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합창

천사들의 합창

2015-09-17T12:46:25+00:00 |ENTERTAINMENT|

‘시네마 엔젤’은 영화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는 프로젝트다. 영화판이 좀더 신나게 되길 기대하면서 독립영화를 지원하고, 영화로부터 소외된 곳에 영화의 샘을 파기도 한다. 이를 기념하면서 여섯 남자배우를 만났다. 흰셔츠를 입은 그들은 천사를 연기했다.

사진 찍기 싫어요? 란말이 혀끝까지올라왔다. 카메라를보며 간혹 웃었을 뿐정재영은 입을 거의 안열었다“. 근데와일드한천사도 있나요?”처음에 우리가설명해준 것처럼,‘와일드’한 천사로변신 중이었다.

정재영

“돈이요? 좋은 소재와 그걸 만들만한 제작진이 있다면 상업영화에 몸 담는 배우도 독립영화에 참여할 거예요. 문제는 독립영화를 아마추어 영화와 동일시하는 분위기예요. 독립 영화는 특히나 무섭게 생각하고 덤벼야 해요. 우선 좋은 작품을 만들고, 본 사람들이, 독립 영화도 작품이 괜찮구나, 그러면 상업영화 찍는 사람들도, 한번 해보고 싶어지지 않을까….” 이야기하는 모습이 딱 동네‘아는’형이다. 이 형의 영화는 미아리 삼양극장에서 본 <사형도수>에서 시작된다. 주윤발이 <영웅본색>에서 쌍권총을 쏘기 전까지 형은 고양이 권법의 성룡이었다. 어릴 땐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의 사진을 코팅해 책받침으로 썼고, 머리가 좀 커지자 흠모하는 여자를 이자벨아자니로 바꿨다. “예쁜것도 예쁜 거지만, 외모에서 느껴지는 매력이 뭔가 대단했어요.” 놀랍게도,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 형은 좋은 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개인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배우가 울면 관객도 울고, 웃으면 웃고, 화내면 화나야 해요. 동화되는 거죠.” 물론 그렇게 하는 건 늘 힘들다. 감독이 배를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가면 혹은 스태프 중 누군가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배우가 갑자기 고집을 부리면, 배는 산으로도 못 간다.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똑같죠, 뭐. 모두가 힘을 합쳐, 성격에 맞게 잘 만들려는 의지, 일단 이게 있어야 한다는 거죠. 하하, 뻔한 얘긴가?”관용적으로 이 형처럼 웃을 땐‘멋쩍게’라고 한다. 여기까지 동네 아는 형의 멋쩍은 영화 이야기.

신하균

스튜디오 한쪽에서 신하균이 샌드위치를 먹는다. 두 손으로 빵을 잡고 입을 한껏 벌리는데, 거짓말 안보태고 웃을 때도 그만큼 벌려 웃는다. “오늘 아침에 마지막 촬영이 끝났어요.” 박찬욱 감독의신작 <박쥐> 얘기다. 싱글벙글, 말끝마다 그는 웃곤한다. 싱겁게 보이려는 연출 같은 거 아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렇게 아래로 꾹 눌러야 플레이가 되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어요.” 언제나 ‘친구네 집’에만 한 대 있는 그 기계. “맞아요. 꼭 비디오는 친구네 집에 있죠. 중학교 땐 종로 3가에 가서 영화를 봤어요. 지하철 문이 열리면 계단을 막 뛰어 올라갔죠.” 주윤발, 성룡, 유덕화…. 신하균이 처음 극장에서 만난 배우들이다.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한 건아니다“. 이거 말고 하고싶은게 없어요. 이 일 이상으로 열정이 생기는 일이 있다면 바꿀 자신이 있어요. 지금은 이게 재미있어요.” 여전히 웃는다. 하지만 스크린 속 신하균은 대체로 웃지 않았다. 그는 가로등이 필요할만큼 어두워 보였고 비스듬히 서있는 듯했고 어딘지 홀린 사람 같기도 했다. 웃어도 ‘그냥’웃지는 않았다. “굉장히 순간적인 건데, 제게 염세적인 면이 있어요. ‘어차피 아둥바둥쳐 봤자’이런 생각이 들죠. 잠을 자면 깨잖아요. 그게 과연 뭔지, 잠은 곧 죽음 아닌지, 매일매일 죽고 매일매일 태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천사의 안내를 받을까? 아님 박쥐가 될까? “죽으면 그냥 끝일 것 같아요. 근데 왜 모든 생물은 잠을 자게 만들어졌을까요? 왜 잠을 자지? 어차피 죽을텐데.” 그는 또 웃었다.

에디터가 팔을 펼치고시범을 보이자, 그는“좋은데요, 비상하는것처럼”이라고대답했다. 그리고몇 십 번 비상한 뒤,다시 착륙했다. 지친기색은 없었다.

김강우

김강우가 서른살이 넘었다는 사실에 잠깐 당황했다. 당연히 이십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다들그렇게 본다며 반문했다. “(하)정우하고 동갑이에요. 정말 제가 더 어려 보여요?” 생각해 보면 김강우는‘청춘영화’로 이름을 알린‘청춘배우’의 마지막 세대 같다. 배우가 일차적으로 몸과 얼굴을 보여주는 직업이라면, <태풍태양>의 김강우는 그 일차적인 역할만으로도‘발광’했다. 불완전함이 갖는 매력, 그 잠깐의 시기. 이후 김강우가 다양한 장르를 탐험하는 동안‘후배’는 눈에 띄지않았다. 여전히 그는 ‘선배’같지않다. “억지로 삼십대처럼 보일 순 없으니 장점으로 생각하려고해요.” 라고 말하면서도 꽤 자주, 청년이란 단어를 아끼는 물건대하듯 입에서 꺼냈다. 우선 영화에 대해서. “마틴 스콜세지는 지금도 청년같아서 좋아요.” 그리고 연기에 대해서. “오래 연기하신 분들이 자신의 연기에대해 즐겁게 이야기할 때의 눈빛, 그눈빛이 있다면 나이를 먹어도 청년인것 같아요.” 서른 한 살의 남자가, “이기적이고 냉소적이면서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자신이 “일을 하면서 철이 들어가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도 어딘가 생경하다. 빨리 어른이 되려 하는 요즘 배우들 사이에선 더더욱 그렇다. 하고 많은 일들 중에 배우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먹고사는 걸 해결해주는 직업이면서 재미까지 있으면 된 거 아닌가요.” 청년만이 내놓을 수 있는 답이었다.

하정우

독립영화, 모호한 단어다. 어디서, 어떻게, 어디로부터 독립했다는 건지, 어디까지, 어떤 이유로 독립한 건지, 마땅히 정의된 것이 없다. “독립영화가 저예산 영화 아닌가요?”이런 말 하는 하정우도 정확히 알진 못했다. “무슨 선을 그어서 정의하기가 어려워요. 편의상 제작비용을 이야기하긴 하는데, 보통 20억원 미만이면 저예산, 혹은 독립영화라고 했었는데, 요즈음 또 바뀐 거 같아요. 10억이라는 사람도 있고, 5억, 1억이라는 사람도 봤어요. 저도 잘은 몰라요.” 그래서 독립영화의 반대말을 물었더니 알쏭달쏭, 긴가민가를 오가며 6초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잘 모르겠는데요. 독립영화라고 찍었는데, 나중에 홍보, 마케팅 등이 붙는 경우도 있긴 하죠. 그런 거 같아요. 독립영화는 찍으면서 좀 부담이 적다고 할까, 감정적인 연기, 실험적인 연기 등으로 표현방식이 자유롭죠. 반면 자본이 투입된 영화는 (많은 대중을 겨냥하기 때문에) 직접적이고 친절한 표현, 흥행에 대한 부담도 좀 있어요.” 여섯 명의 배우가 <지큐>에 등장해서 독립영화를 격려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편견을 갖고 있어요. 지루한 예술영화,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영화, 이런 것들 말이에요. 독립영화 만드는 사람은 그렇게 만들지 말아야겠고, 대중들도 그런 선입견을 갖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러저러한 이야기 끝에 하정우는 참 ‘독립영화적’이라는 말을 했다. 그의 기막힌 연기때문이긴 했지만, “CF도 잘 안찍고, TV에서 영화 홍보하는 것도 못 봤기 때문”이라는 농만 건넸다. “CF는 좀 아끼는 편이긴 해요. TV 출연은 아끼지 않아요. <1박2일> 같은 프로는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개인기도 있어요. 이승엽 선수 성대모사 같은 거.”

“아, 나 이런 거 진짜못해요.”김주혁은계속 얼버무렸다.‘약간 어두운 천사’를표현해보자는사진가의 말에 손발은어디로 둘 지‘헤매는척’거의 모든 컷에서딱 어울리는 표정을보여줬다.

김주혁

김주혁은 거친 듯 소심하고, 소심한 듯 느끼했다. <싱글즈>와 <프라하의 연인>이 그랬고, 연달아 찍은 영화 몇 편도 여지없었다. 이 의외성의 매력은 캐릭터를 비집고나와 자주 김주혁과 동일시됐다. 혹시 그가 매우 전형적인 배우라서일까? 최초로 흠모한 여배우는 피비 케이츠, 최초로 기억하는 남자배우는 알랭 들롱,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는 <벤허>, 가장 좋은 영화는 “오십 번 넘게 봐도 좋고, 음악까지 아주 죽이는 <시네마천국>.” 좁게 수렴하거나 툭 불거지지 않는 게 김주혁이다. “완전히 새로운 연기도 하고싶지만, 기존의 제 이미지와 비슷한 역할이 많이 들어와요. 어쩔 수 없어요. 오히려 이렇게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서 이미지를 알 수 없는 게 좋은 건 아니죠. 배우도 살아온 환경이 엄연히 다른데 관객이 공감할 수 없는 역할을 무리하게 연기 변신이라고 하는 건 어리석다 생각해요.” 출연한 영화 중 자신의 한계를 깨뜨린 경험을 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담배를 한번 깊게 빨고는 그런 거 없다고 했다. “나도 발전하지만, 만족할만한 목표치는 그때마다 더 멀리 가 있는 거예요. 연기가 골프 같아서, 그날 잘 쳤다고 다음 날 또 잘 치는 것도 아니던데요.” 시네마 엔젤 프로젝트의 ‘재능을 기부한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내가 뭐 얼마나 재능이 있다고….” 부끄럽다고 했다. 관객이 김주혁에 실망한 적은 없는 채로….

박해일

극장이 제 방인 양 떠들고 날뛰는 애들 틈에서, 여덟 살 박해일은 움츠러들었다. 혼자서 조용했다. “‘오류극장’이었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해일이 생일이니까 좋다, 한번 쓰자! 해서 처음 갔죠. 완전히 딴 세상에 온 기분, 처음으로 혼자 있는 느낌.” 암전된 극장에 빛과 음악이 깔리자, 지구가 위기에 빠졌다. ‘에스퍼맨’심형래가 ‘데일리’도 구하고, 지구도 구했다. 영웅은 지금보다 날씬하고 진중했다. “심선배가 굉장히 심각하게 인상 팍 쓰고 우뢰매 조종하는 장면 있죠? 그땐 진짜 절체절명, 지구 멸망의 위기였어요.” 생애 첫 영화는<우뢰매>였다. <유 콜 잇 러브> 소피 마르소의 도톰한 입술은 열 네 살 박해일의‘야한 꿈’속 주인공이었다. “‘네가 지금 나와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더냐? ’<경마장 가는길> 문성근선배 대사있죠? ‘무엇이더냐?’그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영화의 톤도 흥미로웠어요.” 오매불망 배우를 꿈꾸던 시네마키드는 아니었다. 몇 명의 배우, 몇 편의 영화를 선선히 스쳐왔다. “연기하는 이유, 두 가진데요. 살아야 하기 때문에 뭔가 하긴 해야 되고, 아직 부족하지만 해볼만하다는 자신감 또한 생겨서,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과 대답 사이의 침묵은 짧지 않았다. 얼굴 근육이 드러났다. <살인의 추억>이, <연애의 목적>, <좋지 아니한가>,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한 얼굴에 흘렀다. 착각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