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날 이해할 수 있겠어?

2010.09.02이충걸

E.L.
진화와 성장의 과정에서 뒤죽박죽됐건 아니건, 지금의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여전히 향기 나는 짐들로 번쩍거리는 잡지에서 일하며 나만의 방식, 나만의 주차구역에서 즐거워하지만…. 어떤 점으론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변했다. 현실적이란 말이, 세상과 인간의정신성 사이에 더는 특별한 마술이 없다고 믿는 거라면.

사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정신과 육체, 의식적인 경험과 뇌 사이의 관계를 추리하는 방법의 문제다. 그런데, 그 둘이 같은 거라면,그러니까 마음이 뇌라면 어떻게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파란색을 보는 경험이 세포의 무더기와 막조직, 소금용액과 같다는 것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신은 과연 지능이고, 추론하는 것이며, 감정을 가진 무엇일까?

아무리 넬슨 만델라가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알게 되는 평화를 주창한다 해도, 인간은 추상성에 사로잡혀 있는 동물이란 걸 잊지 않는다. 부처도 기절할 지구력으로 <반야심경>을 암송한들, 정신이란 수선된 생물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흐릿한 두개골을 훑어보다 엄청 진화한 뇌까지 탐사해봐도, 의식이란, 불멸하는 우주의실체라기보단 시간 속의 원시적인 덩어리 같다.

그래서 이젠,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 공감한다는 말, 우리는 하나라는 식의 말을 안 믿는다(확실히 변했다…. 하지만 양이 너무 적은 현재 나의 지식으론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경험, 관점, 의식은 타인이라는 생물체가 이해하는 객관적 언어로 번역될수 없다. 그 사람에 대해 아무리 많은 분량의 사실을 분석하고 관찰하고 조합해도 그의 경험은 자체로 주관적이다. 신체적 상태를 묘사하는 거야 3인칭 시점으로 가능할진 모르지만…. 아무리 30년을 한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서로 아는 모든 것을 나누어도, 미처 공유하지 못한 것들은 이해 밖의 공중으로 흩어져간다…. 누군가 불타는 장작을 보며 “나무가 타는 건 재빠른 산화작용 때문이야.”라고 말한다고 해도, 유기 화학을 모르고 산소며 원소가 무엇인지 모르면, 한낱 지적인 쓰레기로 들릴 뿐이다. 참조사항으로써의 낱말들은 똑같은 경험을 가진, 똑같은 감각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먹히기 때문이다.

면도를 하다 턱을 베었을 때, 고통은 뭔가 복잡하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A 델타 섬유질의 고통이 살갗에서, 다음 몇 초 뒤에는 C섬유질의 더 깊은 고통이 꾸물거리며 꼬리뼈로 육박해간다.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에 대해 느끼는 감흥을 확장시킨다. 다르게 말하는 법을 익힐수록 다른 경험을 가질 것이다. 경험이 성찰로 이어지기도 할 테고. 포도주 애호가의 복잡한 어휘가 와인 맛을 늘리는것과 참 비슷하다. 허세가 있긴 해도 그들은 타인이 취하지 못한 특정 감각을 말로 표현할 줄 안다. 하지만 어휘가 자세해지고 유용해질수록 다른 사람과 공감할 길은 좁아진다. 맛은 냄새고, 냄새는 지적 깊이가 있는 미스터리라서 실증할 수도 정량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와인에선 구아바 과일 맛이 나.’(난, 구아바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이 와인은 꼭 수줍어하는 가젤같아.’(가젤이 뭐야? 사슴이야, 똥돼지야?) ‘아, 꼭 시냇가 옆에 플루트가 놓인 것 같아.’(이건 무슨 풀 뜯는 소리냐고요….) ‘영원히 이어지는 신선한 풀의 마른 냄새’(지겨워, 정말….)

어쩌면 사물의 웅대한 진화 설계 속에서 언어는 아주 작은 현상 같기만 하다. 언어가 생각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긴 하지만, 언어없이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동물들이 고등한 언어 없이도 주변상황을 의식하고, 때로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의식하는 것처럼. 그래서 어떤 때, 단호한 깊이로 생각을 파고 들어가면 모든걸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생각은 너무 얽혀 있어서 한가지가 끝나고 또 다른 가지가 시작되는 지점이 어딘지 말한다는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생각이 동시다발적인 수백만 개의 신경 회로를 따라 발생하고, 그 회로가 각각 과거의 자극에 의해 형성된 뒤,현재의 새로운 경험으로 변하는 정신없는 와중에, 어떻게 가지런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걸까.

결국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워진, 다른사람의 행동을 설명하고 예상하던 추측들의 연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문제는, 스스로 어떤 존재라는 게 얼마나 확실하건 직관력이 얼마나 영원불변한가에 관계없이, 자기가 틀릴 리가 없다고 믿는, 창세기부터 이어진 각자의 완고함이다. 그래서, 있는 줄도 몰랐던 다른 곳에 진짜 현실이 존재한다는 영화며 소설이자꾸만들어지는지도 모르지.

역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내 자신이다. 청춘의 쾌락에 대해꺼낼 말이 없고, 중년의 허무에 대해서도 겪은 바가 없는 채, 내면에서 사탕에 미친 과민한 아이가 날뛰다가도, 거룩한 성자가 괴로워하며 물욕을 참는, 이런 내가 진짜 감당이 안 된다….

SIGNATURE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