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손목시계 정필규, <아이비스타일> 저자
사적 소장품의 뿌리 1980년대 출시된 세이코 손목시계다. 2000년대 중반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중·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직접 시간표를 짜야 하고 시간 관리가 필요하다며, 당신께서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부터 사용하시던 손목시계를 건네셨다. 회사 출퇴근 때는 물론이고, 등산할 때도 찼다고 하셨다. 결혼하실 때 받으셨다던 예물 시계 롤렉스보다는 휘뚜루마뚜루 쓰시던 ‘막’ 시계인 셈이다. 고가의 제품도 아니고 특별한 기능도 없지만, 아버지의 청춘의 보통날들을 머금었다. 돌이켜보면 갓 성인이 된 자식에 대한 애정과 우려가 투영된 시계,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게 온 후 평소 액세서리를 거의 착용하지 않는다. 시계와 결혼반지 정도가 전부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화려함보다는 슴슴함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께서 갖고 있던 모든 물건 중에서 내게는 세이코 손목시계가 가장 빛나 보이던 물건이었다. 롤렉스보다 담백하고, 스와치보다 고전적이다. 아버지 그리고 나 자신과 가장 닮은 물건이 아닌가 생각도 한다. 시계를 물려받은 지 이제 15년도 더 지났고, 그사이 나는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다른 몇몇 시계를 추가로 들였지만 가장 자주 쓰는 것은 여전히 이 세이코 시계다. 배터리는 다섯 번 바꿨고, 가죽 스트랩은 세 번 정도 교체했다. 최근에는 지인에게 부탁해서 악어 가죽 스트랩을 제작해 사용 중이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와 나, 부자父子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다음 소유자에게 이제 막 어린이집에 들어간 딸아이에게 물려줄 것 같다. 물려받기보다는 어느 시점이면 본인이 자연스레 꺼내 쓰고 있지 않을까? 32밀리미터 작은 다이얼의 시계라면 여성이더라도 충분히 탐내고, 소화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시간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다. 그저 ‘내’ 시간만이 아닌, ‘타인’과 ‘공동체’의 시간까지도 말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한 존재야. 상대방의 시간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요리 전집 이용재, 음식 평론가
사적 소장품의 뿌리 어린 시절 내가 즐겨 읽은 어머니의 요리 전집 <삼성가정요리 990>이다. 한 권당 30가지 요리씩 총 33권짜리로 A4 반만 한, 엽서보다 조금 더 큰 카드 형태다. 부모님이 맞벌이하셨기에 혼자 있는 시간에 그림책마냥 이 요리책을 많이 읽었다. 원래 1980년대 중반에 어머니가 사서 요리에 참고하던 것을 내가 200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시절 중 미국으로 보내달라 하여 받았다. 어머니가 정리하기 전에 내 손에 넣고 싶었다. 지금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유품이다. 생전 어머니의 요리 세계가 좁지 않았으므로 이 요리책 전집이 극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33권 전집 중 <스피이드 요리 30선>에 수록된 ‘감자 케첩 볶음’만큼은 확실하게 자리 잡은 어머니의 새로운 레퍼토리였다. 사실 이 감자 케첩 볶음 때문에 전집을 굳이 멀리 바다 건너까지 보내달라 부탁한 것이었다. 감자를 삶은 다음 양파와 볶다가 마지막에 케첩으로 버무리기만 하면 되는 음식으로 요리라고 할 만큼 대단한 구석은 없지만, 주로 아버지의 입맛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집안의 밥상 사정에 케첩의 새콤한 맛처럼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던 저녁 메뉴다. 바로 그 추억, 가족과 함께했던 기억의 매개체를 내 품에 안고 있고 싶었다.
그것이 내게 온 후 음식 평론가가 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혹은 사물이 둘 있다. 하나는 이 전집이고 다른 하나는 식품 담당으로 마친 군 복무이다. 어린 시절 책을 정말 많이 읽은 가운데서도 이 전집은 정말 닳고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음식과 요리에 대한 개념을 전혀 몰랐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으로 사진을 보고 조리법을 읽었다. 그렇게 개발한 음식을 향한 호기심과 관심이 결국 지금 음식 평론가로 일하는데 원동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면 과장일까?
다음 소유자에게 그냥 쭉 읽어보세요. 굳이 따라서 요리를 해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붓 김경희, 다큐멘터리 작가, <아버지는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저자
사적 소장품의 뿌리 일흔 살 즈음 뒤늦게 서예를 시작한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 동안 동양화에 푹 빠져 계셨다. 농업사회에서 산업화로 넘어가던 1960년대 후반 전라북도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아빠는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택시를 몰며 삶을 이어갔다. 그저 눈 한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새 칠순 노인이 되어 있더라고 말하던 아빠는 노년의 시간을 무엇으로 보낼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예술적 감성이 넘치는 사람임을 전혀 알지 못했던 아빠는 일흔이 넘은 그 즈음 동네 문화센터에서 서예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먹을 갈아 화선지에 글씨를 쓰고 수묵화를 그리는 일상의 루틴을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갔다. 운전대가 아닌 붓을 잡은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는 여러 물건 중 동양화 붓을 내 몫으로 가지고 왔다. 삼 남매 중 외모나 성격, 하물며 식성까지 꼭 닮은 나 역시 언젠가 붓을 들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내게 온 후 성실한 개미형 여자가 놀기 좋아하는 베짱이형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 집이 딱 그러했다. 한량 같은 아빠를 미워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빠의 인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2018년 어느 봄날 나는 백발이 된 아빠와 일주일에 두 번씩 카페에 마주 앉아 열 번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인터뷰를 통해 나는 젊은 시절 아빠의 가슴속에 어떤 열정과 갈증이 있었는지, 어떤 욕망이 있었는지, 그럼에도 가족을 위해 무엇을 접어야 했는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버지의 모습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떨까? 일과 삶의 균형을 잡으며 여유롭게 살고자 하지만 현실은 또 그렇지가 않다. 아빠의 붓을 내 몫으로 가져오긴 했으나 그걸 써보기는 커녕 모셔놓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이겠지. 서랍 속에 고이 모셔놓은 아빠의 붓을 적어도 쉰 살이 되기 전에는 꺼내야겠다. 붓을 잡는 것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라던데, 불혹을 훌쩍 넘긴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바로 중심이 아닐까. 한때는 이기적으로만 보이던 아빠가 실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싶은 한 인간이었음을, 그리고 한껏 폼 나는 인생을 포기하고 꽤 오랫동안 자식들을 위해 살았음을, 나는 아빠의 붓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음 소유자에게 혹시라도 미래의 나에게 손녀가 생긴다면 이 붓을 물려주고 싶다. 붓을 들고 비로소 평안에 이른 아빠의 노년을 보고 느낀 그대로 이야기하겠다. 오직 예술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필름 카메라 김은희, <지큐> 피처 에디터
사적 소장품의 뿌리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해 부모님 곁을 떠나 살게 됐을 때 수호신 삼아 모셔가려고 노린 물건 세 가지가 있다. 아빠의 트렌치코트, 가죽 장지갑, 필름 카메라. 당시 20대였던 아빠가 엄마와의 결혼 승낙을 구하기 위해 외할머니 댁에 입고 갔다던 트렌치코트-그 트렌치코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20대 김영수 씨 모습은 명절 가족 회상 토크의 주요 소재다-는 줄여 입기에는 아무래도 품이 큰 데다 원형 그대로 남겨놓는 편이 의미 깊어 다시 장농행, 가죽 장지갑은 오빠 주머니로, 필름 카메라만 내가 챙겼다. 아빠의 막냇동생이 선물했다던 니콘 AD3는 1987년 발매 당시 나름 센세이셔널한 자동 필름 카메라였고, 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우리 가족 앨범의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내게 온 후 고장 난 카메라를 뭐 하러 가져가느냐는 아빠의 만류에 서울 남대문시장에 가면 고칠 수 있다고 호기롭게 말했건만, 정작 카메라를 다시 꺼내든 건 이제 와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와타리가 자신의 집이 산사태에 파묻혀 사라졌다는 극적인 이야기를 담담히 꺼내는 그 모습이야말로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다. 우리 집도 사라졌다. 산사태 대신 불이라는 점은 다르지만. 아마 와타리도 슬픔의 5단계인 부정-분노-우울-타협을 지나 수용의 자세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웃다 울다 웃는다. 나의 유년이 담긴 부모님 집이 재로 변한 후 가장 슬프고 아까운 것은 한 달 전에 산 식기세척기도, 지난여름에 산 에어컨도, 엄마가 얼마 전 쇼핑했다고 자랑한 촉감 좋은 면바지도 아니다. 사진, 아빠 엄마의 젊은 날과 우리 가족의 어린 날이 담긴 사진이다. 사진이 남겨주었던 순간들, 유치원 운동회 날 출발선을 달려 나온 나를 응원하는 엄마와 오빠,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우는 나를 웃으며 안아 올리는 아빠, 만개한 벚꽃나무 앞에 선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 그러니까 여러분, 과거 사진은 모두 디지털로도 저장해두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남대문시장에 갈 것이다. 카메라를 고쳐 가족의 시간을 다시 담을 것이다.
다음 소유자에게 먼 훗날 후손 중 특히 해체와 조립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나는 선뜻 그러지 못했으나 마음껏 분해하고 연구해보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지금을 즐기세요.
- 피처 에디터
- 김은희
- 포토그래퍼
- 김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