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태양이 미치도록 뜨거운 날

2011.07.22이충걸

 

E.L.

호텔
마이클 잭슨이 묵었던 슈퍼 호텔부터 뒷골목 인숙이네 집, 여인숙까지 투숙해본 결과 내가 좋아하는 호텔에 대해 결론 내렸다. 화려하고 우아하면서 호스트와 게스트의 구별이 확실한 데도 좋지만, 등급은 비교적 낮으면서 필요한 부분만 제공하는 접대 방식, 자기도취 없는 단정함 뒤에 살짝 숨긴 안목,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점잖음과 허름함의 배치, 풀을 빳빳이 먹인 침대 시트의 말할 수 없이 까칠까칠한 쾌적함처럼, 요소 하나만으로 덥석 믿게 만드는 안목….

그런 점에서, 복도와 벽감과 응접실의 범박한 존재감이 외관의 장중함을 무찌르는 런던의 두란 호텔은, 내가 호텔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극적이지도 장식이 과하지도 않으면서 거기 빵과 마멀레이드만 먹으면 모든 게 용서되었으니.

스페인의 크고 근육질이며 밝은 이미지가 작열하는 마요르카 섬의 한 호텔은 그야말로 배산임수, 눅눅한 마음을 말렸다. 스위스 웨지스의 보리바지 호텔 테라스에서 강물 위를 떠다니는 보트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혼곤하게 보낸 어느 시절도 있었다. 스포츠 신문이 널린 로비에서 티와 스콘을 먹으며 정원을 흠향하던 스코틀랜드 엘긴의 호텔, 카페 피아니스트가 끝내주던 샌프란시스코의 헌팅턴 호텔,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저녁에 하늘의 별을 보며 캄프리를 먹던 베니스의 로칸다 치프리아니 호텔…. 내 수명보다 오래 유지될 것 같은 그런 호텔들만이, 순례의 궤적으로서 여러 도시를 묶고, 쇠하여가는 추억을 방부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전화 통화
기차와 전보가 사람들을 한데 모은 반면, 자동차와 TV는 의자에 앉아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들어 서로 흩어놓았다. 다들 샴쌍둥이처럼 눈은 아이폰 화면에, 손은 유아용 점자 같은 자판에 찰싹 달라붙은 요즘, 어떤 특징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전화 통화의 몰락…. 소셜 네트워크 세대는 통화를 안 한다. 횟수도 길이도 줄었다. 웅얼거리는 친구의 한 음절을 알아듣건 말건, 반쯤 토막난 어휘로 페이스북 업데이트 소식에 불과한 답만 할 뿐. 인터넷 노드의 젖을 같이 빠는 사람 말고는 말도 안 통한다. 마침내 전화가 올바른 소통의 방식이 아니란 게 노출되었다. 즉, 전화 통화는 사라져도 된다!

통화는 감정적으로 대역폭이 큰 소통 수단이라서 금방 지친다. 또 서로의 지금 상태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여하튼 서로 방해할 수밖에 없다. 야망에 찬 누군가는 한밤중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당장 전화로 알리는 게 어떠냐고 하겠지만, 상대가 뻑적지근하게 알몸교류 중이거나, 인천대교를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중이면 어떡해야 하지?

가끔, 버스 라디오의 전파 방해나 지하에서 약해진 신호 때문에 전화가 끊긴 뒤엔, 후련한 안도감 속에서 관계의 본질을 생각한다. 하지만, iMAC이 맥도날드에서 새로 나온 아침용 샌드위치고, 컴팩Compaq이 거울 달린 파우더인 줄 알았던 나로선 이런 변화들이 별로 놀랍지 않다. 소위 멀티태스킹이라고 불리건 아니건, 그건 그냥 생활의 한 방식일 뿐이라서.

불멸
천국은 없다고 스티븐 호킹이 그랬다. 시신을 냉동시켜 미래에 깨어나려는 족속들도 있었다. 그런데, 불멸이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이 아니었나? 신경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근거 위에 가능성을 열어둔 몇몇은, 신이 죽었건 말건 내세를 기대할 필요가 있다면서 손을 젓기도 한다.

불멸은 종교론적 의미보다 이교도적 의미를 갖는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생각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엔 내세 얘기가 조금 나온다. 모세가 기원이 된 보상과 처벌은 다음 생애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기독교 초기의 유대인만 신체의 부활을 심각히 받아들였다. 죽은 자가 다시 살리라는 개념은 베드로가 다시 언급했다. 유대-기독교 버전의 영생은 신 없이 불가능하니, 누가 마법처럼 성령으로 부활시킨단 말인가? 플라톤의 불멸엔 그런 게 필요 없다. 플라토닉한 영혼은 단순하게 지속적이므로 사람은 저절로 불멸한 것이다. 1970년대〈LIFE AFTER LIFE〉를 쓴 레이몬드 무디 이후, 멸종 직전의 동물이 게놈 프로젝트로 번식하듯 미래 생물체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처럼 부활할 거란 주장도 있었다. 양자물리학에선 모든 게 실존주의적으로 통합돼 죽은 뒤에도 소멸되지 않으며, 영혼은 일차원적 물질이 아니므로 양자 이론의 단일성에선 정보의 멸절이란 있을 수 없다.(스티븐 호킹도 블랙홀 안에선 모든 정보를 잃는다고 했다가 입장을 싹 바꿨다!)

우리는 의식, 성격, 추억 때문에 각각 독립된 인간으로 구별되지만 죽은 후에도 그것들이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될까? 정말 죽은 이의 에너지가 새로운 천지만물로 재생될까? 뭐, 그런 말은 들었다. 라디오가 고장나면 음악은 지직거린다. 라디오가 아예 뭉개지면 음악은 멈춘다. 하지만 라디오 시그널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계속 존재한다….

무수한 장광설 속에서 버트런드 러셀이 떠오른다. “도덕적 인간도 기면성 뇌염 하나로 포악한 인간이 되고, 똑똑한 아이도 요오드 부족으로 바보가 된다.” 아, 나는 내일도 내세도 모르고, 장마철엔 빗속을, 폭설엔 눈보라를 살아갈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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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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