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진실보다 어떤 어젠다를 선점해서 그것을 믿게 만드는 데 힘을 쏟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할 때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비극적인 이야기다. 프랑스에 사는 열세 살 소녀가 잦은 결석으로 인해 정학 처분을 받았다. 소녀는 모로코 출신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게 두려웠다. 상황 모면을 위해 소녀는 “선생님이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보여주려는 데 항의했다가 수업에서 배제됐다”고 거짓말했다. 딸의 말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격분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교사의 이름과 학교 주소를 올리며 공개 저격했다. SNS 세상에서 분노의 전파 속도는 코로나 바이러스 수준이다. 교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표적이 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거리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2020년에 벌어진 일이다. 또 하나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미국 워싱턴 D.C의 피자 가게에 들어섰다. 남자는 피자를 구매하지 않았다. 대신 총을 난사했다. 경찰에 붙잡힌 남자는 왜 이런 일을 벌였냐는 질문에 답했다. 소아성애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라고.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민주당 후보가 피자 가게 지하에서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다는 음모론이 불러일으킨 총기 테러였다. 2016년 발생한 기가 차는 사건이다.
넷플릭스 <지옥>에도 거대한 거짓말이 나온다. 천사로부터 지옥행 날짜를 ‘고지 告知’ 받은 사람이 예고된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로부터 무자비하게 ‘시연 試演’ 당하는 설정의 <지옥>은 정작 사자들의 목적에는 큰 관심이 없다. 초자연적 상황에서 공포가 어떻게 득세하고, 이 상황이 누군가의 세력 확장에 어떻게 활용되며, 그릇된 군중심리가 사회를 얼마나 위험하게 하는가에 더 관심을 표할 뿐이다. 그 중심에 유아인이 연기한 신흥 종교단체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가 있다. “인간은 의미가 없으면 자멸해 버리는 족속들”이라고 믿는 정진수는 초자연적 현상을 왜곡해 사람들을 현혹한다. 정진수의 거짓말에 광신도 단체, 자경단, 화살촉 유튜버 등이 가세하며 세상은 진짜 지옥이 된다.
세상에는 진실보다 어떤 어젠다를 선점해서 그것을 믿게 만드는 데 힘을 쏟는 사람들이 있다. 정진수가 이용한 건 공포였다. 무릇 역사에서 공포는 대중을 선동하는 데 가장 잘 먹히는 장사였다. 흑사병이 창궐한 중세 유럽에서는 원인 모를 이 병을 마녀가 한 짓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히틀러는 날조된 뉴스로 유대인을 악마화하며 나치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할 때 누군가는 마녀로 화형당했고, 누군가는 아우슈비츠에서 비명에 갔으며, 누군가는 혐오의 대상이 됐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이 글로벌 시청 1위를 차지한 데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을 관통하는 공감대가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최근에는 이런 상황을 드러내는 개념도 등장했다. 탈 脫진실이라 불리는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영향을 미치는 현상)’다. 1992년 잡지 <네이션>에 처음 등장한 이 용어가 급부상한 배경에는 가짜 뉴스의 범람이 있다. 전문가들은 가짜 뉴스가 본격화된 시기를 2016년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선 때로 본다. 실제로 ‘버즈피드’ 분석에 따르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4개월간 페이스북에 공유된 가짜 뉴스는 870만 건으로 주요 언론사 뉴스의 페이스북 공유 수인 730만 건을 앞섰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지금부터다. 이 시기 가짜 뉴스를 퍼뜨린 도메인을 역추적한 결과, 생뚱맞게도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벨레스’가 잡혔다. 가짜 뉴스를 만든 이들 대부분은 10대였다. 벨레스의 10대들은 온라인에 떠도는 음모론을 ‘컨트롤C+컨트롤V’ 해서 찍어내고, 유포하고, 이를 통해 짭짤한 광고 수익을 챙겼다. 이들은 힐러리보다 트럼프에 유리한 가짜 뉴스를 더 많이 생산했다. 왜? 트럼프가 매수해서? 힐러리가 싫어서? 정치적 목적과는 하등 관계없다. 그저 트럼프 뉴스가 더 잘 팔렸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 사이트를 운영한 한 청년은 훗날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우리 스토리를 좋아하고, 우리는 그들로부터 돈을 버는 거죠. 그 스토리가 진짜든 가짜든 누가 상관하죠?” 미국 대선판을 흔들었는데, 이 청년,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거 보소.
주지하듯, 벨레스에 사는 10대들이 미국 대선의 변수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소셜 미디어가 있다. 그곳에서 잘 팔리는 건 진실이 아니라 감정이다. 이용자들은 감정을 고양시켜주는 ‘힙’한 아이템, 이를테면 자신과 견해가 일치하는 의견, 각종 폭로와 분노, 자극적인 루머들 앞에서 동공 지진을 일으킨다. 미끼를 문 이용자는 ‘하트’로 공감을 표하고, ‘리트윗’으로 논란을 확산시키고, ‘댓글’로 의견을 더한다. 이 세계엔 수많은 방구석 코난이 참전한다. 코난들은 애매모호한 단어 하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그럴듯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진실 여부는 상관없다. 그것이 또 다른 수익을 창출해낸다면. 혹은 정의의 사도에 빙의한 마음을 충족시켜준다면.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여론을 형성해 진실을 위협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는 페이스북·인스타그램·구글 등의 개발에 참여했던 전직 직원들의 인터뷰가 빼곡히 담겼다. 여기엔 ‘양심선언’과 ‘경고’와 ‘참회’가 뭉쳐 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소셜 미디어 ‘이용자’라 생각했던 우리가 알고 보니 인공지능 손바닥 위에 놓인 ‘상품’이고, ‘실험용 쥐’고, ‘트루먼’이었다는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온다. 소셜 미디어는 음모론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SNS는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알고리즘으로 걸러주고 확증 편향을 선물로 안긴다. 당신을 더 오래 SNS에 묶어두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광고 수익을 위해 허위 정보도 필터링 없이 살포한다. 트위터에서 가짜 뉴스 전파 속도는 진짜 뉴스보다 6배 빠르다. 확인되지 않은 가십과 풍문을 접하다 보면 판단이 흐려지기 마련. 당신은 어쩌면, 미국 NBA 스타 카이리 어빙처럼 “지구는 평평하다”가 신념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전 구글 윤리학자 트리스탄 해리스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유력 용의자로 소셜 미디어를 꼽기도 한다. 가령 러시아 댓글 부대가 허위정보로 미국 대선에 개입한 사건은 어떤가. 이제 전쟁의 용례를 추가할 때다. 21세기엔 핵무기만 무기인 게 아니다. 바야흐로 안방에 앉아 클릭 하나로 한 나라를 조종하고 혼돈에 빠뜨릴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탠포드 연구원인 르네 디레스타는 말한다. “열성적인 선동가들이 예전에는 없었던 게 아니에요. 문제는 조작성을 띤 내러티브를 너무나 쉽게 퍼뜨릴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는 겁니다.” 1인 미디어 시대엔 누구나 정진수나 화살촉이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고전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면, 21세기에 재해석될 여지가 큰 작품은 ‘양치기 소년’ 우화가 아닐까 싶다. 양치기가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거짓말을 반복하자 번번이 속은 마을 사람들이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 거짓말을 계속하면 나중에 진실을 말해도 타인이 믿지 않게 된다는 게 교훈의 골자지만 요즘은 어디 그런가. 거짓말은 일종의 전략이 됐고, 대중의 감정을 이용해 논리를 깔아뭉개면 지지를 얻는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하고 불신을 키우는 사이, 1인 미디어를 통해 세상이 숨긴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외치는 궤변론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진실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흐르는 시대. 이즈음에서 정진수의 말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세상에 온 여러분, 환영합니다.” 글 / 정시우(컬럼니스트)
- 피처 에디터
- 전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