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소설가 권여선 – 애매해서 좋아요

2008.04.14GQ

권여선은 96년에 등단했지만 90년대 여류작가들의 약진엔 단어 하나 보탠 게 없다. 그러나 애매하게 지금, 젊은 작가들의 틈 바구니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작년 이상문학상에선 전경린 씨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와 선생님의‘약콩이 끊는 동안’이 최종까지 경합했죠. 전경린 씨가 1년 먼저 등단했으니까 순서를 지켜 상을 탄 셈이네요.
활동은 비할 바가 아니죠. 지명도도 차이가 많이 나고. 저는 오래 쉬었으니까요.

유조선이 침몰하고 숭례문이 무너졌어요. 이런 걸 소설로 옮기면 다들 허무맹랑해하겠죠?
지어내기도 힘든 얘기들이죠. 제가 숭례문 방화에 대해 쓴다면 방화범 가족 입장에서 사건을 따라가볼 것 같아요.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이런 말들.

지난해 ‘약콩이 끊는 동안’도 그렇고 올해 대상 탄 ‘사랑을 믿다’에서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요. 슬픈 일인데 너무 사소하게 쓰여져서 놀라웠어요.
죽음은 삶이 진행되다 갑자기 끊긴 거잖아요. 제겐 언제 죽었나보단 살아온 과정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삶이 란 게 참 슬프네요.
그러니까 제가 정면 승부를 못하죠. 이번에 대상 수상을 했어야 할 작품인 박민규 씨의 <낮잠>은 죽음하고 어쩌면 정면 승부를 하고 있더라고요. 담담하게 잘.

죽음하고 정면 승부한다는 건 어떤 걸까요?
독자들이 등장 인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읽기 시작하게 만드는 것, 과장하지 않으면서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만약 박민규 씨가 올해 대상을 타고 선생님은 또 지난해처럼 최종 경합했던 한 작품의 주인공으로 남았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하하하하. 기분 좋았을 것 같아요. 상 타서 싫다는 게 아니라, 작품을 다시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그만큼 독자나 평단으로부터 지명도도 부족하니까. 최종심에 여러 번 오르면서 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때 타면 좋았겠단 생각 들었죠. 많이 부담스럽고 뭐랄까 느릿느릿 쓰는 스타일인 제 리듬이 깨진다고 할까.

걱정 마세요. 상은 많으니까.
저는 명예 같은 것보다 상금을 받아서 좋아요. 원고료만으론 살 수가 없으니까.

작가가 돈 얘기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요.
단편을 일 년에 서너 개 쓰면 게으르게 산 게 아닌데, 연봉이 한 3백 정도될까요? 상금을 받으면, 아 1~2년은 더 여기에 몰두할 수 있겠구나. 시간을 번다는 기분이거든요. 그 돈때문에 다른 일 덜하고 소설을 쓸 수 있는 거고.

지난해도 올해도 선생님 작품 심사평을 보면 기법의 참신함이 돋보인다란 말이 나와요. 좀 웃겼어요.
저는 기법이라는 걸 의식하고 쓴 적이 없어요. 제 작품이 새롭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이상문학상인 관계로 이상의 문학 세계에 걸맞게 하려다 보니 그런 거 같아요. 작년에도 임철우 선생님은 시점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새로운 건 아니라고 쓰셨어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작품에 맞게 하는 거지 애초에 무슨 기법을 도입해볼까 구상하진 않거든요. 올해도 감추기 기법을 썼다고 하는데 감추려고 한 게 아니거든요. 좀 의외였어요.

96년에 등단하시고 한참 쉬셨잖아요. 왜 쉰 거죠?
청탁이 안 들어와서 못 쓴 거예요. 96년에 장편으로 등단하고 처음 청탁이 왔을 때 단편도 그때 처음 써본 거예요. 문학 수업도 안 돼 있고, 단편 양식이 장편과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였어요. 짧은 장편처럼 생각하면서 몇 편 썼는데, 신통치가 않으니까 청탁이 안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 와중에 단편들이 모여서 책 한 권 분량 돼가는데 내자는 곳은 없고. 8년 만에 한 출판사에서 내자 그래서 그냥 냈어요. 그리고 조용히 잊혀졌는데 어느 분이 그걸 보고 청탁을 줬어요. 그때 <분홍리본의 시절>이라는 단편을 썼어요. 등단한 지 9년 만에 새로 등단한 기분이었죠. 그걸 보고 하나 둘, 또 그걸 보고 하나씩 하나씩 들어온 거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한테 내가 김애란급이라고 말해요.

갑자기 소설 잘 써지게 하는 마법의 주사라도 맞았어요?
전 지금도 좋다는 생각 안 하는데 어떻게 상을 받았는지 의아해요.

안 쓰고 몇 년 동안 지낼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해요. 글이란 게 마약 같은 걸 텐데요.
그러니까요, 살아남은 게 신기하다고 얘기하는데, 여러 가지 많이 했어요. 아동물 원고도 썼는데 돈이 좀 되더라고요. 일 년에 그런 거 뭐 몇 개 하면 천이백만원 정도 받죠.

비슷한 연배의 여자 작가 중에 지명도 높은 분들이 꽤 있죠.
하성란 씨는 저보다 서너 살 어린 것 같고 전경린 씨는 두 살 위고, 은희경 선생님은 조금 더 많고. 제가 다시 쓰기 시작할 때 가만 보니까 치고 올라오는 젊은 작가들뿐만 아니라 정미경선생님 같은 필력 장난 아닌 아줌마 군단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서 제가 완전히 중간에 낀 형국이더라고요. 근데 찡겨서도 살 만할 것 같아요.

작품 안 쓰셨을 때 많이 읽으셨을 텐데 누구게 좋았나요?
한국 작가 중에 누구 좋아하냐와 통하는 질문인데, 제가 예전에 이런 취지로 얘기했어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 게 아니라 한 작가가 잘 쓸 때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그랬더니 그 기자가 좋아하는 작가도 없다고 썼더라고요. 사실 저는 정미경 씨의 어떤 시기의 작품을 좋아하고 은희경 씨의 어떤 시기의 작품을 좋아하고 뭐 이런 식이에요.

그럼 올 해 우수상 수상작으로 뽑혔던 작가들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건 대답할 수 있겠어요?
대라면야 다 댈 수 있어요. 정영문 씨는 잘 썼던 작품 몇 개가 있는데 제목은 잘 기억 안 나고. 하성란 씨는 초기에서 약간 벗어났을 때 그러니까 <루빈의 술잔> 다음 단편집이 좋고, 김종광 씨 단편선에서는 박장대소하고 웃은 게 몇 개 있었고. 윤성희는 쭉 잘 쓰는 것 같아요. 뒤통수를 때리는 건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옷깃을 잡아 끄는 것 같고. 천운영씨는 <명랑> 때가 좋더라고요. 박형서라는 작가는 진짜 궁금해요. 작품들이 다들 웃겨서. 박민규는 <핑퐁>, <지구영웅전설> 빼고 다 좋았어요.

<핑퐁>과 <지구영웅전설>은 너무 황당했나요?
황당하기도 하고 박민규스러운 면이 느슨해지면 그렇게 된다고 할까.

권여선스러움은 뭔데요?
딱지 붙어 있는 건 불편하고 외설스럽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편안해지고 싶더라고요. 수상집에 자선 대표작으로 낸‘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분홍 리본>나온 다음 처음으로 쓴 거거든요‘. 사랑을 믿다’가 두 번째고. 전 조금 온화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하다는 사람도 있고, 변한 건 알겠는데 그게 싫다는 사람도 있고.

그 취향들을 다 어떻게 맞추겠어요.
아무튼 조금씩 바뀌면 좋겠어요. 다음 단편집 나올 때까진 따뜻하게 갈 거예요. 인물들을 벼랑으로 모는 일은 안하고 싶어요.

케이블 채널에선 시청률 1%가 안 나와서 접는 프로그램이 많아요. 그런데 책은 0.5%만 팔려도 초특급 대박이잖아요. 작가들은 자신을 위해 쓴다지만 소통이 안되면 외로울 텐데.
사실 1%를, 아니 0.1%도 0.01%도 아는 사람이 없는 글을 왜 쓰냐면요, 영화에 천만 명이 들게 하려면 고려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우회해야 하고. 제글도 많은 독자가 읽어주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굉장히 여러 가지 것들과 타협해야 하거든요. 소수라도 읽든 말든이라고 말하면 오만하겠지만 어쨌든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걸 썼는데 백 명이라도 공감하고 읽어주면 그게 기쁨인 거죠.

소설엔 늘 상처받은 인물이 등장하잖아요. 그걸 쓰려면 작가도 외롭겠어요.
그래서 글 쓰는 사람들이 겪는 분열적인 면이 있어요. 무당 같다는 느낌도 받아요. 의도적으로 사람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 여러 가지가 굉장히 다른 빛깔로 보이죠. 온전히 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떠 있는. 그래도 좋으니까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힘든 게 왜 좋아요?
글이라는 게 좋고 싫음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표현하도록 허락해주질 안아요. 그렇게 되면 추하고 헤벌레하게 되죠. 언어라는 장치를 통과하면서 제가 무턱대고 좋아했던 것들 혹은 싫어하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돼요. 그렇다고 글 쓰는 사람들이 다들 넓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괴팍한 사람이 많고 저 역시 그런데, 쓰지 않았다면 더 심했을 것 같아요. 언어란 것이 한 사람을 바꾸는 거예요.

무슨 요일 좋아하세요?
매주 달라요. 이번 주는 청탁 온 단편을 하나 써야 해서 월화수목금토일 다 싫고요, 아무래도 다음 주 월요일까지 못쓸 거 같고. 화요일쯤 완성해서 보내면 나머지 날들은 다 좋을 것 같아요. 시험공부랑 비슷해요. 눈앞에 닥쳐야만 하니.

시험공부랑 비슷하면 잘하시겠네요? 공부 잘하셨다고 들었어요.
비슷하니까 그나마 마감에 맞게 넘기는 거죠. 글에 대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에요.

햇살이 들어오는 카페에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니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아요?
인기는 없지만 예술적으론 가치 있는 그런 영화요? 하하.

지금 한국 소설의 지형도에서 권여선은 어떤 존재일까요?
저는 목요일쯤에 있는 것 같아요. 애매하게. 제 애매함은 현실의 문제를 떠나지는 않아요.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일상이죠. 근데 일상의 문제를 다루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남녀, 부부, 자식, 부모, 이런 것들인데 얼마나 진부해요. 그렇다고 큰 살인 사건을 벌이지도 않는데, 이런 것만으로 사람들을 읽게 만들고, 읽는 동안 가슴속에 미미하게 뭔가 일어났다고 느끼게 해야하고. 그런데 저는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게 잘 되면, 모두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와 만나고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게 제 자리예요.

    에디터
    이우성
    포토그래퍼
    심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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