습니다. <NA>라고 텔레콤 회사 정기 간행물에 그림을 그렸어요. <영점프>에 ‘퍼니 퍼니’도 연재하고. 그때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날 같이 만화 그리던 형들이 서울 출판사에 간다는 거예요. 따라나섰어요. 그때까지는 어깨가 하늘에 치닫고 있었어요. 주변에서 워낙 잘한다 해서. 그런데 그때 한 11군데 출판사에서 퇴짜 맞았어요. 다 똑같이 말했어요. 우리나라에 맞는 그림체가 아니다. 그때 너무 충격 받아서 인생에서 가장 오래 그림을 안 그렸어요.
지금과 그림체가 달랐어요?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생각해보면 그때는 <드래곤볼> 같은 만화가 유행이었어요. 정말 만화 같은 그림체. 눈 크고, 귀엽고. 미치겠는 거예요. 내가 그림체를 바꿔야 하나? 유행하는 대로 바꿔야 하나? 그런데 같은 팀 형이 그러더라고요. 정기야, 너 그림체 괜찮아, 계속해봐. 주변에서 그렇게 말해주는 분들 덕에 고민에서 좀 벗어났어요. 그리고 딱 1년 있다가 포트폴리오 몇 장 더 추가해서 다시 서울에 갔어요. 그런데 그 1년 사이에 시장 환경이 바뀌었더라고요. 그때는 다들 같이 하자는 거예요. 그때 막 <슬램덩크>가 나오면서 사실적인 그림이 대두되는 분위기였던 거죠.
본인 스타일을 밀고 나가길 잘했네요. 그리고 또, 그림 그리는 사람 본인이 재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는 그리기가 싫더라고요. 나 하나 정도는 예쁜 것보다는 좀 못생기거나 특색 있게, 내 스타일로 밀어붙여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촬영 준비가 끝나서 라이브 드로잉 먼저 하고 인터뷰 이어갈게요. 그림 그릴 때 말씀하셔도 됩니다.
(16시 30분, 빈 종이 가운데 선을 그렸다. 라이브 드로잉이 시작되었다.) 정말 말해도 돼요? 그럼요.
틀리면 어떡해요? 틀린 건 나만 아는데요, 뭐. 초창기에는 틀리면 틀린 게 계속 머릿속에 자리 잡아서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하다 보면 완벽할 수가 없더라고요. 최대한 실수를 줄이려고 하지만 만약 실수했을 때는 다른 방법으로 또 그려나가야죠. 인생이랑 비슷한 것도 같은데, 언제나 우리 계획한 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거기 주저 앉아버리면 안 되니 다른 길 찾고, 또 다른 길 찾고, 해답을 조금씩 찾아나가잖아요. 그림도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림도 많이 늘었습니다.
이 사람 머리 그리다가 저 사람 팔 그리고, 작가님 그림은 순서대로 진행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라이브 드로잉할 때 30~40퍼센트 이미지만 갖고 일단 위치부터 배치해요. 가깝고 멀고의 차이라든지 그런 걸 생각해서 배치하고, 그 사이에 애드리브같이 (그림을) 만들어내면서 연결시키는 방식이에요.
그게 일반적인 드로잉 방식인 건…. 아니죠. 그렇게 하려면 완성 그림이 머릿속에 있어야 해요.
두 번째 챕터는, 해외 활동의 기점이 된 2011년이에요. 부천국제만화페스티벌을 통해 라이브 드로잉이라는 장르를 김정기의 것으로 만든 시점이죠. 맞습니다. 부스 앞은 터놓고 3면을 전시하는데 다들 그림, 콘티를 액자로 만들어 거는 식이었어요. 그때 김현진 대표님(김정기 소속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슈퍼애니의 공동 대표이자, 김정기의 “아티스트적 면모를 발굴”한 인물)이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정기 쌤, 우린 그런 거 하지 말구요, 그냥 종이 붙이고 정기 쌤이 좋아하시는 낙서나 하세요.” 생각해보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3면에 종이를 붙였는데 한 면이 3미터였으니까 총 9미터가 되는 거죠. 그 종이에 주욱 그려나가고 현진 쌤이 촬영했어요. 그때는 캠코더 하나로 단순하게 찍었죠. 사람들 구경 오면 사인해주고, 친구들 오면 이야기 나누고. 그렇게 3일 동안 찍은 걸 빠르게 편집해서 재미 삼아 유튜브에 올렸어요. 그렇게 파격 효과가 클지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해외 활동이 시작됐습니다.
그 이후 필모그래피를 정리하기가 참 난처하더라고요. 마블, DC 코믹스, 블리자드, 던전앤파이터, 작가들과의 협업…. 워낙 많이 해서요. 진짜 많이 했습니다. 파리 필하모닉하고도 했고, 국가 일도 많이 했고, 진짜 장르 불문하고 했죠.
그런데 꿈이 만화가였는데 이제는 라이브 드로잉에 치중되는 점이 아쉽지는 않나요? 그런데 저는 이 라이브 드로잉이 한 편의 만화라고도 생각해요. 한 장면 안에 기승전결이 있으니까. 한 폭 안에 함축적으로 그려 넣으니까. 제가 학생들 가르칠 때만 해도 만화로 애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 게임 일러스트, 웹툰, 출판 만화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 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가고 있는 길은 우리나라에 있는 만화 작가가 잘 안 하는 방식이거든요? 다양한 협업을 하고,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림도 팔고, 그림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만화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걸.
만화를 어떤 틀 안에 가둘 필요가 없는 거네요. 그렇 죠. 특히 지금처럼 콘텐츠가 중요한 시기에는 자기 색깔을 갖고 있다면 내 것이 쓰일 데가 정말 많아요. 자기 그림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더 많아진 거예요.
작가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예술의 경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돼요. 김현진 대표님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시네요. (곁에 앉아 있던 김현진 대표가 답했 다.) 그 질문이 너무 좋습니다. 한 예로 이런 일이 있 습니다. 그림에 대해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유튜브 채널인데 김정기를 주제로, 김정기는 왜 뉴욕 현대 미술관에 작품이 못 들어가느냐, 뱅크시는 되고 김 정기는 왜 안 되느냐, 그런 토론이 있었습니다. 예술 이냐, 아니냐. 그런데 저희는, 김정기 작가는, 이게 예술이니, 현대 미술이니, 만화니, 생각 하나도 안 해요. 그냥 자기 잘하는 대로 낙서할 뿐이지.
지금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림만 그리고 계시고. 하하하.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냥 저는 좋아하는 걸 그릴 뿐입니다. 그림 그리는 행위, 그 자체가 재밌어 요. (김현진 대표가 이어 말했다.) 저도 작가인데, 제 가 학생과 아티스트에게 하는 농담이 있어요. 내가 김정기를 발굴해서 여러분께 보여드렸다. 미안하다. 무슨 말이냐면요, 김정기를 보고 자란 세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은 다 이렇게 하는 줄 알아요. 그게 아니 에요. 정확하게 얘기하면요, 우리처럼 시각적인 훈 련을 많이 하는 사람은 분명 이미지를 떠올릴 수는 있어요. 엄마 얼굴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엄마 얼 굴을 그리려면 눈이 어찌 생겼는지 안 그려집니다. 머리 가르마가 어느 쪽이더라? 안 그려집니다. 머릿 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캔버스로 그대로 가지고 온다 는 거, 그게 대단한 겁니다. 보고 그리는 사람은 많습 니다.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그대로 그려내는 건…. 이건 같은 작가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김정기 작가님은 천재적, 천부적이라는 표현은 꺼리는 것 같아요. 저는 진짜 많이 그렸어요. 무식하게 정말 많이 그렸어요. 가만히 있을 때도 그 냥 그려요. 사람 만나면 ‘저 사람 얼굴은 악당 역할 에 어울리는 그림인데?’, 공간 보면 ‘여기서 이런 장 면이 나오면 좋겠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그림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고 많이 그렸어요. 재능은 모르 겠어요. 재능도 약간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하지만 하여튼 열심히, 아니, 재미지게 많이 그렸어요.
프로 만화가가 된 게 20년 전, 라이브 드로잉이라는 장르의 기준이 된 게 10년 전이에요. 올해 무언가 또 기점이 될 만한 에피소드가 있지 않을까 기대돼요. 그렇네요. 마침 올해 국내에서 큰 개인전을 준비 중 이에요. 한번 정리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 아마 이 번 전시가 끝나고 나면 한 단계 또 성장하지 않을 까…. 전시 준비하면서 또 많이 그리게 될 테니까.
오늘 제일 많이 하신 말씀, “많이 그린다”. 정말로. 저게 다 그림이에요. (작업실 구석구석을 채운 박스, 파일, 종이 뭉치를 가리키며) 여기 있는 것만 한 4천 점 돼요. 그냥 저는, 어릴 때 그 기분을 유지하려고 해요. 아빠가 달력 탁 찢으면 그 달력은 언제나 제 차 지였거든요. 어릴 때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종이였어 요. 거기에 볼펜으로 낙서하던 그 기분. 아무 생각 없 이 그릴 때의 그 기분을 유지하고 싶어요.
인생에서 그림을 가장 안 그린 시기가 있었다 했는데 얼마나 그림과 떨어져 있었던 거예요? 2주?
김정기 작가가 고른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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