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은 스스로 거장이라 이르지 않는다.
마틴 파 : WE ARE MARTIN PARR 7. 16 — 10. 18 |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손현정,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학예연구사

2025년 12월 6일, 마틴 파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번 전시의 준비 시점은 언제인가요? 작가 별세 이후에 기획한 것인지 어떠한지, 그에 따라 과정에서의 난도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 마틴을 만난 건 2023년 11월 파리 포토(Paris Photo, 연례 국제 사진 아트 페어) 기간이었습니다. 퐁피두센터 근처의 사진 서점 겸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그를 우연히 만났어요. 서울에 사진 전문 공립 미술관이 곧 개관한다고 이야기하자 정말 반가워하며 축하해주었습니다. 제 옆에 다른 사진미술관 큐레이터도 있었는데 서울에 새로운 사진미술관이 개관한다는 말을 들은 마틴이 둘을 번갈아 보더니 “Are You Still Friends?”라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이제 경쟁자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죠. 특유의 장난기로 세계적인 사진가 앞에서 약간은 긴장하고 있는 저를 유쾌하게 배려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만남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질적인 전시 준비 시점은 2024년 11월입니다. 개관전 이후의 주요 국제 기획전을 고민하던 시기였고, 매그넘 포토스와 마틴 파 측에 개인전 개최 가능성을 문의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고 전시 규모와 시기, 구성 방향 등을 조율하며 조금씩 형태를 갖춰갔습니다. 2026년 1월에는 브리스톨에 있는 마틴의 스튜디오를 방문할 계획이었는데, 만약 건강상 이유로 한국 방문이 어려울 경우 전시장과 로비 곳곳에서 상영할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모두가 마틴이 한국에 오지 못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여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매그넘 포토스의 디렉터이자 마틴과 30년간 함께 일해온 안드레아 홀츠헤르와 전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 시간으로 2025년 12월 7일 밤 11시가 다 되어가던 무렵, 안드레아로부터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마틴이 전날 밤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고, 너무 놀랐고, 며칠 전까지 전시 내용과 제목을 같이 고민하던 마틴이었기에 모든 순간이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별세 이후 기획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와 함께 준비하던 전시가 예상치 못한 이별을 맞으며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경우입니다. 준비 과정 내내 우리는 새로운 작업과 한국 방문,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이번 전시는 마틴 파가 남긴 작업 세계를 돌아보는 회고전인 동시에, 끝내 이어지지 못한 미래의 가능성들까지 함께 생각하게 하는 전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틴이 없는 마틴 파의 스튜디오에는 가보셨나요?
네, 계획대로 브리스톨에 있는 마틴 파 스튜디오를 방문했습니다. 역시나 마틴의 공간이라고 느꼈던 점은, 예를 들어 테크니션 자리 위에는 ‘The Last Resorts Zone 라스트 리조트 존’, 책 담당자의 좌석 위에는 ‘Small World Zone 스몰 월드 존’처럼 자리마다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장난기로 가득한 공간이었어요. 그의 공간에 다녀오고 나서 이번 전시에 투영된 영감과 흔적이라면 책을 마구마구 볼 수 있도록, 마틴 파 재단이 지원하는 젊은 사진가들을 위한 공간처럼 누구든 와서 자유롭게 사진과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그런 공간을 전시장에 마련했습니다.
첫 단추로 돌아가, 왜 마틴 파입니까? 사진미술관에서 첫 번째로 여는 해외 작가 개인전으로 마틴 파를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마틴 파를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미술관 전시가 개인의 취향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지만, 큐레이터가 오랫동안 보고, 생각하고, 다시 보고 싶은 작가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마틴 파가 그런 작가였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진을 둘러싼 기술은 정말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AI는 물론이고 이미지 생산과 편집 기술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있는 것을 찍고 보여주는 단순한 사진의 힘이 그리워진 것 같아요. 마침 서울시립미술관의 2026년 기관 의제가 ‘기술과 창작’이었는데, 여러 분관에서는 동시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전시들이 예정되어 있었고, 사진미술관 역시 그 흐름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가장 근본적인 사진의 기술과 창
작, 현실을 보고 촬영하고 인화하는 매체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 마틴 파를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마틴 파라는 이름은 몰라도 이미 그의 사진 언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강렬한 플래시, 포화된 색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포착한 인물과 사물들. 오늘날 광고와 패션 사진, 그리고 SNS 이미지 문화 속에서 너무나 익숙해진 시각 언어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마틴 파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단순히 한 명의 거장을 소개한다기보다,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마틴 파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부터 사진을 시작, 1994년부터 매그넘 포토스 소속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남겨온 마틴 파의 지난 50여 년 동안의 연작 504점 등 주요 작품을 총망라한 아시아 최초 대규모 회고전입니다. ‘총망라’하기에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기획자의 시선, 선택, 편집일 것 같습니다. 마틴 파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선명한 색채와 클로즈업 샷, “나는 영국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증오한다”는 양가적인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던 개성적 언어의 사진가이기도 하죠. 이번 전시에 무엇을 선택, 집중하고 있습니까?
많은 분이 마틴 파를 강렬한 컬러와 플래시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 이미지에만 집중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흑백 작업부터 최근 작업까지 함께 구성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흑백 사진 속 마틴과 컬러 사진 속 마틴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늘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사회를 관찰하고, 조금은 엉뚱한 장면에 시선을 빼앗기는 사람이죠. 저는 이번 전시에서 소비 사회에 대한 풍자나 영국성보다 인간에 대한 그의 끝없는 호기심에 더 집중했습니다. 마틴 파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행하고, 소비하고, 사랑하는지, 그 모습을 50년 가까이 지켜본 관찰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마틴 파: We Are Martin Parr>입니다. 그의 사진 속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거든요.
기획자로서 가장 고민한 지점은요? 실마리를 찾아냈나요?
‘왜 우리가 마틴 파인가?’였습니다. 영국의 80대 할아버지 사진가 이야기를 왜 지금 서울에서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이었죠. 또 한편으로는 마틴 파를 모르는 관객도 많을 텐데 어떻게 하면 이 전시가 사진사 속 한 거장의 회고전으로만 보이지 않을까를 고민했습니다. 특히 1970~1980년대 작업들이 자칫 과거의 기록이나 레트로한 이미지로만 읽히지 않았으면 했고요. 그런데 작품들을 다시 볼수록 이상하게도 그 속의 사람들이 점점 영국인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우리처럼 보이더라고요. 여행을 가고, 음식을 찍고, 기념사진을 남기는 모습까지요. 그래서 이번 전시는 마틴 파를 설명하기보다, 그의 작품을 통해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전시에 더 가깝습니다. 결국 그 고민이 <마틴 파 : We Are Martin Parr>라는 제목으로 이어졌고요. 마틴 파를 닮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의 사진 속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업을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바라보았을 때 마틴 파라는 인물에 대해 인간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도 있습니까?
2025년 4월, 본격적인 전시 준비를 위해 교토에서 마틴을 만났을 때 조금 긴장했습니다. 미술관 공간 사진과 개관전 <광채: 시작의 순간들> 자료를 한가득 들고 가서 포토세마(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약칭)가 얼마나 멋져질 곳인지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마틴은 “잘했고, 오픈도 잘할 거야”라는 한마디로 끝내더군요. 오히려 미술관이나 전시 이야기보다 저를 더 궁금해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관심사가 뭐야?” 같은 질문들을 계속 했어요. 서울에서 무거운 자료를 이고 지고 찾아온 사람보다 그 사람 자체를 더 궁금해하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날 교토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마틴은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었습니다. 저는 비에 젖은 맨발이었고요. 서로의 발을 보며 한참 웃다가 발 사진까지 같이 찍었습니다. 그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마틴은 사진 속에서도 늘 사람을 궁금해했던 사람인데, 실제로 만났을 때도 똑같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사진보다 먼저인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아본다면요?
하나만 꼽긴 어려운데, 시리즈에 비 오는 날 박스를 주워 쓰고 가는 흑백 사진을 예전부터 가장 좋아했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는 시리즈를 특히 애정하게 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지루해 보이는 커플들의 모습인데, 지리멸렬한 관계의 모습들. 비단 연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거리감, 익숙함, 권태, 애정 같은 감정들이 잘 드러나 있거든요. 대부분 함께 앉아 있는데,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의 온도를 본 것 같아요.

기획자이자 첫 번째 관람객이기도 할 학예사로서 이번 전시에 대해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요?
아마 시각적인 즐거움은 작품과 전시 디자인을 통해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것 같고요, 전시장 안의 몇몇 공간에 깔릴 원색의 카펫을 조금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주 작은 부분인데요, 그 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촉각이나 분위기가 있어요. 어딘가 가벼워 보이지만 의외로 푹신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랄까요. 마틴 파의 사진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유쾌하고 가볍게 보이지만, 조금 더 오래 머물다 보면 다른 감정들이 보이거든요. 아마 관람객들은 크게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작은 감각들이 은근히 전시의 분위기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현재 전시명 외에 고려한 것이 있나요?
마틴 생전에 함께 고민했던 전시 제목은 <서울 파라톤 Seoul Parraton>이에요. 서울에서 열리는 마틴 파의 마라톤이라는 의미로 한없이 유머러스한 전시였어요. 모든 것을 비틀고 시도하는. 하지만 작고 후 아시아 최초의 회고전이 되면서 마냥 가벼울 수만은 없었기에 현재 제목으로 전시가 진행되고, 가장 적합한 제목이라 생각해요.
거장이라는 단어를 다른 표현으로 치환해본다면 어떠할까요? 마틴 파라는 한 인물과 생을 통찰해보았을 때, 거장이라는 단어를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마틴 파 재단을 방문했을 때 직원들에게 “Who Is Martin Parr To You?”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답은 모두 달랐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Mafia Boss”였습니다. 20년간 함께 일한 동료가 한 말이었는데 다들 웃었죠. 생각해보면 거장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평생 호기심을 잃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였던 사람. 이제는 거장이자, 어쩌면 마피아 보스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마틴 파와 실제로 마주할 기회가 있다면 무엇을 묻고 싶습니까?
Huh? We Did Pretty Well, Didn’t We?
그런데, 다큐멘터리가 예술과 동의어가 될 수 있을까요?
Absolutely. 마틴 파를 보면 알 수 있듯,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기록하는 방식일 뿐이고 예술은 그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윤신 : 합이합일 분이분일 3. 17 — 6. 28 | 호암미술관
태현선, 호암미술관 큐레이터

처음. 1935년에 태어나 1980년대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전기 톱 든 조각가’로 작품 세계를 펼쳐온 김윤신 작가의 국내 첫 최대 규모 회고전입니다. 가벼운 질문으로, 나무와 돌이 주재료인 김윤신 작가의 작품 물성상 전시를 꾸리는 데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드라마틱한 비하인드는 없습니다. 직원들과 첫 실무 회의 때 작품 소개를 마치고 나니 운송과 설치를 담당하는 미술관 직원의 표정이 제일 어두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전시 준비 초기에 작가님의 작품을 구별하는 일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기록상으로 조각만 550점 이상이고 평면 작품도 1천 점이 넘습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특히 소품은 거의 비슷비슷해 보이거든요. 분명히 보고 눈에 익혀도 잠시 딴 일 보고 나면 어떤 작품이었는지 헷갈려서 초반에는 계속 한숨만 쉬었습니다. 출품작을 빨리 정해야 하는데 작품도 구별 못 하니···. 작품 목록 소팅 Sorting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두 달쯤 되니 척척 구별이 됐습니다. 덕분에 엑셀이 조금 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문제는, 목록으로는 한쪽 면의 사진만 보지만 실물은 360도로 보게 되니, 봤던 작품도 다른 쪽에서 보면 “어 여기 못 본 작품 있네요”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김윤신 작가가 남미 대륙의 드넓은 땅과 산에 매료돼 “오로지 저 나무들(한국에 없는 아르헨티나의 크고 단단한 나무들)로 조각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특히 나무 조각으로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것이 1984년부터의 일입니다. 이 초창기 시절에 대해 채집하신 정보 중 특히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전기톱, 나무, 돌조각 등등 제가 들은 아르헨티나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소개가 되어 더 말씀드릴 일화는 없습니다. 제 기억에 남은 것은 일화가 아니라 사람 김윤신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저는 풍요로운 자연 곁에서 가난한 이주민 여성 조각가로서 그 긴 시간의 삶과 예술을 지탱해오셨다는 데 대한 감흥과 존경심이 더 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40년을 한결같이 작가님을 보필한 김란 선생님(아르헨티나 김윤신 미술관 Museo KimYunShin 관장)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했습니다. 무작정 타지로 예술 하겠다고 혼자 떠나온 스승에게 “선생님은 작업만 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했던 용기랄까요, 심성이랄까요, 김란 선생님의 변치 않는 마음이 없었다면 오늘의 김윤신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김윤신 작가의 작업이 국내에 대두된 계기는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으로 압니다. 작가가 ‘뒤늦게’ 관심 받았다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예술계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었을지라도 대중적으로 널리 김윤신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데 40여 년이 걸린 시간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이신가요? 수백 년이 기본인 미술사에서 작가의 세계가 조명받기에 십수 년이라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한 것일까요? 혹은 우리가 알아야 할 표면 너머의 이야기가 있을지요. 사람 일이 다 때가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김윤신 작가가 국내 전시를 전혀 안 하신 건 아닙니다. 1988년 첫 귀국 전시 이후 2023년 전시 전까지 개인전을 여덟 번 정도 하셨으니 적은 횟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전시를 본다는 게 전혀 일반적이지 않을 때라 일반인들에게 작가가 알려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미술계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보다 더 얘기가 복잡합니다. 작가의 작업이 제대로 소개되려면 바로 그 남서울미술관 전시처럼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전시가 있어야 합니다. 지난 40년간 그런 전시가 없었던 것이 가장 아쉬운 점입니다. 한국 미술계가 늘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구미 국가에 계셨다면 아마도 좀 더 일찍 그런 회고전이 열렸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 그런 도시였다면 김윤신 선생님이 그렇게 훌쩍 떠나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또 한 가지는 1990년대와 2000년대로 오면서 미술관이 지향하는 현대미술 전시는 주로 동시대성과 국제화였습니다. 전통적인 조각 재료인 나무로 추상조각을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 작가에 대해 국내 미술계가 관심을 가질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가 도래한 것이 2020년대라고 할 수 있고, 선생님이 참가하신 2024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가 그러한 배경에서 꾸며진 것이었습니다. 어떻든 선생님은 행복해하십니다. 힘들었지만 당신은 하시고자 하는 예술을 원껏 하셨고, 당신의 예술에 대해 인정받는 시간이 왔으니까요.
직과 업, 예술사조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바라보았을 때 작가에게 인간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김윤신 작가님은 깨끗한 순수함과 뜨거운 열정이랄까요 야망이랄까요, 그것이 공존합니다. 겸손하지만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시고요. 전시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뭐 전시할 만한 게 있어야 할 텐데···”, “보시기에 전시할 만한 게 좀 있나요?”였습니다. 출품작을 같이 선정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모두 다 작가님의 자랑스러운 작품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냐면, 작품에 대해 궁금한 걸 여쭐 때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시고 자랑스러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겸손이 미덕이 아닌 사회가 되기도 했고, 예술가들에게 겸손이 딱히 요구되지도 않기 때문에, 만나본 중 드물었던 모습입니다. ‘쉼 없이’, ‘한결같이’라는 표현이 진부한데도 대체할 표현을 찾지 못하고 늘 썼습니다. 인터뷰 때, 죽는 날까지 작업하고 싶다던 말씀이 결코 빈말이 아닐 만큼 작업이 생활 자체이고, 직장 다니듯 작업실에 가십니다. 일반 직장인들과 달리 즐겁게.

이번 기사에 함께하는 전시, 아티스트의 공통점은 수십 년을 예술로서 성찰하여 ‘거장’이라는 호칭이 붙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가 지닌 다른 점은 작가가 현존한다는 점입니다. 실재하는 작가와 대화하던 중 가슴을 턱 맞은 듯 울림이 있던 적을 돌아본다면 어떠합니까?
또 솔직히 말씀드리면 ‘거장’에 걸맞은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가슴을 턱 맞은 듯 울림을 준 이야기는 예술과 관련 없는,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였습니다. 어떻게 그 어린 소녀가 이런 시간을 살아낼 수가 있었을까 하는 믿기지 않는 일화들. 식민지 시대부터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 상황 등등. 제가 “아!” 했던 순간은 작가님과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라 나중에 혼자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그거는요···, 모르겠어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나와요.” 초반에 작가님께 작품에 대해 질문을 드릴 때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이 사실을 확인하고 이유를 찾고 분석하고 맥락을 부여해서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라 항상 저는 그게 숙제인데, 답을 이렇게 하시니 가져간 노트에는 물음표만 쳐놓고 답답해할 뿐이었습니다. 작품 제작 배경과 의도에 대한 설명은 요즘 작가들에게는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어요. 그러던 중에, 전시 자료를 만들기 위해 ‘합이합일 분이분일’ 개념을 여러 다른 말로 풀어보고 작가님의 말로 다시 들어보면서 저게 바로 ‘합이합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은 밑그림 없이 나무를 시간을 두고 계속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접신하듯 몰입해서 작업을 하시니 모르겠고, 저절로 나온다고 느끼실 수밖에요. 즉흥과는 많이 다른, 하나 되는 작가님만의 몰입의 시간. 그래서 전시 제목도 합이합일 분이분일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묻고 싶었지만 삼킨 질문도 있습니까?
삼킨 질문은 아니고 잊어서 못한 질문이 있습니다. 파리 유학 중 중간에 전공을 석판화로 변경한 이유가 조각과 교수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통상 이런 경우 다른 교수가 부임해오거나 할 텐데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전공을 변경한 이유가 무엇일지. 물론 석판화를 경험한 것이 사실 작가님의 조각이 발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건 결과적인 얘기이고 그 당시의 상황이 좀 궁금하기는 합니다. 혼자 추측하기에는, 선생님 성격이 급해서 못 기다리셨을 것도 같습니다. 무엇이든 작업을 손 놓고 계시지 못하는 분이셔서.

말씀대로 작가의 작업 이념에서 따온 전시 제목 <김윤신: 합이합일 분 이분일> 대신 고민했던 다른 이름이 있습니까? Devotion to Nature. 오랫동안 실무 과정에서 가제로 사용해왔습니다. 선생님 작업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자연, 오로지 자연을 담기 위해 긴 시간 달려온 김윤신의 예술.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귀에 설고 입에 붙지 않지만, 합이합일 분이분일로 결정했습니다. “더하고 나누며 하나”라는 시립미술관의 전시 제목이 합과 분의 사유를 우리 말로 함축적으로 잘 풀어낸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님의 작업 세계를 모처럼 다 펼쳐 보이는 전시니만큼 저는 선생님 본인의 표현 아래에 이 작품들이 놓이는 것도 이번 회고전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고 생각해서 원문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태현선 학예연구사님은 1995년부터 삼성미술관 리움 현대미술 학예 연구원으로 30년 가까이 현대미술을 관찰하고 탐구해온 경력자이자 전문가로서, 언젠가 인터뷰에서 큐레이터를 영화감독에 비유하신 적이 있죠. 영화에 빗대어보자면 이번 전시의 장르는 무엇이라 여기는지요?
아주 오래전, 2001년 쯤에 아마도 어린 학생 대상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같네요. 큐레이터라는 직종이 미디어를 통해 이제 좀 알려질 때라,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실질적으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고민 끝에 일반인들이 잘 아는 영화감독에 비유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비유가 필요하지 않기도 하고, 전시에 영화를 비유하는 것도 그리 적합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장르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이번 회고전은 다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만약 김윤신이라는 인물 자체를 영상으로 담는다면 그 서사가 한국 근현대사와 이민사를 아우르는 가히 대하 드라마가 될 수 있을 거 같네요.
거장이라는 단어를 다른 표현으로 치환해본다면 어떠할까요? 김윤신이라는 한 인물과 생을 통찰해보았을 때, 거장이라는 단어를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김윤신을 거장이라는 느낌으로 바라본 적이 없어서 다른 단어로 치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느낀 김윤신 작가님은 “의심 없이 자기 예술을 하는 어른”이었습니다.
유영국 : 산은 내 안에 있다 5. 19 — 10. 25 | 서울시립미술관
여경환,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왜 유영국입니까?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 근대 거장 시리즈의 첫 번째 프로젝트 주인공으로 유영국 화백을 꼽았습니다.
무엇보다 유영국이야말로 근대와 현대를 동시에 지닌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1916년에 태어나 2002년에 돌아가셨기에 생물학적인 조건 자체가 근대와 현대를 아우른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유영국 작품이 가진 강렬한 ‘동시대성’이야말로 서울시립미술관의 한국 근대 거장 시리즈를 여는 첫 번째 작가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서울시립미술관은 근대 전문 미술관이 아닙니다. 그동안 선보여온 전시나 컬렉션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동시대 미술관에 가깝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근대의 거장을 다시 바라볼 때의 시각은 그 작가가 얼마나 지금, 여기로 불러올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유영국은 다시금 호명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작가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1930년대 아방가르드 실험부터 1999년 절필작까지 유영국 화백이 걸어온 궤적을 조망합니다. 이에 대해 “실험의 궤적”이라고 소개하셨죠. 어떤 점에서 유영국 화백의 지난 궤적을 “실험”이라고 칭하십니까?
유영국의 작가적 여정을 살펴보면 중요한 도전과 결단으로 마디가 져 있는 걸 관찰할 수 있습니다. 경성제2고보(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 것, 문화학원에 입학해서 추상을 자신의 예술적 여정으로 선택한 것, 사진 기술을 배운 것, 그리고 1964년 개인전의 결단까지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어떠한 전략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조직해가야 하는지 정확히 판단했고, 과감히 결정했고, 또 성실함으로 완성했습니다. 작가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학예사님이 유영국 화백을 “전략가”라고 묘사하신 부분도 인상 깊습니다. 왜 그를 전략가라고 표현하시나요? 전시를 기획하면서 문득 ‘대체 유영국 작가의 MBTI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가 S(감각)일까, N(직관)일까를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세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 오감을 통해 관찰하는 사실과 현실에 집중할까, 직관을 통해 큰 틀과 이면을 보는 것에 더 능숙할까···. 저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영국 작가는 정확히 그 모두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으니까요. 그는 언제나 현실에 자신을 그저 내맡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만의 전략으로 자기 앞에 놓은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 갔고, 그의 예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유영국을 전략가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유영국 화백을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이라 칭하는 연유와도 맞닿아 있습니까?
추상이라는 시각 방식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의 점, 선, 면 그리고 색채와 같은 조형적 본질로 소거하고 증류하는 과정이 추상의 과정입니다. 그 본질을 추출해내는 과정에서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소거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끊임없는 선택과 배제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추상이라는 시각 방식은 어쩌면 유영국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전시는 미공개작 15점을 포함해 170여 점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이라는 소개가 늘 붙는데요, 어째서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일까요?
작고한 근대 미술가들의 회고전 자체가 국공립미술관에서는 자주 열리지 않습니다. 물론 갤러리나 아트 페어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전시들은 자주 열리겠지만, 이와는 달리 이번 전시와 같은 대규모 회고전은 유영국의 경우에도 10년 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회고전 이후 10년 만입니다. 작고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기관이나 개인 소장가들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이번 전시처럼 115점의 유화를 모은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넘어 작품을 그러모으는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나요?
RM의 소장품은 원래 출품이 불가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오는 10월부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SFMoMA에서 소장품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이번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는 대여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포기했는데, 전시 세팅이 마무리될 때 갑자기 유영국 작가의 중요한 회고전에 작품을 대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 RM이 정말 유영국 작가를 좋아하는구나, 느꼈습니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여야 무엇보다 이 작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이 작가가 어떻게 조명되어야 더 도움이 되는지 고민했을 거라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에 등장하는, 1995년 <공간>에 남긴 유영국 화백의 언어가 짙게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를 통해 유영국 화백이 말하는 추상, 자아 성찰, ‘산은 내 안에 있다’라는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아주 다 없어진 다음에, 사물을 단순화해서 아주 다 없어진 다음에 새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한다. 목수가 대패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없어지면서 새롭게 나타난다.”
저도 매우 좋아했던 어록이라 이번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김선혁 감독님이 처음 다큐 편집본을 공유해주셨을 때 이 어록을 사용하신 걸 보고 너무 기뻤어요. 전시장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어록은 축약이 아니라 모두 그대로 사용해야 그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시장 월 텍스트와 전시 리플릿으로 사용하기엔 조금 길었기 때문에 저는 아쉽게 사용하지 않았지만, 추상의 본질에 대해서 가장 내밀하고도 깊숙이 고민해본 작가만이 남길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학예사님께 특히 선명하게 박힌 거장의 어느 한마디, 어느 한순간도 돌아본다면요?
유영국 작가는 과묵한 분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었고, 당신의 그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평론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묵한 작가가 남긴 어록이 너무나 순도 높은 사색과 깊은 성찰에서 길어 올린 말들이라 처음 모음집을 읽었을 때 가슴이 뛰고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어록은 1977년에 남기신 “산은 자연이 부여한 하나의 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추상의 빈 그릇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가 베고 잤을지도 모르는 산가 여인숙의 헌 베개같이 축소 해석되어 한밤 내내 친근한 대화를 오가게 한다.” 이것을 줄여서 “산은 추상의 빈 그릇일 수도 있다”로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배치했습니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자 유영국 화백의 아들인 유진 선생이 전시 현장에서 하신 말씀 또한 기억에 남습니다. 국민학생(초등학생) 시절 아버지 전시회를 보면서 “무엇이 좋은 그림인가요, 아버지” 묻자 유영국 화백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죠. “네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좋은 그림이다.” 지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하나같이 다 의미가 있어서 하나를 짚기 정말 힘들다는 모범 답을 해야 하지만···, 굳이 딱 한 점만 고른다면, 전시장에 들어서면 파트 1 <1964년, 내밀한 예술의 문을 열다>가 시작되고, 저 멀리 가장 정면으로 보이는 그림을 저는 제일 좋아합니다.(좌측 2번의 그림 ‘작품(Work), 1964’) 전시 도록에 실은 제 기획의 글에서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길게 썼습니다. 그만큼 이 작품은 유영국이 선과 색을 어떻게 겹쳐 사용하면 화면 전체의 긴장과 부드러움을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소묘적 확장과 색채를 활용한 회화적 확장 사이의 긴장을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또한 1960년대 중반 한국 미술계의 갈등과 시대적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가진 강렬한 에너지 때문입니다. 그 한가운데 주황색 선은 어둠을 찢고 쏟아지는 강렬한 빛 줄기이자, 이 모든 세계가 평면 위에 구현된 ‘회화’임을 일깨우는 날카로운 섬광처럼 느껴집니다.
좋아하는 그림은, 전시를 준비하던 처음과 기획자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내보인 지금 달라졌을까요?
사실 제가 좋아하던 그림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전시 기획을 통해 세상에 내가 좋아하던 그림들, 혹은 중요하다고 판단한 그림들을 공유하는 것도 너무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내밀한 기쁨으로 빛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도 그러한 기쁨을 자기 안에 더 많이 갖게 되길 바랍니다.

월간 미술 전문지 <아트앤컬처> 기자를 거쳐 2007년부터 경기도미술관, 2013년부터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시죠. 20년 가까이 현대미술의 다층적인 지형을 탐구해온 전문가이자 경력자로서도 이번 전시 기획과 실행 과정을 통해 새로이 배운 것, 깨달은 것이 있습니까?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과연 ‘이 시대 큐레이터란 어떻게 존재하고 기능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요.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한 물음으로 소급되는 과정이야말로 유영국 작가님의 예술과 삶의 여정을 추적하며 제가 얻은 가장 큰 배움이었습니다. 이 전시를 보는 관람객들도 제가 느꼈던 것처럼 유영국 작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또 즐거워하고, 그 작품을 통해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생명력’이 유영국 작품에는 존재하고, 그 생명력을 오늘의 현재로 전달하는 것이 이번 전시에서 가장 공들여 담아내고자 했던 지점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관람객이 ‘질문’을 가지고 이 전시에 동참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해서 작가의 결단의 여정을 따라 시간을 재조립하는 입체적인 구성을 택했던 것입니다. 왜 그는 1964년의 결정을 했을까? 왜 그는 추상에 몰입했을까? 어떻게 그는 추상의 문법을 발전시켜 갔을까? 관람객들이 계속 이어지는 질문과 함께 능동적으로 이 전시를 보게 되길 바랐습니다.
거장이라는 단어를 다른 표현으로 치환해본다면 어떠할까요? 유영국이라는 한 인물과 생을 통찰해보았을 때, 거장이라는 단어를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거장이라는 단어가 유영국이라는 예술가에게 과연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유영국은 그러한 칭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예술가입니다. 하지만 그는 거장이라는 단어가 가진 일종의 허위의식에 매몰되지 않는 작가입니다. 유영국에게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진정성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했을 때 비로소 느껴집니다. 유영국은 자신의 예술의 완성을 위해 돈이 굴러 들어왔던 양조장 운영을 포기했습니다, 대학 교수도 그만두었습니다, 작가들과의 교류도 포기했습니다. 오직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단순한 루틴으로 삶을 단순화시켰습니다. 캔버스 앞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보내는 그 지극히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무한한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2002년 타계한 유영국 화백과 마주하게 된다면 무엇을 묻고 싶습니까?
아마 이 전시를 보고 유영국 작가님은 저에게 딱 한마디 하실 것 같습니다. “잘 봤다.” 저는 아마도, 작가님께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