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연의 장면들.

GQ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DY (동그란 눈)
GQ 달라진 것 같아요. 눈빛, 분위기···.
DY 정말요?
GQ 네. 연기를 해서일까요?(장도연은 올해 구교환과 함께 이옥섭 감독의 영화 <너의 나라> 촬영을 마쳤다.)
DY 글쎄요. 연기를 한 영향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보다는,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게 조금씩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옛날에는 잘하는 것만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잘한다는 기준도 내가 정하는 거잖아요. 남들이 잘했다고 해도 내게 별로일 수도 있고. 경험치가 조금씩 늘어가면서 겁도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화보도 해보고, 뭐 별거 있냐, 싶은, 흐흫.
GQ 아이돌, 모델, 뮤지션이 연기에 도전한 후에 만나면 달라진 눈빛이나 분위기 때문에 놀랄 때가 종종 있거든요. 연기의 영향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촬영하면서 장도연이 계속 연기를 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DY 지금 이 말씀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아요.
GQ 계속 연기하고 싶어요?
DY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연기를 통해 몰랐던 재미를 알게 된 건 큰 행운이고 영광스럽지만, 그렇다고 ‘용기가 생겨서 또 해봐야지’란 생각은 아직 없어요.
GQ 흘러가는 대로.
DY 맞아요. “장도연, 차기작 기다려”라고 헤드라인 떴는데 아무도 콜을 안 해도 웃기잖아요.

GQ 화보를 즐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열어주어서 또 놀랐어요.
DY 코미디를 하면서는 별의별 가발을 다 써봤고, 그런 건 아무렇지 않은데 오늘 머리를 하고는 너무 어색한 거예요. 장난을 치고 싶은데, 행여 실장님께 실례가 될까 봐 참고 참다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저 예쁜 OOO 같지 않아요?’
GQ 아하하하. 그 와중에도 어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
DY 유머를 섞어 표현해야 제 마음이 좀 편한가 봐요. 때로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굳이 더해서 역효과가 나기도 해요.
GQ 이토록 사려 깊은 사람이 순발력 있는 유머까지 던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DY 저는 늘 외줄 타기 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빠르게 뇌를 거쳐 입 밖으로 표현하는 만큼 검열할 수 있는 시간이 저에게밖에 없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벌써 몇 번 고꾸라졌을 거예요.(웃음) 실은 늘 불안해요. 저는 혀가 제일 무서운 무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연차로 쌓인 것들을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나 계속 의심하고요. 단 몇 초라도 더 버텨보려고···.

GQ 최근에 “유머와 여유를 잃게 될까 봐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했죠.
DY 맞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랑 여유만 잃지 않으면 그래도 한 고비는 넘기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좋은 것들을 구슬 모으듯이 계속 모으는 중이에요.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GQ 어떤 구슬을 모으고 있어요?
DY 책, 영화, 경험. 다독가들에겐 귀여운 수준이겠지만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려고 해요. 반나절 정도 오롯이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늘 습관처럼 상영 시간표를 봐요. 아, 마음 맞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 대화만으로도 확장되는 것이 있거든요.
GQ 이옥섭 감독과 영화도 자주 본다면서요?
DY 취향도, 귀엽다고 느끼는 지점도 비슷해요. 최근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몽상가의 나흘 밤>을 같이 봤어요. 제가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데, 홍상수 감독님이 그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막 느닷없는 장면이 나오고, 영화가 너무 웃긴 거예요. 저는 영화에서 느닷없는 장면, 뭔가 들킨 것 같은 장면을 보여주면 너무 웃겨요. 이게 코미디지, 싶고요.
GQ 언젠가 예능에서 한 이 표현이 저는 참 좋았어요. “인생을 글이라고 한다면”. 요즘 장도연의 인생을 글이라고 한다면, 어떤 장르예요?
DY 엄청 슴슴한 드라마요. 제가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하고요. 스릴러, 공포, 액션, 멜로처럼 남들 보기에 대단한 이벤트나 큰 기복은 없어 보여도, 그 안에 엄청난 것들이 담겨 있죠.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더 쫄깃쫄깃할 때도 많아요. 일상이 공포나 스릴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잔잔하고 밍밍해 보여도 제 나름대로는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장르로 치면 드라마예요.
GQ 그 안에는 느닷없는 귀여움도 가득할 것 같아요.
DY 제 장점이 주변의 귀여운 것을 잘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특별해질 수 있잖아요. 요소 요소에 숨어 있는 귀여움을 발견하면 무척 즐거워요. 나는 오늘 하루 이 귀여움을 보았다!
GQ 귀여움을 발견하는 눈은 어떻게 길러졌어요?
DY 평소에 이 말을 많이 들어요. “너는 별게 다 귀엽다”.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저거 너무 귀엽지 않아?” 하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에야 느끼는 건, 저는 귀여움을 찾는, 보는 눈이 발달한 것 같아요.
GQ 요즘엔 무엇이 그렇게 귀엽게 보여요?
DY 예상되지 않는 걸 볼 때 너무 웃기고 귀여워요. 한번은 여행을 갔는데, 노쇠한 할아버지께서 가파른 길에서 휠체어를 끌고 가시길래 도와드렸거든요. 잠깐이지만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너무 뿌듯했어요. 그다음 날 같은 길로 가다가 우연히 그분을 또 만났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멀쩡히 걸어 다니시는 거예요? 도로 위의 꼬깔콘이 보통 빨간색인데 문득 분홍색 꼬깔콘을 보면 또 귀엽고. 아, 요즘 독특한 색깔의 꽃이 많이 피잖아요. 한창 꽃들 구경하면서 가는데 쥐 꼬리를 본 거예요. 꽤 큰 쥐였는데, ‘미키 마우스다, 미키 마우스다’ 주문을 걸면서 갔어요. 귀여운 쥐다, 귀엽다···. 그런데 그건 안 되겠더라고요.
GQ 자신으로부터 발견하는 귀여움도 있어요?
DY 부모님한테 앵긴 내 모습? 아, 이건 귀엽기보단 징그럽네요. 귀여운 건 의도하는 순간 별로인 것 같아요.

GQ 도연 씨가 스스로 ‘좋은 영화가 무엇일까’ 질문할 때, ‘보고 나온 뒤 떠오르는 장면이 세 가지 이상 남는 영화’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았어요. 미리 보내드린 질문, 생각해왔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처럼, 죽기 전 재생하고 싶은 그녀 인생의 아름다운 장면 세 가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DY 아까 녹화 끝내고 오면서 그 질문을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특별한 장면은 정말 많은데, 딱 세 가지 순간을 꼽으려고 하니···. 내 인생에 한정해 아름다워야 하고, 새겨야 하니까, 잘 추리고 싶었어요. 저는 구도 잡고 공들여 찍기보다는 기억하려고 툭툭 찍는 사진이 더 많아서, 사진첩을 다시 보는 일이 드물어요.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앨범을 밑에서부터 쭉 봤어요. 아, 이런 순간도 있었지, 이런 시간도 있었지···. 그래서 고른 첫 번째 장면은 이거예요. 제가 외동딸이라 인천 집에 가서 부모님께 밥 한 끼 얻어먹고 오는 게 주말의 일상인데, 그날은 밥 먹고 시간 여유가 있어서 부모님과 영화를 한 편 봤어요. 보고 나오는 길에 스티커 사진기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스티커 사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찍으면서 ‘엄마 아빠랑도 한번 찍어야 하는데’ 생각만 했거든요. 엄마에게 사진 찍자고 하면 “늙어서 못생겼는데 뭘 찍어” 항상 손사래를 치셨는데, 그날 따라 두 분 다 못 이기는 척 스티커 사진기로 발걸음이 향하더라고요. 그날 찍은 스티커 사진이 너무 좋아서 안방 침대 옆에 놓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보면서 이렇게 다짐해요. 오늘도 힘내서 열심히 살아야지. 마치 아빠가 아이 보고 힘을 내는 것처럼요. 왜냐고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내가 가족을 지키고 싶다, 지켜야 한다, 그래서 힘이 세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족’이라고 하면 저에겐 너무나 말랑말랑해서 (손 모아 무언가는 드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소중히 잘 다루어야 하는 존재로 느껴져요. 스티커 사진은 손톱만 한 크기이지만 거기서 막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진이 무조건 첫 번째 장면.

GQ 두 번째는 장면은요?
DY 아버지가 굉장히 무뚝뚝하세요. 엄마가 뭐 들고 있으면 아빠 옆구리를 꼬집으며 “저것 좀 들어” 하면 엄마는 “됐어”라고 사양하시는 관계예요. 그런데 하루는 아빠 엄마가 각자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아빠가 엄마 우산까지 들고 있는 거예요. 그 조그마한 우산을 들어주시겠다고.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너무 귀엽고 좋아서 몰래 툭 찍었어요.
GQ 저라면 부모님의 뒷모습을 찍는 장도연의 모습까지 찍고 싶었을 것 같아요.
DY 마지막 장면은 정말 많이 고심을 했는데, 이건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이에요. <너의 나라>가 개봉해 극장에서 상영되면, 부모님이 영화를 보시는 뒷모습을 스크린 속 저와 함께 찍고 싶어요. 아···, 그 날을 생각하니 벌써 뭉클해요.
GQ 떠오르는 장면 세 가지가 있으면 좋은 영화라고 했죠? 아직 개봉 전이지만, 좋은 영화 맞네요, 장도연의 인생.
DY 그 질문이 완성해준 영화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