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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인 존재론

2023.12.12신기호

축구 팬들은 이강인의 스킬에 열광하고, 일반 대중은 ‘슛돌이’의 올바른 성장에 가족애에 가까운 지지를 보낸다.

글 / 홍재민(축구 전문 기자, 작가)

지금 나는 이강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명함이 근사하다. 회사명은 ‘파리 생제르맹’이다. 직함은 주전 미드필더. 뒷면에 ‘대한민국 국가대표 에이스’라고 썼다. 현존 에이스 손흥민이나 ‘해버지’ 박지성의 명함도 훌륭하다. 차이가 있다면 이강인은 회사명과 직함, 그리고 본인 이름이 한꺼번에 빛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 팀과 개인의 성취가 모두 정점에 달하는 최초의 한국인 선수인 것이다.

물론 이강인 전에 박지성이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박지성은 챔피언스리그와 프리미어리그를 평정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이만큼 화려한 타이틀을 쟁취한 선수는 없다. 하지만 맨유의 박지성은 ‘언성 히어로unsung hero’ 딱지를 떼진 못한다. 손흥민은 반대 케이스다.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는데 소속팀은 여전히 무관 상태다. 박지성은 회사명, 손흥민은 본인 이름에 평가가 쏠린다. 아직 이강인이 팀과 개인의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현재 클럽 환경과 개인의 발전 가능성은 그런 날이 올 수 있음을 매 순간 암시하고 있다.

한국 축구로 범위를 좁혀보자. 국가대표팀 세대는 대략 10년 단위로 구분된다. 1990년대를 풍미한 황선홍과 홍명보는 한국도 월드컵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입증해내고 2002년 월드컵을 끝으로 태극 마크를 내려놓았다. 바통을 이어받은 콤비가 박지성과 이영표였다. 두 선수 모두 황선홍과 홍명보 세대의 말년 시점에 태극 마크를 달아 10년 조금 넘게 한국 축구를 견인했다. 한국인 선수가 유럽 정상급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사실 입증이 두 선수의 업적이었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마지막 대표팀 공헌이었던 2011년 아시안컵은 손흥민의 생애 첫 메이저 대회 출전이었다. 손흥민은 한국인 축구선수 최초로 ‘월드 클래스’ 상찬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강인은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 혹시 팀과 개인의 타이틀을 모두 쟁취한다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재편될 국가대표팀의 키 플레이어는 단연 이강인이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파울루 벤투 감독은 이강인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스피드가 떨어져 공수 전환에서 약점을 보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평가는 다르다. 클린스만호가 출항한 이래 이강인은 붙박이 주전이 되었다. 이강인의 장외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간다. 10월 A매치 첫 번째 경기(모로코전)에서 이강인이 골을 터뜨리자 두 번째 경기(베트남전)의 예매율이 70퍼센트에서 단숨에 매진을 찍었다. 이강인은 이미 손흥민급 셀링 파워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앞으로 이강인이 중심이 될 대표팀이 훨씬 흥미진진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에는 많은 근거가 존재한다. 지금껏 한국의 공격은 측면에 집중되었다. 측면으로 최대한 깊이 들어가 페널티 박스 좌우 옆면에서 크로스 또는 커트백 cutback을 통해 득점 기회를 만드는 스타일이다. 이강인이 메찰라 기능을 수행하는 대표팀 공격은 다채롭다. 기본 위치는 측면이지만, 이강인은 패스를 받아 하프 스페이스로 이동하는 패턴을 보인다. 상대 수비 조직은 이강인의 횡적 이동에 따라 와해될 수밖에 없다. 하프 스페이스 또는 중앙 영역(14번 구역; 아크 정면)은 이강인에게 왼쪽, 오른쪽, 중앙 등으로 다양한 공격 방향 선택권을 제공한다. 이런 움직임이 가능한 비결은 이강인의 볼 컨트롤 및 탈압박 능력이다. 이강인은 체구가 작아도 상대와 직접 부딪치는 상황에서 볼을 빼앗기지 않는다. 압박을 받는 상태로 볼을 간수하는 능력이 탁월한 덕분이다. 위험 지역에서 볼을 지켜내는 공격수는 상대 수비수들을 본래 위치에서 이탈시킨다. 수비 블록의 와해는 곧 공간 창출을 의미한다. 황희찬, 이재성, 황인범 등 개인 능력으로 득점 기회를 만드는 스타일이 존재하지만, 이강인처럼 다양하고 효과적인 옵션을 행사하는 공격수는 드물다. 이강인은 볼을 달고 휘젓는 장면만큼 희미한 패스 레인 pass lane을 발굴하는 플레이도 자주 선보인다. 주변 동료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강인의 데드볼 처리 능력도 기대감을 부른다. 현대 축구는 템포 자체가 점점 빨라져 농구를 닮아간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 overload to isolate’ 원칙을 강조한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성동격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쪽을 두들겨 상대 수비수들을 일정 영역에 쏠리게 한 뒤 정확한 롱 패스로 반대편에 생긴 공간을 공략하는 전법이다. 3점 슛 기회를 만드는 농구의 오펜스 전술과 닮았다. 농구 같은 역습 플레이도 최근 축구에서 자주 연출된다. 그런 전술이 가능하려면 팀에 볼을 멀리, 정확하게 보낼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하다. 이강인같은 선수다. 메이저 대회에서는 골을 넣기가 어렵다. 모든 출전팀이 수비 조직을 최우선으로 가다듬은 상태로 출전하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세트피스와 역습이 중요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강인을 보유한 한국은 매우 유리하다. 상대 뒷공간을 공략하는 롱 패스, 측면에서 올리는 크로스와 코너킥, 페널티 박스 근처 프리킥이 이강인을 통해 정교해진다. 오픈 플레이 상황에서 성공적인 공격 방향 전환과 역습도 정확한 킥에서 시작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하는 홍명보호는 세트피스 훈련에서 애를 먹었다. 코칭스태프가 짜놓은 세트피스를 연습해야 하는데 크로스를 정확히 보내는 선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에서 이강인의 킥 능력은 이미 입증을 마쳤다. 2019년 U20 월드컵 8강 세네갈전에서 한국은 후반 추가 8분에 극적인 2-2 동점골을 터뜨려 기사회생했다. 니어 코너에서 크로스를 잘라 먹는 이지솔의 헤더 득점이었는데, 이강인의 크로스가 정확히 그곳으로 날아갔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가나전에서도 이강인의 정확한 크로스가 조규성의 만회 골로 연결되었다. 프리킥으로 직접 득점을 올리는 장면은 10월 튀니지전에서 이미 연출되었다. 클린스만호의 첫 관문은 2023 AFC 아시안컵이다. 조별 리그에서는 한껏 내려선 수비를 공략해야 하고, 토너먼트 단계에 오를수록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다. 손흥민은 물론 이강인의 킥 능력까지 보태지면 한국은 효과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 있다.

2010년대 들어 국가대표팀은 크게 바뀌고 있다. 수직적이었던 의사소통이 점점 수평화되어 간다. 유럽파가 많아졌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어려서부터 유럽 축구를 습득한 사례가 늘었다. 손흥민은 고1 나이에 독일로 넘어갔다. 이강인은 아예 축구를 스페인에서 배웠다. 배경 자체가 새로운 선수들이 주축으로 활약하면 대표팀은 좀 더 글로벌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대표팀 지원 스태프들도 “팀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라고 말한다. “위아래 감각이 희미해졌다”라는 우려도 있지만, 대표팀의 최우선순위가 개인 경기력에 맞춰져야 한다는 명제에는 이견을 달기 어렵다. 희미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 때, 우리 앞에 이강인이 등장했다. 슈퍼스타로서의 ‘스펙’은 거의 완벽하다. 스페인 명문 클럽의 기대주에서 U20 월드컵 MVP, 화려한 챔피언스리그 클럽 소속자란 이력이 이어진다. 축구 팬들은 이강인의 스킬에 열광하고, 일반 대중은 ‘슛돌이’의 올바른 성장에 가족애에 가까운 지지를 보낸다.

이강인의 소속팀 파리 생제르맹은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팀이다. 대한민국은 2024년 1월 AFC 아시안컵에서 63년 무관의 한을 풀려고 한다. 2019년 U20 월드컵에서 이강인은 “우승이 목표”라고 말해 취재진을 놀래켰다. 결승 진출로 인해 그의 목표는 거의 실현될 뻔했다. 선수 측근은 “무슨 대회든 일단 출전하면 무조건 우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라고 전한다. ‘무슨 대회’는 UEFA 챔피언스리그, AFC 아시안컵, FIFA 월드컵 등 말 그대로 모든 대회를 포함한다. 어느 팀이든 이강인의 기량과 역할이 중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강인의 명함이 어디까지 완벽해질지, 축구 팬들의 즐거운 상상은 이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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