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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AFC 아시안컵이 남긴 것

2024.03.02신기호

6경기 10골. 비난은 클린스만 감독을 향하지만 선수들도 칭찬받기는 어렵다. 2023 AFC 아시안컵은 무엇을 남겼나.

글 / 홍재민(축구 전문 기자)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설렜다. 대한민국은 E조 첫 경기에서 바레인을 3-1로 격파하며 힘차게 출발했다. 최종 목적지는 6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이었다. 가능할 것 같았다. 눈부신 스타들이 즐비했으니까. 일본,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호주 등 예상 경쟁자들과 비교해도 한국이 더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오만한 착각이었다. 대한민국의 광채는 4강에서 꺼졌다. 일본 역시 이름값을 입증하지 못했다. 신흥 강호 카타르가 대회 2연패 기염을 토했고, 요르단은 페널티킥 3개에 패한 ‘팬들의 챔피언’이 되었다. 2023 AFC 아시안컵이 우리에게 보여준 아시아 축구의 질서는 새로웠다.

한국은 끔찍했다. 6경기에서 10골이나 먹었다. 전술은 없었다. 화려한 선수들이 개인 역량으로 ‘알아서 잘’ 뚫거나 넣어야 했다. 그마저 쉽지 않았다. 한국전 상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내던졌다. 월드컵에서 강팀을 상대하는 한국처럼 말이다. 16강과 8강에서 한국은 막판 드라마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두 경기에서도 한국은 먼저 한 대 얻어맞고서야 정신을 차린 느낌이었다. 한국인 특유의 근성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았지만, 준결승전까지가 한계였다.

4강에 그친 한국이 일깨워준 교훈은 두 가지. 첫째, 감독의 역할이다. 축구 현장에서는 감독이 팀을 흥하게 하긴 어려워도 망가뜨리기는 쉽다는 말을 한다. 클린스만은 후자에 속한다. 2023년 3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클린스만 감독은 온갖 구설에 휘말렸다. 원격 근무, 국내 리그 경시, 여론을 경청하지 않는 태도 등 그의 모든 언행이 비판을 불렀다. 그래도 그는 여유로웠다. 아시안컵에서 우승만 하면 모든 비판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작전이 깨졌다. 클린스만은 소위 ‘관리자형 감독’이다. 전술보다 동기부여, 지시보다 신뢰, 전력보다 분위기를 중시한다. 그라운드 밖의 그는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경기장 안을 컨트롤하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걸 메울 ‘브레인’도 코칭 스태프에는 없었다. 결국 아시안컵에서 클린스만 감독의 치어리딩은 통하지 않았다. 매 경기에서 한국은 상대의 거친 압박에 고전했다. 클린스만 감독의 전술 부재는 수비에서 도드라졌다. 한국은 6경기에서 10골이나 먹었다. 1년 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완성되었던 안정적 수비와 탄탄한 수비 빌드업은 사라졌다. 클린스만 감독은 마음씨만 좋은 아저씨였을 뿐(그를 고용한 정몽규 회장처럼), 팀을 영광으로 이끌 능력자는 아니었다. 월드컵 16강 팀은 1년 만에 망가졌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모든 비난은 클린스만 감독에게 향하지만, 직접 경기에서 뛴 선수들도 칭찬받기는 어렵다. 한국 스쿼드는 전례 없이 화려했다. 프리미어리그의 간판 스타가 슛을 때리고, ‘레바뮌’의 주전 센터백이 상대 공격수를 봉쇄했다. 파리 생제르맹의 미래가 패스를 찔러주는 데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올 시즌 상반기에만 10골을 넣는 윙어가 측면을 뚫었다. K리그 2연패 클럽의 백 라인이 수비를 책임졌다. 그러나 한국의 경기력은 실망스러웠다. 열정은 집에 둔 채 몸만 카타르에 온 팀 같았다. 약체에 막판 동점골을 허용한다든가, 세컨드 볼 다툼에서 번번히 뒤진다든가, 일대일 싸움에서 뒤처지기 일쑤였다. 토너먼트 2연속 연장전은 대단했지만, 결국 그것도 자초한 상황이었다. 요르단은 철저히 준비하고 지독하게 집중했다. 몸이 부서져라 한국 스타들을 들이받았다. 팬들은 2연속 연장 승부를 근거로 선수들을 감싼다.

하지만 선수들이 월드컵의 간절함을 갖췄다면 이렇게까지 몰릴 수는 없다. 대회 기간 중, 대표팀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잡음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발생했던 ‘2701호 사건’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아 지금까지 후유증이 이어지는 것이다. 파울루 벤투 전 감독과 클린스만 감독은 외국인이기에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거나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결국 스타들로 구성된 클린스만호는 원팀이 아니었다. 1년 전에야 선수들간 충돌이 월드컵이란 대의명분 앞에서 수습되었지만, 아시안컵에서는 달랐다. 월드컵 수준의 마음가짐이 없으면, 선수단 전원이 하나로 똘똘 뭉치지 않으면, 아시안컵 우승은 불가능하다.

원팀과 정신력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이번 대회에서 요르단은 새 역사를 썼다. 엔트리 26명 중 유럽파는 프랑스 리그앙 몽펠리에의 무사 알타마리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후세인 아무타 감독 아래서 요르단은 완벽한 원팀이 되어 결승전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16강전에서 요르단은 강호 이라크를 상대로 후반 추가시간에만 두 골을 터뜨려 3-2 역전승을 거뒀다. 4강에서는 스타 군단 대한민국의 공격을 완봉했다. 결승전에서도 요르단은 홈팀 카타르에 1-1 동점 상황까지 따라가는 집념을 보였다. 카타르 월드컵에 모로코가 있었다면, 이번 아시안컵에서는 요르단이 팬들로부터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또 다른 박수갈채를 받은 팀은 팔레스타인이었다.

알다시피 현재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초토화 작전으로 쑥대밭이 된 상태다. 대회 출전 자체가 기적이었다. 가자지구에 있는 대표팀 선수들은 죽거나 소집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대표팀은 훈련 장소를 찾아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를 떠돌아야 했다. 이슬람 형제국들이 손을 내밀어준 덕분에 팔레스타인은 간신히 카타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회 개막 직전에 한 선수는 친척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참혹한 상황 속에서 하나로 똘똘 뭉친 팔레스타인은 아시안컵 출전 사상 첫 16강 진출이라는 역사를 썼다. 16강 카타르전에서 선제 득점이 나오자 필자의 옆자리에 있던 팔레스타인 기자는 펑펑 울면서 환호했다. 모든 취재진이 그를 축하했다.

결국 카타르에 1-2로 역전패 당했지만,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팔레스타인의 마크람 다부브 감독은 취재진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건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아시안컵에서 성공하려면 개인 퀄리티 외에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열정과 투지, 그리고 숭고한 마음가짐이다.

대회 2연패를 달성한 카타르도 메이저 대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교정한다. 어느 국가든 대표팀 전력을 강화하는 단계는 대동소이하다. 유소년부터 체계적 육성이 필요하고, 자국 리그가 활성화돼야 하며, 유럽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를 배출한다는 프로세스다. 그러나 챔피언 카타르는 전원 국내파로 구성된 팀이었다. 결승전에 맞붙었던 요르단도 알타마리를 제외한 25명이 국내파 혹은 중동 지역 클럽 소속이었다. 메이저 대회에서 실적을 남기기 위해선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카타르는 유럽의 선진 축구 시스템을 그대로 수입해 자국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조련했다. 귀화 정책은 편견에 불과하다. 현재 카타르 국가대표팀의 주축은 모두 카타르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홈그로운’들이다.

대회 MVP로 선정된 아크람 아피프는 이민 2세다. 요르단도 떨어지는 개인 퀄리티를 단기 토너먼트 맞춤형 전술로 만회했다. 개인 기량 위에 확실한 필승 전술을 완성하고, 상대를 철저히 분석하며 원팀으로 뭉치는 팀만이 메이저 대회에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한국 축구는 이번 카타르 아시안컵의 뼈아픈 교훈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이름값, 비장한 각오, 화합, 그 위에 확실한 대회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이번 아시안컵은 최상의 대회 환경으로 눈길을 끌었다. 출전국 24개 팀이 최상의 환경에서 공평하게 축구 실력만 겨룰 수 있었다. 모든 출전국이 추가적인 체력 소모 없이 오직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카타르만이 제공할 수 있는 대회 환경이었다. 아시아축구연맹 관계자는 “이번처럼 클레임이 없는 아시안컵은 처음”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훈련장의 잔디 상태는 최상이었다. 각국 취재진의 만족도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아시안컵도 2027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다. ‘왜 맨날 중동이냐?’라는 불평이 들리지만, 중동 부국만큼 스포츠 대회를 확실하고 풍족하게 운영할 주체가 드문 것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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